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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남자 Mar 04. 2016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

지상 최대의 난제, 프러포즈




남자들에게 있어 프러포즈란, 지상 최대의 난제와도 같을 것이다. 로맨스 영화에서의 클라이맥스는 높은 확률로 남자의 프러포즈가 담당하며, 그것이 얼마나 로맨틱한가의 여부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각종 매체에서는 이미 수많은 방법의 프러포즈가 세상에 노출되었고, 때문에 보다 더 로맨틱한, 보다 더 기발한 프러포즈 방법을 찾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은 (아마도)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나는 로맨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저러한 작가들의 고충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작년 10월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종종 '"너 프러포즈는 안 하냐?"라던지, "네 남자친구 프러포즈 했냐? 설마, 아직까지 안 했겠어?"같은, 여자친구를 비롯해 주변인들의 폐부를 찌르는 말에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도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다, -iphone


변명이라도 하자면, 나의 경우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연애기간이 5년이 넘어가면서부터 양측 집안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를 압박했고, 연애 6년 차가 넘어가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너의 대학 나의 결혼'과 같은 상황에 접어들게 되었다. 당시의 예비 장인어른과 술자리를 가진 어느 날 '"자네 집 어른들께서는 결혼 이야기가 없으시냐"라는 장인어른의 말에, 나는 충동적으로 상견례 날짜를 잡고 말았다. 그렇게 상견례를 마치고, 이후에는 여느 예비부부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식 준비에 바쁜 나날들을 보냈으니, 대체 어느 시점에 '나랑 결혼해 줄래?'라는 말을 해야 적당했을까.  


미켈란젤로 언덕의 다정한 연인, canon, mark-2


물론,  나뿐만 아니라 이 땅의 많은 남자들이 아마도 나와 같은 '좋지 않은 타이밍'에 프러포즈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할 것이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의 프러포즈란 '나와 결혼해 줄래?'가 아닌,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게 맞을 테니깐. 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참신하고 용감한 프러포즈를 감행하는 남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내가 구구절절 늘어놓은 저것들은, 변명이 맞다. 나는 미룰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뒤로 미루는 성격이었고, 진지한 것을 좀체 참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마워"같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내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독촉장이 날아오다 못해 채권추심에 시달릴 때까지 미뤄두고 싶었었다. 얼마나 뒤로 미루었냐면, 결혼식을 올릴 때 까지도 프러포즈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시뇨리아 광장의 연인, contax, t-3


여자친구에게 말은 안 했지만, 나에게는 프러포즈에 관한 나름의 플랜이 몇 가지 존재했었다. 그건 적어도 방 안에 가득 채워진 하트 모양의 촛불이라거나, 풍선을 이용한 이벤트는 아니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 여자친구에게 저런 클리셰와도 같은 이벤트는 안 하니만 못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풍선 이벤트에 대한 사례를 하나 들자면, 나의 친형은 풍선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쇼핑몰에서 용품들을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배송지를 세밀히 검토해보지 못한 탓에 풍선은 형이 아닌 형수님의 주소지로 도착했고, 택배의 상자에는 선명히 '프러포즈 이벤트 풍선'이라는 물품명이 적혀 있어서, 택배를 받아 든 형수님은 "이거 나보고 프러포즈를 하라는 말인가?"라는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피렌체의 유명한 디저트카페 길리(gilli) 근처에 위치한 회전목마, canon, mark-2


"거창한 이벤트는 바라지 않아, 진심이 담긴 프러포즈를 바래" 많은 여자들이 그러하듯, 내 여자친구의 주문도 이러했다. 정말이지, 이건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서나 나올 법한 난제가 아닐까? 뭘 어떻게 해야 장원급제를 해서 금의환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건 은근히 내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나름대로 평균 이상의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었고, 여자친구의 주문대로 '거창하진 않지만 (물론 최대한 로맨틱한) 진심이 담긴 프러포즈'의 방법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한동안 빠져 있었었다. 이건 마치 시나리오를 짜는 것과도 같았다. 기발한 것 같은 아이디어가 몇 가지 떠올랐지만, 스토리를 짜 맞춰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도 같았달까. 거기다가 독창적인 부분은 하나도 없고 죄다 영화 속 프러포즈에서 베낀 아이디어들이 짬뽕으로 뒤섞여 있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나 역시 창의력은 개뿔. 남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못한 놈이구나 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다. 그렇지만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플랜 B가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피렌체의 야경, canon, mark-2


