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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남자 May 16. 2016

곡성

인간의 비극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글은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읽지 않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곡성'이 난리다. '현혹되지 말라'라는 카피를 내세운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온통 미끼 투성이이며, 시종일관 관객들을 현혹시킨다. 그러한 현혹은 비단 영화 내적인 부분에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추격자', '황해'같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을 인상 깊게 보았던 관객들이라면, '곡성'에도 그와 비슷한 지점의 장르적 재미가 있으려니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섰을 것이다. 영화 개봉 전, 누군가는 예전에 개봉한 윤태호 원작의 '이끼'와 비슷한 영화라고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폐쇄된 작은 시골마을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사건이라는 짧은 시놉시스는 '이끼'를 떠올리기에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황정민, 곽도원, 천우희를 전면에 내세운 라인업을 보자. 언뜻 주연으로 보이는 황정민은 영화가 시작한 뒤 1시간이 지나도록 등장하지 않는다-물론, 실망시키지 않는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뒤늦게 나타나긴 하지만-. 휘몰아치듯 지나가는 두 시간 반이 지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던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곡성'은 '추격자', '황해'와 같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곡성'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룬 명백한 오컬트 영화였다. 하지만 감독의 전작들이 너무 강렬해서였는지, 영화가 끝나는 시점까지도 의심했던 것은 1차적으로 이 영화의 장르였었다.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의 관점으로 보기에는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부러 관객들에게 헛다리를 짚게 만드는 의도된 연출, 즉 곳곳에 산재해 있는 맥거핀이라는 함정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현실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존재까지 등장하니, 앞뒤가 맞춰질 리가 만무했다. '곡성'의 호불호가 갈리는 큰 지점이 여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를 온전히 스릴러적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오컬트 영화로서 바라볼 것인가 말이다.


희한하게도, 스크린에서 영화가 끝난 후에서야 비로소 영화가 제대로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을 받은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넷상에서 우후죽순으로 올라오는 '곡성'의 분석글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나홍진 감독이 의도한 바이며,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말 그대로 미끼를 제대로 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강렬한 떡밥의 유혹을 이겨낼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곡성'이 신의 존재까지 빌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의도치 않은 비극'에 관한 것이었다. '곡성'의 시발점이 된 감독 개인의 경험을 살펴보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이라크에서 불행한 사고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충격을 받은 나홍진 감독에게 '대체 왜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성직자들에게 해답을 구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기 때문에 누군가를 살인자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완벽한 답변이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는 효진(김환희)이 비극을 겪게 된 원인이 종구(곽도원)의 죄 때문이라 말하는 무명(천우희)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테면 '원죄'의 개념을 가진 종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죄 없는 자를 의심하고 해쳤기 때문에 너의 딸이 병에 걸린 것이다'라고 말하는 무명에게 종구(곽도원)는 반문한다. 그것은 '내 딸이 먼저 병에 걸렸기 때문에 외지인을 의심하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구(곽도원)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외지인(쿠니무라 준)에 대한 의심에 더욱 확신을 심어준 것 또한 무명(천우희)였기 때문이니 말이다.



무신론자인 내가 종교에 대해 논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곡성'은 종교 자체에 대한 의심이 기저에 깔려 있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기에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고, 그에 반해 신의 개입은 너무나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종구(곽도원)가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 이루어진 신부와의 대화는, 그러한 의심을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신부: 그 일본인이 괴물이라는 걸 눈으로 직접 보셨습니까?


종구: 보진 못했습니다.


신부: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십니까.

(정확한 대사는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신을 모시는 신부가 오히려 종구(곽도원)를 다그치는 이 씬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은 결코 믿거나 납득할 수 없는 동물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거기에서 신과 인간의 커다란 벽이 생겨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외지인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는 무명(천우희)처럼 늘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며, 선택을 강요받게 만드는 상황은 신이라는 존재가 선인지 악인지 의심하게 만들 정도이다. 그것이 악마의 꼬임인지, 신의 시험인지. 과연 누가 신인지, 누가 악마인지 헷갈린다는 소리다. '곡성'은 스릴러 영화의 장르적인 장치를 빌려 그러한 갈등을 관객들에게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도 그렇지만,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지막 30여분이 특히 그러하다.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무명(천우희)의 말에 종구(곽도원)는 갈등하게 되고,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홍진 감독은 관객들이 이러한 혼돈을 느끼기를 원했고, 그 속에서 각자의 답을 찾기를 요구했다. 저마다 다른 해석이 쏟아지는 '곡성'의 후기를 볼 때, 이러한 감독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인간사에 비극이 생기는 또 다른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우연'이다. 종구(곽도원)는 무당인 일광(황정민)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때 돌아오는 일광(황정민)의 대답이 이러하다.



