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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남자 Mar 03. 2016

토리노의 노신사




알프스 산맥에 둘러쌓인 토리노의 풍경. 토리노의 상징인 모레 안토넬리아나탑이 우뚝 서 있다.


토리노는 이탈리아의 북부 피에몬타주에 위치해 있으며, 한때는 이탈리아의 수도이기도 했던 도시이다. 밀라노에서 트랜 이탈리아를 타고 달리던 차창 밖으로 하얗게 만년설이 쌓인 알프스의 전경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나는 마치 63 빌딩을 처음 마주한 촌놈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토리노는 지리적으로 스위스와 인접해 있고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눈앞에 펼쳐진 저 눈 덮인 산은, 토리노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토리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흔하게 방문하는 도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유럽여행

을 계획하던 첫 순간부터 토리노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놓았었고,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

날만을 고대해 왔었다. 토리노에 대체 뭐가 있길래? 유럽축구에 대해 어느 정도의 관심이 있는 이라면 벌써 눈치를 채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유벤투스(JUVENTUS F.C)!


토리노를 연고지로 하고 있는 이 축구 클럽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클럽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수의 서포터들을 가진 유럽 축구계의 공룡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유벤투스에 대한 내 애정의 기원은 중학교를 다니던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때는 프랑스 월드컵이 한창이던 1998년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이뤄낸 거스 히딩크 감독은 당시 조국인 네덜란드팀을 이끌고 있었으며(지금과는 다르게 콧수염을 길게 기른 사나운 인상이었다), 조별예선에서 차범근 감독이 지휘하던 한국을 만나 5:0이라는 참사를 우리나라에-그리고 나에게 안겨주고 말았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이 거둔 성적은 1 무 2 패였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유럽의 벽은 높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유럽의 선수들이 보여주는 플레이는 수준이 달랐으며, 아마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유럽 축구에 대한 나의 동경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이자, 마지막 판타지스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Alessandro Del Piero, 오른쪽)'

98 월드컵이 펼쳐지던 한 달여의 기간 거의 내내, 나는 스포츠 신문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휴대폰만 꺼내 들면 저기 멕시코 리그의 정보까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당시에 유럽축구에 대한 기사를 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포츠 신문에 컬러로 인쇄된 선수들의 사진을 보는 것이란, 내게 있어선 마치 아이돌 가수의 정보를 모으는 여고생의 흥분된 마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브라질의 축구황제 '호나우두', 잉글랜드의 떠오르는 신성 '마이클 오웬', 프랑스의 마에스트로 '지네딘 지단',  네덜란드의 폭격기 '데니스 베르캄프'. 수많은 스타들이 나를 가슴 뛰게 만들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수는 이탈리아의 핀투리키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였다. '핀투리키오'란 라파엘로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의 이름이며, 이러한 예술가의 이름이 별명으로 불릴 만큼 그의 플레이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사실 당시에는 그의 잘 생긴 얼굴과 고급스러운 푸른색의 이탈리아 유니폼, 그리고 혓바닥을 굴려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멋지게 느껴졌던 그의 이름에 더욱 매력을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델 피에로와 이탈리아는 내게 있어 유럽 축구계의 첫사랑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유벤투스는 바로 그가 소속된 클럽팀이었다.


그러니까 1998년부터 2015년까지, 유벤투스의 구장이 있는 토리노를 방문하는 것은 거의 20여 년 가까이나 내가 품고 있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여행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축구 팬인 나에게 있어서는 성지순례와도 같은 의미였다고 할까. 과장 같지만, 실제로 그랬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나의 이러한 심정에 100%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리노에 있는 3박 4일 내내 들렀던 '원 애플 바(one apple concep bar)'.  마침 할로윈데이였고, 지나가던 꼬마애의 코스튬이  귀여웠다. -contax, t-3

이탈리아 축구리그의 명칭은 '세리에 A'라고 불리며, 경기가 열리는 날은 보통 주말이다. 홈경기와 어웨이 경기가 번갈아 벌어지기 때문에 날짜를 잘 맞춰서 가야지만 유벤투스의 홈경기를 볼 수 있었고, 때문에 -당연히 토리노에 머무르는 4박 5일의 일정 모두는 유벤투스의 홈경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행 전부터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 나는, 토리노 시내에 위치한 유벤투스의 팬샵을 시작으로 유벤투스의 전임 감독이자 현재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안토니오 콘테 감독의 단골 바인 '원 애플 바'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에 이르렀다.


