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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Mar 09. 2023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_

운 좋은 고양이 미쯔

지난 1월 단지 내에 느닷없이 까만 고양이가 나타났다.

으레 그래왔듯이 다른 곳에서 잠시 넘어온 지나가는 아이겠거니 했다.

뻔돌이가 전에 한 번 기를 쓰고 쫓아낸 녀석 같기도 해서

긴가민가했지만 그냥 가볍게 넘겼고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뻔돌이와 밤이를 챙기고 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다가오더니

"저기 앞쪽에 까만 고양이도 있어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혹시나 해서 찍어두었던 사진을 보여주며 "얘가 맞니?" 했더니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고 묻자, 최소 열흘은 됐을 거라고 했다.

"저희도 돌보고요. 다른 주민들도 같이 돌봐요!

원래 초등학교 앞에 있던 앤데 인기 고양이거든요!" 이러면서 둘이서 까르르 웃었다.


'응? 인기 고양이라니...'

인기 고양이님께서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싶었지만

그래도 일단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나가면서 볼 때마다 초등학생들만 고양이 집 앞에 옹기종기 있어서 의아했지만

집이랑 사료가 다 있는 걸 보면 아이들의 부모나, 누군가 어른들도 함께 챙기는 건 맞는 것 같았다.


문제는 깜냥이가 있다는 앞쪽의 상태가 좀 염려스러웠다는 것.

너무 눈에 띄는 곳인 데다가 여러 사람이 챙겨서 그런지

밥도 물도, 이불도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고 집도 엉망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분명 주민들 사이에서 또 말이 나올 테고 불똥이 냥이들한테 튀겠구나 싶은 아찔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이 지나고 경비 아저씨가 집으로 찾아오셨다.

앞쪽에 있는 까만 고양이 때문에 자꾸 주민들한테 민원이 들어와서 아주 골치가 아프시단다.

우려한 대로였다.


아저씨께는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하고, 어떤 주민이 챙기는지 당장 알 수 없으니

일단 쪽지라도 남겨놓아야겠다 싶어 급하게 적은 종이를 집 옆에 붙여두었다.

다음 날 보니 내가 적어둔 쪽지 옆은 갑자기 쪽지의 장(?)이 되어 있었다.

깜냥이는 미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미쯔를 챙기시는 분들 혹은 아시는 분들은 오픈 톡방을 개설했으니 들어와 달라는 쪽지였다.

그 옆에 중성화 신청도 했다고 아이가 꼭꼭 눌러쓴 듯한 쪽지도 보였다.


그렇게 들어가게 된 오픈 톡 방에는 이미 대화 중인 분들이 계셨다.

같은 동에 살고 있으면서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깜냥이의 존재 하나만으로 들어가게 된 오픈 톡방에서 갑자기 피어난 이야기꽃.

신선한 경험이었다.


뻔돌이랑 싸우는 걸 전에 한 번 봤다는 얘길 꺼냈더니

사실 그게 뻔돌이가 미쯔 밥을 훔쳐먹는 바람에 시비가 붙게 된 거라고 하셔서 어찌나 웃었는지(...)


공교롭게도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모두 강아지를 키우고 계신 견주셨다.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연일 영하 18도까지 떨어졌던 혹독한 날씨에

밖에서 홀로 견뎌야 하는 미쯔가 그저 안쓰러워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살뜰히 챙겨주신 주민들이었다.


근처 초등학교에 있던 아이가 어떤 영문으로 이 아파트까지 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

다음 주 화요일까지 집을 치우지 않으면 '고양이를 치워버리겠다'라는 관리인들의 으름장에

일단 미쯔를 구조해야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니, 그렇다고 '고양이를 치워버리겠다'니?

말을 해도 저렇게 밖에 못하는지.


천만다행으로 오픈 챗방을 개설하신 분께서 다음날 미쯔를 직접 병원에 데려가 중성화 수술부터 시키고,

임보를 하면서 입양처를 찾아보겠다고 선뜻 나서주셨다.

솔직히 이런 총대를 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분의 용기와 배려에 모두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미쯔는 사람을 잘 따르는 아이라 실내 생활에도 곧잘 적응했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좋은 분께 입양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렇게 빨리 입양이 되다니.

녀석, 정말 운을 타고난 모양이다.


무엇보다 미쯔를 애지중지했던 초등학생들이 몹시 서운해했다는 후문이 있긴 했지만 -

아무래도 그렇게 아껴주었던 만큼 미쯔의 행복을 바랐던 아이들일 테니

좋은 가족을 만났단 소식을 어쩌면 가장 기뻐하지 않을까.

어린 친구들이 길 위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서로 돌아가며 정성스럽게 돌보는 모습을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굉장히 감동이었다.

이런 아이들이 많아지면 이 나라도 제법 괜찮아질 텐데 싶었지.


길에서 4년 가까이나 지냈다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기억만 안고 가게 된 미쯔도 참 운이 좋은 고양이란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부디 꽃길만 걷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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