내가 믿고 있던 구석은 바로 유럽으로 떠나는 한 달짜리 신혼여행이었다. '내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다면, 로맨틱한 장소의 힘이라도 빌리자'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후보지는 크게 피렌체와 파리 두 군데로 좁혀졌다. 두 곳 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결전의 장소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곳은 너무나 진부했다. 누구나 피렌체 하면 두오모를 떠올릴 것이고, 파리 하면 에펠탑을 떠올릴 것이다. 맞다. 내 머릿속에도 떠오르는 장소는 그 두 군데밖에 없었다. 이름만 들어도 로맨틱한 파리와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프러포즈가 조금 더 끌렸던 것이 사실이지만, 여행 일정상 너무 후반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걸렸다. 나는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했고(이를테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몇 주간의 여행으로 지친 상태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로마에서의 첫 번째 일정을 마치고, 아직까지는 유럽에 도착했다는 흥분이 남아있을 만한 시기. 바로 두 번째 코스인 피렌체에서 하는 것이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결혼반지 대신에 각자의 팔에 새긴 타투, 결혼 기념일을 로마 숫자로 새겼다.


나와 여자친구는 결혼반지를 따로 맞추지 않았다. 대신에 로마 숫자로 된  결혼기념일을 각자의 팔에 타투로 새기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여자친구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었다. 사실 넉넉지 않은 형편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한 달간의 유럽여행에서 쓰일 경비도 만만치 않았었다. 때문에 보통의 부부들이 장만하는 다이아가 들어간 예물 수준의 반지는 도저히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타이거 JK 형님은 윤미래의 손가락에 노란 고무줄을 묶어주며 청혼을 했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여자친구 몰래 주얼리 샵에 가서 아무 무늬 없는 소박한 금반지 두개를 주문했다. 그것은 반지라기보다는 마치 빵 봉투를 묶을 때 쓰는 금색 띠지같이 가늘었지만, 프러포즈를 할 때 서프라이즈로 꺼낼 생각을 하니 나름 흐뭇하기도 했다.

   



베키오 다리에서, 달달한 연인. contax, t-3


조금 더 디테일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인터넷에서 '유럽 프러로즈', '피렌체 프러포즈' 같은 검색어로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는 관련 정보가 많이 있었고, 유럽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어떤 여자의 게시글에는 수많은 (당연히 여성분들의) 부러움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못 해도 중박은 치겠구나'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안도하며 수많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애초에 계획했던 두오모 성당은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적당치 않은 장소 같았다. 두오모 성당의 꼭대기인 쿠폴라에서 하는 것도 멋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그곳을 등반(등반이라는 단어가 최고로 적절하다) 해본 결과, 그것은 마치 꿈과도 같은 허무맹랑한 계획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미 그곳을 등반해본 많은 선구자들은 나와 같은 계획을 세우는 이들에게 현실의 가혹함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고- 쿠폴라 등정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그리고 정상의 공간이 얼마나 협소한지 인증샷을 찍을 때 조차도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 선구자들의 조언을 듣기로 했다.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는 이벤트는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르노강 주변을 걷는 나, canon, mark-2


그러던 중, 피렌체의 골목을 거닐다가 벤치에 앉아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한 여성분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댓글들도 다행히 호의적이었다. '그래, 이게 바로 특별하진 않지만 진심이 담긴 프러포즈가 아닐까?' 헌데, 그 골목이 어디며 노을이 예쁘게 펼쳐질 벤치는 대체 어느 곳에서 찾아야 할까? 쪽지를 보내서라도 묻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말해준다고 해서 내가 쉽게 찾을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적당한 장소는 피렌체를 여행하는 도중에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볕 좋은 날의 아르노강, contax,t-3