" 자네, 낚시할 적에 뭐가 낚일 줄 알고 하는가? 그놈은 낚시를 하는 것이여. 뭐가 걸릴 줄은 그놈도 몰랐겠지. "



피해자가 피해자가 된 이유는 그저 재수가 없어서이다. 하필 가해자를 거기에서 만났기 때문이며, 종구의 딸 역시 악마가 던진 미끼에 우연의 일치로 걸려든 것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납득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명쾌한 해답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적어도 인간인 우리가 납득할만한 이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곡성'은 마치 범인 찾기를 하는 스릴러 영화의 형식을 빌어 이러한 종교적 의문을 관객들에게 체험시킨다.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진짜 악마인지, 무명(천우희)은 과연 우리 편이 맞는지, 일광(황정민)이 날리는 살은 누구에게로 향하는지를 추리하는 일련의 과정들 자체가 바로 그것들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정리되지 않는 의문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애초에 영화가 출발하게 된 물음, 즉 '인간의 비극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홍진 감독이 인터뷰에서 '영화를 본 이들의 감상이 너무 궁금하다'라고 했던 것이 으레 하는 빈말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이다. 신의 영역을 이해할 수 없는 같은 처지의 인간으로서, 다수의 사람들은 어떠한 의견을 갖고 있을지가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홍진 감독은 '곡성'을 피해자의 시선으로 만든 영화라고 했다. 주인공인 종구(곽도원)는 어찌 보면 평균 이하로 보일 만큼 나약하고 귀가 얇은 사람이다. 마치 나와 별다를 바가 없는 그런 보통의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는 거대한 비극을 맞이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초월적인 힘에 나약한 인간은 한없이 휘둘리고 고통받다가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구(곽도원)는 최선을 다 했다. 종구(곽도원)의 행적을 스크린으로 보는 내내 관객들은 같은 입장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고, 무엇이 옳고 틀린지를 판단할 수 없는 상태인 것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가 그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욕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암만 발버둥 쳐봐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추격자'가 신선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기존의 범죄 스릴러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노선을 택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뭐냐 하면, 기존의 스릴러 영화들에서 서스펜스가 발생하는 지점은 대부분 '누가 범인인가?'였었다. 그 유명한 유주얼 서스펙트의 '절름발이가 범인이야' 이후, 스릴러 영화의 가장 큰 장르적 쾌감은 바로 범인을 밝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 반전을 위한 반전을 끼얹는 영화들이 범람하고 그것이 식상해질 즈음, '추격자'가 등장했다. 기존 스릴러 영화의 클리셰를 과감히 깨고 영화 초반부터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이 영화는 상당히 신선했고, 그 때문에 나홍진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곡성'은 나홍진 감독이 20세기 폭스사에서 영화 제작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은 것으로도 유명한 영화이다. 그야말로 감독이 원하는 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앞선 '추격자'의 예처럼 클리셰에 함몰되는 것을 꺼려하는 나홍진 감독은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를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대중들의 반응 역시 민감하게 고려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황해'의 흥행 실패 이후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하는데, 그간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유머 코드가 삽입되었다거나 폭력의 직접적 묘사가 절제된 것이 바로 그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각 장면마다 관객들의 반응을 퍼센티지로 계산해서 변형시켰다는 그의 인터뷰는, 작가적인 욕심만큼이나 대중들의 반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재능 있는 감독이 흥행과 작품성 둘 다 노리고 만든 영화, 그게 바로 '곡성'이다. 의도된 모호함은 이미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벌써 수많은 관점의 해석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보는 영화에 그치지 않고, 듣는 영화, 읽는 영화,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영화까지 영역이 확장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긍정적이다. 적어도 역사적 위인의 이름을 몰라서 구설수에 오른 아이돌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보다는 생산적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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