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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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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남자 Aug 01. 2019

호날두와 복숭아

복숭아 96 상자를 팔아 779,616원을 벌었다.


상자당 나누면 8,212원인 셈이다. 판매전표에서 봤을 때는 100만 원이 넘었지만 박스 값과 운임, 판매 수수료를 제하고 온전히 통장에 들어온 금액이 그러하다. 어떤 이는 저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속 모르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당장에 손에 쥐는 금액이 적지 않으니 그렇게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두 달 안에 한해 연봉을 수확해야 하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농부는 가난하다'라는 인식도 틀렸지만, 억대농부 어쩌고 하면서 매스컴에 등장하는 귀농 성공신화 역시 드문 이야기이다. 현실은 언제나 그 중간 즈음에 있다. 아니, 나 개인으로 말하면 전자 쪽에 가까운 편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올해는. 2000만 원 한도의 마이너스 통장의 - 앞글자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6월, 7월이 가고 이제 8월이 남았다. 남은 한 달 동안 저 마이너스 통장의 앞글자를 지운다고 해도 연말에 다가오는 조합 가계 대출금, 600만 원에 달하는 농자재 구입비를 정산하고 나면 다시 마이너스 통장으로 돌아가겠지.



복숭아 직거래를 할 때면 고마우신 분들이 '고생해서 농사지으시는데..'라는 말을 하실 때가 있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세상에 고생 안 하고 돈을 버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는 땡볕 아래서 땀 흘려가며, 한겨울에 손 오그라들어가며 나뭇가지를 자르는 고충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나에게 송금해주는 2만 원 3만 원 역시 각자의 고충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돈일 것이다. 하다못해 설날에 하는 세배조차도 얼굴도 긴가민가한 낯선 어른에게 머리 조아려가며 하는 한철 장사의 고충이 있을 텐데. 농담이고, 아무튼 저런 말씀을 해 주시는 분들에겐 감사할 뿐이다. 가끔씩 더러운 걸 만지고 땀으로 옷이 더러워지지만, 사람으로 인해 더러운 꼴은 비교적 덜 볼 수 있다는 것이 농부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정관념에 따르면 농부들은 머리에 이고 오는 쟁반에 담긴 막걸리나 냉수만 마실 것 같지만, 나는 스타벅스를 좋아하고 자주 간다. 녹차 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를 먹으면 요즘 시세로 거의 복숭아 10kg 한 상자 값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편의점 커피조차도 손이 오그라들어 못 사 먹을 테다. 요즘 같은 한여름에는 오전 8시만 되어도 내 땀냄새가 내 코를 찌를 만큼 땀에 절게 된다. 얼굴과 팔다리가 검게 타는 게 싫어 항상 마스크와 긴팔 옷을 착용하기에 더하기도 하고. 에어리즘을 안에 입어도 맨살에 끈적하게 옷가지가 달라붙는 느낌은 불쾌하기만 하다. 그럴 때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스타벅스에서 뽀송하게 건조된 폴로티를 입고 마시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생각한다. 그럼 잠시나마, 개미 눈곱만큼이나 마 시원해진다. 차가운 도시남자. 퇴근하고 차가운 도시남자로 갈아입고 스벅에 가야지, 늘 생각하지만 현실은 7개월 갓난쟁이 재워놓고 맥주 한 캔 마시고 자기 바쁘지만.



지난 26일, 거금을 들여 유벤투스와 팀 K리그의 경기를 보러 친구와 서울로 올라갔다. 저렴한 좌석이 7만 원 대일만큼 고가의 경기였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유벤투스의 팬이었다. 신혼여행도 오로지 유벤투스 경기를 위해 토리노를 넣었을 만큼 좋아했다. 언젠가는 호날두가 뛰는 유벤투스의 경기를 두 눈으로 보고 싶었기에 이번 경기는 놓치기 싫은 찬스였다. 프리미엄석으로 결재하니 한 좌석당 25만 원이었다. 요즘 벌이로 보면 미친 소비이지만 눈 딱 감고 질러버렸다.


결과는?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공중파 뉴스에 도배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경기시간 지연으로 인해 막차도 놓치고 숙소비용까지 추가되니 1인당 50만 원 가까이 쓴 것 같았다. 복숭아 단위로 계산하면 60 상자 정도 된다. 복숭아 60 상자를 수확하기 위해 들어가는 나의 노력과 시간을 되새겨 보면.. 그만하자. 이렇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주급으로 7억을 넘게 수령하는 선수를 보기 위해 주급 50만 원이 채 안 되는 농부가 일주일치 주급을 지불한다. 서글프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나는 누가 등 떠밀지도 않았는데 그를 보러 대구에서 서울까지 내발로 왔고, 호날두는 66000명이 등 떠밀어도 그라운드로 나오지 않았다.




여독이 풀릴 때 즈음 호날두의 인스타그램에서는 러닝머신에서 즐겁게 뛰는 인스타 스토리가 올라왔고, 오전 일로 땀에 전 나는 풀숲에 잠시 앉아 휴대폰을 보며 그 피드를 보았다. 아주 조금 씁쓸했지만 오전 수확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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