프러포즈 당시 여자친구에게 건네준 편지에도 적은 글이지만, 나는 최대한 영화와 같은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 물론 전혀 거창한 것은 없지만 말이다. 어제도 오늘도 전혀 특별한 일 없이 살아가는 것이 현실 속의 삶이지만, 조금이나마 영화와도 같은 순간을 만들어 주는 마법의 재료가 있다면 바로 음악일 것이다. 노을이 지는 피렌체를 바라보며 같이 음악을 들을 것이고, 귓가에 BGM이 깔리는 순간 준비했던 편지를 꺼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었을 즈음 비밀리에 준비한 결혼반지를 내민다. 이 평범한 계획이 내가 준비한 '거창하지 않지만 진심이 담긴' 프러포즈의 방식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음악을 쓸 것인가', '편지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였다. 평소 음악에 대해 별로 깊은 조예가 없었기에, 언뜻 떠오르는 곡은 최근에 즐겨 듣던 아델의 'Someone Like You'라든지, 피오나 애플의 'Across The Universe'같은 곡들 뿐이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가사의 내용이 어울리지 않음은 물론이고 프러포즈 배경음으로 깔기에는 너무 슬픈 멜로디라는 생각이 들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여자친구가 평소 자주 듣고 좋아하던 곡이라 정작 내 편지의 내용이 묻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내가 최후에 고른 곡은 가장 뻔한 음악이었다. 바로 그 유명한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제곡 말이다.




산타마리아 노벨라역에서 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두오모의 모습이 나타났다. contax, t-3


우리는 둘 다 유적지 같은 곳에 크게 관심이 없는 스타일이었지만, 로마의 장엄한 유적물들 앞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콜로세움은 상상했던 것 보다 몇 배로 크고 웅장했는데,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거대한 건물을 만들었을까 생각하면 나오는 것은  감탄뿐이었다. 생애 처음 유럽에 왔다는 흥분과, 앞으로 마주할 다른 도시들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채, 우리는 두 번째 코스인 피렌체에 도착했다.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내려 숙소로 이동한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유명한 두오모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이곳을 결전의 장소로 정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건물이 아무렇지 않게 생활의 중심지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니, 정말 환상적이다. -iphone


내 눈앞에 펼쳐진 저 건물의 아름다움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적절할까. 비단 두오모뿐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느낌이 아름다웠다. 아이보리색의 벽면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벽돌색의 지붕이 얹혀 있었고, 모든 도시의 컬러는 통일되어 있었다. 그것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티라미수 케이크를 진열해 놓은 모습 같기도 했다. 두오모를 비롯한 관광지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지만, 시장통 같지 않고 묘한 차분함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거기에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자체의 BGM으로 깔려, 도시를 더욱 로맨틱한 분위기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여자친구는 피렌체에 있는 종종 '없던 사랑도 생겨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동감한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이 왜 이 도시여야 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티라미수 케이크를 진열해 놓은 모습 같았다. -iphone


들뜬 마음으로 두오모를 보고 아르노강을 따라 걸으며 피렌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와중에서도, 나의 신경 한쪽은 프러포즈 장소를 물색하는데 쏠려 있었다. 두오모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야외 레스토랑도 괜찮을 것 같았고, 아르노 강의 주변에 있는 공원 벤치도 적당한 장소 같았다. 하지만 피렌체의 전경이 한눈에 담기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한 순간, '여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노을이 내리기 시작하는 피렌체의 전경, 미켈란젤로 언덕은 도시를 한눈에 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canon, mark2


나는 스스로를 꽤 무던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움에 왠지 모를 경건함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유럽이란 곳에 처음 온 촌놈이었기에 가질 수 있는, 내 안의 환상 같은 것이 더욱 작용을 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저 풍경은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고, 내 입에서는 탄식과도 같은 감탄만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웃기는 말이지만, 다시 눈을 뜨면 익숙한 우리 동네의 풍경이 펼쳐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가 뜨는 것은 자각몽 비슷한 것을 꿀 때 내가 하는 행동으로, 그만큼 이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감은 눈을 다시 떴을 때 역시 똑같은 풍경이 내 눈 앞이 펼쳐져 있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마셨던 페로니 맥주! -iphone