'원 애플 바'는 콘테 감독의 동생이 경영하는 바(bar)로, 콘테 감독은 물론이고 유벤투스 선수들과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알려진 토리노의 숨은 명소(?)이다. 인스타그램에 'one apple concep bar'를 검색해 본다면, 콘테 감독은 물론이고 유벤투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축구선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들의 인증샷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나처럼 축구 팬이거나 유벤투스의 팬인 사람이 토리노에 들른다면 이 가게를 들릴 것을 추천한다. 훈련장까지 찾아갈 정도의 열정이 있는 이라면 그게 더 낫겠지만, 그 정도의 열정이나 시간이 허락지 않는다면 이곳도 괜찮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낮에는 커피를 마셔도 좋고, 밤에는 칵테일을 비롯한 술을 마실 수도 있는 곳이다. 운이 좋다면 축구 선수들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참고로 나는 토리노에 있는 3일 내내 출근 도장을 찍었었다)


유벤투스를 마음속으로 지지한 20여년의 시간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을까, 토리노에 도착한 첫날 나에게 콘테 감독을 만나는 행운이 찾아왔다. 




현존하는 그 어떤 감독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정을 가진 감독, 안토니오 콘테( 2014~2016.2 현재까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안토니오 콘테(Antonio Conte).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이전 유벤투스의 주장이기도 했으며, 선수로서 1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유벤투스와 함께 한 명실상부한 유벤투스의 전설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2011년 부진의 늪에 빠져있던 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곧바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2014년 팀을 떠날  때까지 리그 3연패를 이뤄 내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현재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있는 명장이기도 하다. 물론, 축구에 관심이 없는 보통 사람에게는 그저 흔한 외국인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영국과 스페인의 리그가 유럽 축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클럽팀에 소속된 이탈리아 국가대표 선수를 관찰하러 온 콘테 감독이 TV 화면에 비치자 해설진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씁쓸한 사례가 있기도 하다).


너무나 친절하게 웃어주며 사진 찍어준 콘테 감독님. -contx, t-3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린 '원 애플 바'의 창가 너머로 거짓말처럼 그가 앉아 있었다. TV 화면과 인터넷 기사에서만 보던, -거기다가 이탈리아에 살고있는 그가 바로 내 코앞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니! 유럽축구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흥분된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로 치면 홍명보 감독을 만난 셈이라고 할까? 한국의 축구 선수들도 한번 길거리에서 마주친 적 없는 나였기에 흥분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당장 다가가 사인을 받고 같이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먼저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뭐라고 말을 걸지? 흥분된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하던 도중, 외국인 여자 두 명이 콘테 감독에게 다가가 같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웃으며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주는 그를 본 순간, 나는 마치 놀이기구에 줄을 서듯이 그곳으로 다가가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고, 떨리는 목소리로 "I'm  you'r big fan."이라고 말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웃으며 악수해주고 같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축구 중계 화면과 인터넷 기사 속의 그는 늘 성난 얼굴의 열정이 넘쳐 보이던, 마치 갈기 털을 바짝 세운 사자와도 같은 인상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내 앞에 마주한 이 사람은 너무나 젠틀하고 선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유로 2016에서 이탈리아가 안 좋은 성적을 거두더라도 나는 콘테 감독을 욕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유벤투스와 토리노의 경기가 펼쳐지던 날의 버스 안, 절반 이상은 경기를 보러 가는 이들이었다. contax,t-3


