지나가버린 기억, 이제는 추억이 되다.
평소 빵 종류는 반죽도 번거롭고 발효하는 과정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자주 만들지 않는 편이다. 많이 만들어보지 않았기에 자신이 없는 종목이기도 하고 말이다. 더군다나 그냥 도우뿐이 아닌 위에 올려질 토핑까지 생각해야 하는 빵들은 더욱더 거리를 두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귀찮은 것이라면 다 미뤄두는 게으른 나에게도 발효빵이 손쉽게 부풀어오는 여름이 오면 꼭 한 번씩은 만드는 빵이 있다.
피자빵.
피자빵은 제과, 제빵 통틀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매번 음식은 닭갈비를 외쳐대는 것처럼 빵은 늘 피자빵을 찾는다. 몇 번씩이나 그는 내게 배시시 웃으며 말하곤 했었다.
"사실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피자빵이 제일 좋아."
이처럼 고집스러운 그의 입맛에 두 손 두발을 다 들게 된 나는 이따금 만드는 피자빵으로 그와의 추억과 조우한다.
수년 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봄바랑이 살랑일 무렵 나는 그와 처음 마주했다. 신학기가 시작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명목 하에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였다. 나와 여학생들은 다른 곳에서 1차를 보낸 다음이었고,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즈음에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왁자지껄 신이 난 후였다. 그 날, 복학생들은 재미 삼아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군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상당히 재밌던 광경이었었다. 흥미롭게 안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초록색의 물결들을 헤쳐나가기 시작했고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새도 없이 누군가 이번에 우리 과로 온 전과생들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 인사를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사람을 마주했다. 그렇게 나는 그와 처음으로 악수를 나누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다시금 돌이켜보면, 그는 그 칙칙한 공대생 무리 속에서 작은 빛을 내뿜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선한 아우라가 그를 비추는 듯했다. '뽀송'하다는 표현이 그에게 걸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는 그 시절 내가 마주했던 그의 얼굴은 기억 속에 흐릿하지만, 그의 미소와 그 빛 만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쩌다 보니 그와 나는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숫기가 없던 나였지만 신입생 때가 까마득해져 가던 그 시절의 나는 옆에 앉았던 그와 쉽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꾀나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다.
그 날 이후 나는 다시금 그를 마주쳤는데, 다시 마주한 그의 표정은 흡사 온 방을 신나게 어지르다가 엄마에게 딱 들킨 어린아이 같았다. 복학한 친구에게 건네주었던 내 보고서를 친구와 함께 베끼고 있던 와중에 내가 딱 들이닥친 것이었다. 머쓱해하던 그의 표정이 재밌어 한참을 골려주려다가 참았었던 나였다.
그는 한 수업에서 복학한 내 친구와 같은 조였고 그녀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셋이 밥을 먹던 날, 그가 내게 물었다.
"파스타 먹으러 갈래?"
그날은 딱히 파스타가 엄청 먹고 싶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미적지근하게 그렇자고 대답을 했고 교실을 나섰었다. 그러자 친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빠는 여자들이 다 파스타 좋아한다고 일부러 파스타 사주려고 계획한 건데 니 반응이 시큰둥해서 너무 웃기다."
여자들은 다 파스타를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있던 바보 같은 그가 귀여웠고 우리는 친해지기 시작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