우리는 한참이나 앉아서 이 믿기 힘든 아름다움을 바라봤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도 구경했다. 인도나 중동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명당자리에 트럭을 가져다 놓고 맥주를 비롯한 음료수를 팔고 있었고, 우리는 페로니 맥주 두병을 사서 풍경을 안주삼아 마셨다. 여기라면 된다. 여기라면 뭘 해도 될 것 같다!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언덕은, 내가 오랫동안 안고 있던 프러포즈의 부담을 단번에 날려 준 보배와도 같은 장소였다. 도시 전체를 감도는 로맨틱한 기운은 마치 게임 속에서 능력치를 올려 주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 기운이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인 나조차도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줬달까. 그 마법의 기운을 받으며, 나는 이런 멋진 장소에서 인생의 중요한 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피렌체'하면 떠오르는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프러포즈 당시 건네준 편지에는 최대한 솔직한 내 마음을 담고 싶었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제곡을 틀어놓고 편지에 쓸 말을  몇 번이나 머리 속으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당시 적었던 정확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커다란 폰트로 강조해서 이곳에 똑같이 적기에도 쑥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당시 적었던 편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떠올려 보자면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나는 빈 말을 잘  못 하는 성격이고, 그것은 인생 최대의 전환점인 결혼을 약속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우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조차도 없었다. 오늘 이렇게 진심을 담아 경건하게 프러포즈를 한다고 하더라도, 내일 당장 사소한 일로 얼굴 붉힐 수도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 나란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영원을 약속한다'같은 무거운 말은 듣기 좋은 말로라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노력하겠노라고. 어떤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오늘의 아름다운 날과, 오늘의 맹세를 떠올리며 노력하겠다고. 그것만은 진심으로 약속하겠다, 는 내용의 편지를 적었던 것 같다. 물론 다른 닭살 돋는 멘트들도 더 있었겠지만 말이다.


조명이 켜진 베키오다리의 상점들. contac, t-3


결전의 날은 피렌체에서 머무르는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한번 더 노을이 지는 도시의 풍경을 보기 위해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고, 숙소를  떠난 지 십여분이 지났을 즈음 여자친구는 카메라를 놓고 왔노라며 숙소에 갔다 올 테니 잠깐 둘러보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프러포즈를 하는 순간, 준비한 편지와 반지 외에 꽃다발이 있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생각을 내내 했기 때문이다. 여자친구의 모습이 멀어지자, 나는 급한 마음으로 꽃집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비단 꽃집이 아니더라도, 연인들이 모일 만한 장소에는 늘 꽃 한송이를 들고 귀찮게 하는 잡상인이 많았기에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평소에는 그렇게 귀찮게 굴어서 피해 다니던 이들이 막상 찾으려고 하니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관광객들이 북적대는 우피치 미술관에서는 있을 법도 했는데, 셀카봉이나 이상한 찐득이 같은 장난감을 파는 이들만 눈에 띌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카메라를 들고 온 여자친구가 도착했고, 아쉬운 마음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무렵 눈앞에 꽃집이 나타났다. 아, 어째서 이제야! 하는 수 없이 꽃다발은 포기한 채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조토의 종탑에서 바라본 두오모,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contax, t-3


전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구름이 잔뜩 내려앉았기에 내심 걱정했지만, 맑게 개인 하늘은 오히려 첫날 방문했을 때 보다 더욱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노을이 내려앉자 여지없이 로맨틱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첫날과 마찬가지로 페로니 두병을 산 우리는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앉아 있는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는 책을 읽고 있는 사람, 혼자서 휴대폰을 보거나 노을을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많은 연인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피렌체라는 도시의 기운은 얻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다시금 소심 해지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이번에는 프러포즈를 하겠노라 다짐하는 찰나, 익숙한 언어가 귓가에 들려왔다.


" 한국분이세요?"


미리 이야기하지만, 나는 외국을 여행 간 이들의 '어디에는 한국 사람이 많아서 싫어요'같은 반응이 좀 꼴사납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작 자신도 한국인이면서, 본인 말고는 다 자신의 소중한 여행의 분위기를 망치는 족속들 쯤으로 취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한국인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속으로 저렇게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웃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때 내가 느꼈던 한국인에 대한 거부감은 저런 이유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왜 하필.. 지금!'


미켈란젤로 언덕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고, 한국인 역시 많았다. contax, t-3


내 말을 알아듣는 이가 아무도 없고, 내가 지금 무얼 하는지 주변에 있는 이들이 모를 것이라는 점이 내게는 용기를 낼 수 있는 큰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은 프러포즈를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이국 땅에서 하기로 결정한 요인 중  하나이기도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켈란젤로 언덕에는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계단 바로 위에도 한쌍, 우측 아래에도 한쌍. 그리고 두세 계단 아래에도, 그 옆에도 한국인 커플들이 있었다. 낯선 언어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모국어는 아주 작은 소리도 귓가에 달라붙을 만큼 정확히 들렸고, 그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당장의 문제는 이 좋지 않은 타이밍에 말을 거는 저 한국인 커플들이었다. 물론 알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그 커플들은 두오모로 가는 버스노선을 물어보았고, 대화는 짧게 끝이 났지만 너무나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들이 신경 쓰여서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은 듣기 싫어도 불가항력으로 그들의 귓가에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구경거리를 보듯이 내가 하는 프러포즈를 보겠지. 관객이 존재하는 프러포즈라니(물론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겠지만). 암튼 답 없이 소심한 나는 도저히 그들이 신경 쓰여서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더 지체하다가는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초조함이 찾아왔다. contax, t-3