2015년 11월 1일, 내가 예매한 경기는 유벤투스의 지역 라이벌인 토리노와 맞붙는 경기였다. 지역 라이벌이란 동일한 도시에 연고를 둔 복수의 팀을 일컫는 것으로, 토리노에는 유벤투스 외에도 '토리노 F.C'라는 전통의 클럽팀이 세리에 A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들이 으레 그렇듯, 양팀 간의 경기에는 전통적으로 치열한 라이벌 의식이 감돌고 있었다. 유벤투스의 팀 컬러는 흰색과 검은색 줄무늬이고, 토리노의 팀 컬러는 자주색에 가까운 감색이다. 경기를 하루 앞둔 날, 유벤투스의 유니폼을 구입하기 위해 토리노 시내에 위치한 유벤투스 팬샵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여자친구는 그날 우연찮게 담비가 그려진 감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유니폼을 이리저리 고르는 도중 오토바이를 막 타고 온 듯한 백발의 이탈리아 남자가 그 스웨터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영어를 못했던 우리는 그 남자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말을 거는지 몰랐고, 남자는 한참이나 스웨터를 가리키며 뭐라 뭐라 말을 했다. 수많은 말들 중 대부분이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몇 가지 단어만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유벤투스 스토어 앞에서. 각국의 남자들이 나와 같은 포즈로 쇼윈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iphone


"This Color, Tomorrow, Not Friendly"


내일 벌어지는 경기는 친선전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 여자친구가 입고 있는 이 컬러는 위험하다. 그제야 그 남자가 왜 스웨터를 가리키며 그렇게 경고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럽축구의 지역 라이벌전('더비전'이라고도 불린다)의 치열함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꺼내 입은 스웨터조차도 위험의 소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우리는 쇼핑을 마치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유벤투스 스타디움으로 가는 버스를 찾던 도중 들렀던 커피숍, 사실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커피값을 지불하고 들어간 곳이다. contax,t-3


드디어 기다리던 경기 당일,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문제에 부딪혔다. 토리노 시내에서 유벤투스 스타디움으로 가는 버스의 노선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각종 블로그나 커뮤니티를 통해 가장 가까운 노선의 정보를 입수한 터였지만, 정작 그 버스가 출발하는 정류장이 어디인지 정확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친절한 행인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영어를 못하는 우리는 정확한 질문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구글맵을 보며 한참을 돌아다니던 우리는 결국 버스 정류장을 찾아냈지만, 이번에는 버스 티켓이 문제였다. 이탈리아의 버스는 우리나라와 달리 탑승과 동시에 요금을 지불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일단 버스에 타면 자율적으로 버스 내부에 위치한 펀칭기에 티켓을 넣고 펀칭을 하여 요금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무임승차도 빈번하지만, 그것이 적발되었을 시 벌금 역시 상당하다고 한다. 이는 특히 이러한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객들에게 빈번하게 발생하며, 버스 안에는 무작위로 검표원이 탑승하기 때문에 우리 같은 동양인 여행객은 검표 대상 1순위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정류장을 돌아봐도 티켓을 파는 매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는 타바키(Tabacchi)라고 불리는 매점에서 버스 티켓을 판매하는데, 늘 그렇듯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그렇게 흔하게 널려 있더니만 정작 필요할 때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버스 티켓을 찾아 허둥대는 와중에도 경기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느긋하게 도착해서 유벤투스 뮤지엄도 방문하겠노라 세웠던 계획은 이미 포기해야만 할 상황이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우리는 눈에 띄는 사람마다 '웨얼 이즈 따바끼?'라고 물었지만 변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오는 대답은 "everywhere(어디에나)~"같은 무쓸모 한 답변뿐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탈리아에서는 타바키가 아닌 일반 매장에서도 버스 티켓을 파는 곳이 종종 있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우리는 보이는 상점마다 들어가서 버스 티켓을 찾기 시작했고, 델 피에로의 싸인 유니폼이 전시된 한 음식점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한눈에 들어오는 노신사 한분이 있었다. 60대쯤 되었을까, 백발의 긴 머리에 이탈리안 특유의 맵시 있는 네이비 슈트 역시 멋있었지만,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슈트의 포켓에 박혀 있는 유벤투스 엠블렘이었다.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대회 출전을 할 때마다 늘 이탈리아의 엠블렘이 새겨져 있는 슈트를 입곤 하는데, 나는 그게 늘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나도 정장에 이탈리아나 유벤투스의 엠블렘을 새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 앞의 저 노신사는 저렇게 내가 꿈에나 그리던 슈트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연세에도 팬심을 담아 엠블렘이 새겨진 슈트를 입는구나, 이탈리안의 축구에 대한 애정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꾸만 그 노신사를 흘깃 훔쳐보았다. 

