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2011년 9월, 경북대학교 병원의 대기실을 아직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만 그랬는지, 아니면 병원이라는 곳이 늘 그렇게 사람이 붐비는지는 나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오전에 도착한 우리 가족이 꼬박 세 시간을 기다려야 할 만큼 대기인원은 많았었고, 지친 아버지는 대기실 의자를 침대 삼아 누워 계셨다. 아무 곳에나 턱턱 엉덩이를 깔고 앉는다거나, 몸을 누일 공간만 있으면 체면치례 할 것 없이 눕고 보는 것이 아버지의 성격이었다. 서른이 가까이 된 나이에도 나는 그게 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아버지의 몸이 지쳐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고 말이다. 지금은 부끄럽다는 생각을 티끌만큼이나마 했다는 것이, 태산만큼이나 부끄럽다.
간암 말기, 췌장암 말기. 아버지의 병명이었다. 간 이식이고 뭐고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간암은 말기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병징이 나타나지 않아 '침묵의 암살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쉽게 누적되고 풀리지 않는 피로감이 바로 그 병징이었지만,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과도한 음주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자친구와 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온 후였다. 며칠 만에 본 아버지의 얼굴은 어색할 만큼 달라져 있었다. 눈동자의 흰자가 온통 노랗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황달인 것 같다고 하셨고, 당연히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어지간해서는 병원에 가시려고 하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 가족은 아침부터 서둘러 시내에 있는 경북대학교 병원으로 향했고, 세 시간을 기다려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결과를 말해주는 담당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밀검사를 받아 봐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이 병원에서 말고, 칠곡에 있는 전문센터로 가야 한다고.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한다고 했다.
" 입원해야 합니까? "
"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대로 있으면 죽습니다. 지금 칠곡 병원에 연락드릴 테니까 바로 가십시오. "
그저 검사받고 약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 줄 알았던 아버지에게 '입원'이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담당의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지만, 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는 이는 담당의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술 담배 조심하세요'같이 의례적으로 하는 의사들의 겁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칠곡 전문병원으로 옮겨 검사를 받고 아버지는 입원을 하셨다. '암센터'라고 버젓이 적혀 있는 병원이었지만, 나는 추호도 아버지가 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강인한 남자에 속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는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릴 것이라는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은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는 나의 습성 때문이었을는지도. 아버지가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 중에도 가장 상위에 위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억지로라도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았던 일이지만, 형은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나 충격을 덜 받게 하려고 최대한 말하는 것을 미뤄뒀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기간 동안 형은 혼자서 얼마나 큰 슬픔을 감내해야 했을까. 나는 형이 대단하면서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느껴졌다.
칠곡 암센터에서 지낸 열흘 동안 별다른 검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어떠한 조치를 취하기엔 늦은 아버지의 상태 때문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나 아버지는 의문스럽기만 했다. 아버지는 얼른 퇴원하시고 싶어 했고, 미뤄둔 농사일을 하도록 하루만 외출을 보내달라고 하시기까지 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역시나 괜찮으시구나 하며 어리석은 안도감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열흘째, 아버지를 서울에 있는 고려대학교 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아마도) 형의 부탁으로 정확한 병명을 알려주지 못한 칠곡 암센터를 그저 병명조차 밝히지 못하는 무능한 지방 병원으로 생각했다. 서울 병원은 뭔가 다르겠지. 그렇게 형의 차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했다. 고대병원은 형수님이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병원으로,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셔서 였는지 병원에서 이발을 하시고 머리가 잘 잘렸는지 연신 거울을 보셨다.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귀엽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차창 밖에 비친 그날의 풍경을 아직 기억한다. 9월의 초반, 무더운 여름은 차츰 물러가고 있었고, 짙푸르게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도 가을의 스산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른 우리 가족은 옥수수며 맥반석 오징어같은 간식을 사 먹었다. 아버지는 오뎅 국물이 드시고 싶다고 했고, 그날따라 희한하게도 오뎅을 파는 집이 눈에 띄지 않아 몇 곳을 뒤지며 겨우 찾아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우리 가족은 여행이란 것을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리석지만, 닷새 뒤에 돌아가실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이 나는 여행 같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나. 이렇게 모여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식을 사 먹고 서울로 가는 길이 마치 가족여행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은 그때가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준비해둔 휠체어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이런 거 타시는 분이 아닌데. 우리 아버지 괜찮으신데. 나는 의아하기도 했고, 휠체어에 탄 아버지가 몹시 낯설기도 했다.
서울에 가면 며칠 동안은 집에 내려오기 힘들 거다. 형은 말했다. 나는 지루한 시간을 달래려 스마트폰에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음악들을 나름대로 넣어서 갔다. 달리 잠을 잘 곳이 없었던 나는 병원 휴게실에 누워서 잠을 청했지만, 쉽사리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때문에 긴 밤 동안 음악을 들으며 잠을 설쳤다. 그때 넣어간 음악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앨범이었고, 유난히 서정적이고 슬픈 가사가 많은 곡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병원 대기실에는 나와 같은 환자 가족들이나 간병인들이 많았고, 완전히 꺼지지 않은 조명과 가끔씩 돌아다니는 간호사들의 소음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병마와 싸우는 이들의 힘겨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고 할까.
경북대학교 병원에서 처음 검진을 받은지 보름, 고려대학교 병원에 입원한지 5일. 그리고 아버지가 암 말기라는 것을 내가 안 다음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한동안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 그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좋아했던 노래를 들으면 당시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경험은 모두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은 나에게 스위치와 같았다. 스위치가 켜지면, 고려대학교 병원의 불 꺼진 대기실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도 모른 채, 영화나 음악 따위를 휴대폰에 옮기던 내 모습도 같이 떠오른다. 검사를 마치고 깨어나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는,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데리고 병원에 있는 벤치로 데려가 먼저 담배를 꺼내 주며 어렵게 입을 떼던 형의 모습도 떠오른다. 임종은 고향에서 맞게 해 드리기 위해 급하게 고속도로를 달리던 응급차와, 눈에 띄게 뻣뻣해져 가던 아버지의 거친 손의 감촉이 아직 떠오르는 것 같다. 임종을 맞으시던 경산 중앙병원의 초라한 병실, 그리고 창 밖에서 들려오던 공놀이 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목소리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몇여년간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를 억지로라도 듣지 않았었다.
나 솔직히 무섭다
그대 없는 생활 어떻게 버틸지
생각할수록 자꾸만 미안했던 일이 떠올라
나 솔직히 무섭다
어제처럼 그대 있을 것만 같은데
하루에도 몇 번 그대 닮은 뒷모습에
가슴 주저않는 이런 나를 어떻게 해야 하니
에피톤 프로젝트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中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라는 곡은 원래는 헤어진 연인을 칭하는 가사지만, 왠지 나는 아버지에게 하는 말인 것만 같다. 그래서 더 듣기가 괴로웠던 것 같다.
얼마 전, 지인이 준 초대권으로 에피톤 프로젝트의 공연에 다녀왔다. 이제는 그 노래를 들어도 스위치가 켜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내가 이런 글을 쓰며 당시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이다. 아픔은 사라지진 않지만 무뎌지긴 한다. 당연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그 때문에 나온 것이겠지.
그렇지만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조금 먹먹해지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