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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남자 Aug 07. 2019

태풍 프란시스코

8호 태풍 프란시스코가 북상하고 있다. 대구 경북, 이 지역은 비교적 태풍 피해가 없는 곳이다. 하지만 이번 태풍의 예상 진로는 대구를 직격으로 가로지른다 하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강풍과 폭우가 동반된 태풍이 달가운 이가 누가 있겠냐만, 노지재배를 하는 나 같은 농부들은 특히 민감하기 마련이다. 당장 수확기를 앞둔 과일들을 무참히 땅에 떨구는 것은 예사요 그것이 두려워 전국의 농민들이 한마음이 되어 물량을 쏟아내니 당일 시세는 폭락하기 마련이다. 강풍이 불면 굵어질 대로 굵어진 과일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오래된 고목들은 둥치채로 부러지기도 한다. 그런 상황이니 무리하게 수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폭우는 어떨까. 한여름 가뭄에 시달리던 나무들이 수분을 갑자기 빨아들이면 제일 먼저 과일의 당도가 떨어지게 된다. 천도복숭아의 경우 과육이 트실트실해지며 끝부분이 터져버리기도 한다. 낙과도 심해져 폭우가 내린 후 과수원을 돌아다니면 땅에 떨어진 과일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뭐든 적당한 게 좋기 마련이지만 자연현상이라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니 순응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겨울에는 폭설이 내릴 것이고 여름에는 태풍과 장마가 오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지만, 늘 겁이 나고 무방비 상태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직거래로 주문받은 복숭아는 태풍이 오기 전에 수확을 해야 한다. 납품용 복숭아는 공동선과장에서 기계 선별을 해 일괄적으로 판매하는 시스템이니 가격을 주는 대로 판매하면 된다. 맛이 없으면 없는 대로, 상처가 있으면 있는 대로 알아서 선별해 가격 책정을 할 것이고 나는 그저 주는 대로 받으면 되는 일이다. 수입은 그만큼 적지만 뒤탈이 없기 때문에 돌아서면 마음은 홀가분하다. 하지만 직거래는 다르다. 내가 가격을 책정하고, 그만큼의 퀄리티를 보장해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부담감이 나름대로 크다. 하지만 그만큼 가격은 납품용보다 올려 받으니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비를 많이 먹어 당도가 떨어지기 전에, 강풍에 가지가 부러져 주문받은 수량을 다 쳐내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하기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과수원으로 향했다.

 

바쁠 때는 꼭 일들이 겹친다더니, 새벽 5시부터 시작해 단 10분도 쉬지 못하고 저녁 8시에 일이 끝났다. 하루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창 수확을 하고 있는데 공동 선별장 총무님께 전화가 왔다. 30여 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공동 선별장은 평균 연령이 65세를 웃돌만큼 젊은 사람이 드물다. 거기다가 마을에 상주하는 조합원이 나 하나라서 기계 관련으로 문제가 생길 시에는 거의 반드시 나에게 연락이 오기 마련이다.


문제는 대부분 선별기에 관한 것이다. 2억여 원을 들여 새로 장만했다고는 하지만 선별기의 기능은 아주 단순하다. 과일의 중량을 설정해 최대 15개의 구역으로 떨어트려 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올레 TV의 리모컨을 조작하는 것만큼 단순한 일이지만, 어르신들은 보통 기계를 두려워한다.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지지 않고서는 시스템이 고장 날 일이 좀체 없지만 전원만 꺼져도 기계가 고장 났다며 큰일이 난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시니 전원 버튼 하나만 켜 드려도 구원자가 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간단한 일로, 그리고 조금 복잡한 일로 두어 시간을 허비하고 나니 아침은 물론 점심도 먹지 못하고 오후 2시가 다 되어갔다. 택배 거래처는 친척 형님이 하는 로젠 택배이다. 오늘따라 배달량도 많고 접수하러 갈 곳이 많아 나한테 직접 영업장으로 물건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시는데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형 SUV인 내 자가용에는 뒷좌석에 카시트까지 설치되어 있어 한 번에 많은 물량을 싣기 어려웠다. 한번에 가져가지는 어렵고 두 번을 왕복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 택배 접수 마감시간인 오후 6시를 맞추기 위해 쉬지 않고 선별과 포장을 하니 5시 40분이 조금 넘었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를 맞아도 상관없지만, 택배 상자는 최대한 비를 맞히지 않아야 했다. 워낙에 비가 쏟아지니 택배박스가 쌓여있는 곳에서 자가용까지 비를 맞을만한 구역은 아주 짧았지만 그 사이에도 꽤나 박스가 젖었다. 어머니는 짐을 싣는 나에게 우산을 받치고 따라왔다. 나는 젖어도 괜찮으니 택배 박스 안 젖게 좀 가려달라 했지만 어머니의 우산은 자꾸 내 쪽으로 향했다.


비와 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먼지와 빗물로 폭삭 젖은 발이 슬리퍼에 닿는 감각이 끈적했다. 택배 창고까지는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이다. 한여름이지만 에어컨 바람에 몸이 으슬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선곡이 기가 막혔다. 비가 우수수수 내리지만 차 안이라 뭔가 운치 있었고, 하루 동안 부담감으로 나를 짓누르던 택배 작업이 마무리되어 차 뒷좌석과 조수석에 실려 있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정확하진 않지만 데미안 라이스의 목소리 같았다. 희한하게도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쟁통에는 몸 전체가 각성되어 피로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글을 웹 커뮤니티에서 본 적이 있다. 어떠한 이유에선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오늘 하루만큼은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일했다는 생각이 드니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비에 폭닥 젖은 영락없는 거지꼴이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전쟁이 끝난 후 군인들은 각성된 감각들이 한꺼번에 죽어버리고, 그만큼의 대미지를 갑자기 받는다고 한다. 그것 역시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퇴근하는 길에서부터 눈이 꿈뻑꿈뻑하더니 소파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고는 바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자고 일어나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맙게도 태풍은 지역을 강타하기 전에 소멸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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