드디어 만난 유벤투스 스타디움! -iphone

하지만 서로가 신기한 것은 우리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객은 물론이고 동양인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든 이 도시에서 유벤투스의 유니폼을 커플로 입고 있는 두 명의 동양인 커플이 신기한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주문하러 온 것도 아닌 우리에게 가게 주인은 친절 이상의 관심을 보였고, 아쉽게도 버스 티켓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근처에 위치한 타바키 매장의 위치에 관한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가게 주인의 호의적인 반응에 나는 용기를 내어 가게에 전시된 델 피에로의 유니폼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조심스레 물었고, 주인은 흔쾌히 승낙하여줬을 뿐 아니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네 가게에서 유명한 와인이라며 주방까지 들어가 와인 두병을 꺼내서 사진찍기를 권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유벤투스 정장을 입고 있던 백발의 노신사를 흘깃 훔쳐보았으며, 그 역시도 가게 입구에서 어설픈 영어로 버스 티켓을 구하고 있는 우리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마치 CF에 나오는 조지 클루니처럼 멋들어지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말이다.  





 

생애 첫 방문한 유벤투스 스타디움. 경기 전 우려와는 달리 가족단위의 관중들이 많은 축제와도 같이 흥겨운 분위기였다. -contax,t-3


우여곡절 끝에 티켓을 구입한 우리는 몇십여분을 달려 유벤투스 스타디움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전국구의 인기를 자랑하는 유벤투스의 홈경기 답게,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벤투스의 팬이었다. 사실 경기 전에는 훌리건을 위시한 과격한 성향을 가진 서포터들에게 혹시나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유벤투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두는 바로 'We are the world'! 경기 시작 전 스타디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에게 한 무리의 이탈리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드루기(Drughi)라고 불리는, 깃발을 들고 서포터석에서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그들 말이다. 몇 초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엄청난 위협을 느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네 도시의 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찾은 동양인이-정확히 말하자면 나 말고 내 여자친구가 신기했던 것이고, 여자친구의 주위를 우르르 둘러싸고 사진을 찍어달라며 나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그들에게 우리는 같은 팀을 응원하는 동지였던 것이다. 이것이 스포츠의 매력이 아닐까! 마치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와, 유벤투스를 응원한 내 지난 20여 년이 생각나며 묘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사실 나도 드루기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이탈리안들 아니랄까 봐 남자인 나에게는 한 점의 관심도 없었다. 쳇). 




 

커다란 유벤투스의 엠블렘이 관중석을 타고 올라간다. 경기시작 전 대형 전광판에는 우리의 모습이 비춰지기도 했다(카메라를 꺼낼 경황이 없어서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고, 식전 행사를 비롯한 홈팬들의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좌석 아래에는 검은색 비닐이 한 장씩 놓여 있었는데, 처음에는 쓰레기를 버리는 봉투인 줄 알았던 이것의 용도는 바로 카드섹션을 하기 위해 배치된 것이었다. 유벤투스의 상징인 흰검의 컬러를 몇만의 관중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광경이라니! 2002 월드컵에서만 보았던 스케일의 축제가 거의 매주 이곳에서는 벌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부럽기도 하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순간을 더욱 즐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셀카를 찍고 있던 유쾌한 아저씨, -iphone

TV로만 보았던 선수들의 생생한 움직임을 두 눈으로 보는 황홀함과 관중들의 열정적인 응원에 취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즈음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후반전을 기다리며 흥분된 경기장의 분위기에 취해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여자친구가 경기장 트랙 안에서 자꾸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며 나에게 말했다. 그라운드 바깥쪽에는 보안요원을 비롯해 슈트를 차려 입고 목에다 사원증 비슷한 것을 걸고 있는 구단 관계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뭘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다가 순간 어디서 본 듯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고, 재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더니 생각났다. 바로 아까 음식점에서 만난 유벤투스의 엠블렘이 새겨진 슈트를 입은 그 노신사였던 것이다. 