조금 더 어둠이 내려앉자, 다행히도 바로 뒤에 위치한 커플들은 자리를 떴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한 무리의 또 다른 한국인들이 앉았고,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더 기다리다가는 편지에 적힌 글자를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들을래?"


여자친구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나는 준비한 음악을 두 번째 트랙에 놓고 이어폰 하나를 여자친구의 귀에 꽂아 주었다. 첫 번째 음악이 끝나고, 드디어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제곡이 귓가로  들려왔다. 다행히 그때까지 여자친구는 아무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깜짝 이벤트의 조건이 적절하게 갖춰진 것이다.


"편지 가져왔는데.."


나는 가방의 안주머니에 몰래 감춰두었던 편지를 꺼내 주었다. 여자친구는 평소에도 편지 써주는 걸 좋아했던 터라, 마치 깜짝 선물이라도 받은 듯이 좋아하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했던 편지였기에,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어느 대목을 읽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편지를 읽고 있는 여자친구를 빤히 쳐다보기가 쑥스러워졌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니 어둠이 내려앉는 피렌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웃긴 일이지만, 귓가에 흐르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제곡이 듣고 있자니 나조차도 뭉클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괜히 나 혼자만 이런 기분에 취해 있지는 않나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프러포즈의 성패란, 편지를 읽은 여자친구가 눈물을 흘리느냐 안 흘리느냐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여자친구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를 간절히 바랬고, 속으로 재어본 적당한 타이밍에서도 여자친구가 우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자 초조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자 여자친구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나는 '성공했구나!'하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 있었다.


잊지 못할 순간, contax, t-3


편지를 다 읽고 나를 쳐다보는 여자친구의 눈에 (다행히도) 눈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2차 공격인 반지를 꺼내는데, 창피하지만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손에 든 반지가 결혼을 약속하는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했음이 이유이기도 했고, 이런 준비한 것 없는 프러포즈에 감동해주는 여자친구에 대한 감사함이기도 했으며,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음에 대한 감동이기도 했다. 아마도 누군가가 봤으면 '쟤네 왜 저래..'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까지 눈물과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마운 피렌체. contax,t-3


이렇듯 나의 프러포즈는 전혀 창의적이지도, 스케일이 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곳의 감동적인 풍경을 나 역시 같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었다고 할까. 배우 황정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렌체가 차려 준 밥상에 나는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다.


유럽의 거리를 빛내주는 것은, 이런 악사분들의 아름다운 음악 역시 한몫했다. -iphone

지나고 나서야 하는 말이지만, 프러포즈란 그것의 형식이나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늘 그렇듯이 진심이 담겼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요즘같이 결혼식 날짜를 다 잡아놓고 하는 이벤트성의 프러포즈에 있어서는- 형식의 중요성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말이 프러포즈지, 결혼식까지 마쳐 놓고 마치 밀린 방학숙제를 하듯 치러낸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그런 주제에 이렇다 저렇다 훈수 두는 것도 웃기고 부끄러운 일이니, 나의 프러포즈 여행기는 여기서 마쳐야 하겠다.


잊지 못할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 -iphone

항상 글을 마무리 지을 때마다, 어떻게 끝내야만 할까 고민하게 된다. 뭔가 교훈이라던지 인상적인 글귀를 적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랄까. 그렇지만 그럴만한 깜냥도 되지 않고,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내가 인생의 이치를 깨우친 듯 베껴다 쓴 명언 비슷한 글귀를 적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나는 그저 피렌체에서 지낸 나날들이 꽤나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적고 싶었다. 그 황송할 만큼 로맨틱하고 아름다웠던 도시에서, 소소하지만 나름대로는 커다란 추억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


황홀한 야경의 아르노강, contax, t-3


지금도 피렌체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갈 것이고, 그만큼의 아름다운 추억 역시 새롭게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 속에는 피렌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겠지. 그러니까 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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