운 좋게도 맨 앞자리를 예매할 수 있었고, 유벤투스의 로컬보이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유벤투스 선수들의 생생한 모습은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팬심으로 유벤투스의 엠블렘이 새겨진 것이라 생각했던 그 노신사는 바로 유벤투스의 관계자였었다. 그것도 신기했지만, 아주 잠깐 스친 우리를 기억해주고 그 많은 관중들 사이에서도 알아보고 인사를 해 줬다는 게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이 먼 타국 땅에 우리를 알아보는 이가 있으리라고는 요만큼도 생각지 않았던 우리는 연신 윙크를 하고 손을 흔들어대는 그를 무시했지만, 노신사는 우리가 알아볼 때까지 인사를 해 주었다. '으이그, 버스 티켓도 못 사서 전전긍긍하던 녀석들이 용케도 무사히 찾아왔구나'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고 할까. 아주 작지만 따스한 그 노신사의 마음에, 토리노라는 도시는 대한 나의 애정은 화룡점정을 찍게 되었다.


폭발적인 열정으로 홈팀을 응원하던 꼬마 유벤티노. 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대자 이렇게 예쁜 미소를 지어주었다. -contax, t-3

모든 게 완벽했다. 전반전 터진 폴 포그바의 선취골로 1:0으로 앞서던 유벤투스는 이내 토리노에게 동점골을 내줬지만, 경기 종료 직전 후안 콰드라도가 역전골을 터트리며 짜릿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경기 이전까지 극도의 부진을 겪으며 중위권에 위치해 있던 유벤투스는, 이 날의 승리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2016년 2월 20일 볼로냐전에서 무승부를 거둘  때까지 15연승이라는 폭발적인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리그 1위로 복귀했다. 





햇볕 좋은 산 카를로 광장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노인(죄송한 말이지만,  유벤투스 구장에서 만난 노신사는 이보다 훨씬 핸섬한 남자였다)-contax,t-3


앞서 말했듯이, 토리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흔히 들리는 도시는 아니다. 물론 나 역시도 유벤투스라는 축구클럽이 아니었다면 올 일이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4박 5일의 짧은 체류를 통해 느낀 토리노라는 도시에 대한 인상은, 유벤투스 스타디움에서 만난 그 노신사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토리노에는 로마와 같은 웅장한 유적지도, 피렌체의 로맨틱한 분위기도, 베네치아의 곤돌라도 없지만 귀품이 있는 도시였다. 넘치는 관광객들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북적이지도 들뜨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생기가 없는 도시도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옛 수도라는 과거의 역사 답게 건물은 웅장하고 힘있었으며, 현지인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유벤투스의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나에게 모두들 엄지를 척 세워 주며 'Forza Juve(유벤투스 파이팅)!'을 외쳐 주었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산 카를로 광장에서 날리고 있던 풍선, contax,t-3


내가 다시 이탈리아를 갈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토리노를 선택할 것이다. 언뜻 무뚝뚝하고 시크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옆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했던 그 백발의 노신사와 같았던 도시. 젊은이의 착 달라붙은 슈트처럼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클래식한 귀품이 있었던 그 신사의 슈트와도 같았던 도시. 나는 토리노를 떠올릴 때마다 유벤투스를 떠올리며, 유벤투스 스타디움에서 만난 그 노신사를 늘 떠올릴 것이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 혹여나 다음번에 스타디움을 방문하게 될 때에도 마주칠 수 있다면, 나는 마치 유명인을 만난 것 처럼 기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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