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심한남자 Mar 03. 2016

아버지-1




때는 겨울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술을 제외한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사냥이었다. 아마 그것도 겸사겸사 술안주로 삼기 위한 목적이 컸을 테지만 말이다. 농번기가 끝난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항상 꿩이나 토끼 같은 산짐승들을 잡으러 다니곤 했다. 사냥의 방법은 이러했다. 산짐승들이 다닐 만한 길목에다 올무를 설치한다거나, 동그랗고 빨간 열매의 대가리 부분을 잘라 그 속에 사이나라는 독약을 넣고 숲 속에 몇군데 꽂아두는 식이다. 그러면 꿩이나 토끼들이 그 열매를 쪼아 먹고, 당연히 죽게 된다. 그리고는 다음날에 덫을 설치한 곳들을 돌아다니며 죽은 산짐승들을 주워 오는 식이다. 이것은 명백히 불법인 밀렵이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그걸 좋아하셨다. 그리고 사냥을 나가는 날이면 늘 나를 데리고 다니곤 했다. 어린 나는 그게 재밌기도 했지만, 가끔은 귀찮기도 했었다.


아버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독불장군'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벌써 서른을 훌쩍 넘겼으니, 나의 아버지는 아주 옛날 사람. 그러니까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빠처럼 가부장적인 가장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경상도 토박이 남자에 최씨 성을 가진 남자이기도 했다(물론 뒤에 덧붙인두 가지는 속설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그렇듯 무뚝뚝했으며, 때로는 폭군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만큼 밉기도 했고, 그만큼의 거리감이 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일 년 365일 중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과연 며칠이나 있었을까.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진 않았지만, 알코올 의존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술 취한 아버지는 드라마나 영화에나오는 사람처럼 집안에서 종종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나 나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물론 그런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찌되었건 폭력을 휘두른 것은 매 한 가지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은 사람에게 향하는 것보다는 집안 물건들을 부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집안에서 행패를 부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사람에게 손찌검을 할 정도의 폭군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주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런 아버지도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아주 점잖은 사람이었다. 결코 다정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늘 아버지가 나무를 깎아 팽이나 나무 스케이트 같은 장난감을 만들어 주시곤 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만들어 주는 어른은, 우리 동네에서 우리  아버지밖에 없었다.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그 날 또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사냥을 가시려고 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그날 아버지를 따라가가 싫었었다. 아마도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놀기로 했을는지도 모른다. 사냥을 가는 코스는 집 앞의 동산을 시작으로 약 1시간 정도의 거리인데, 나는 동산을 오르는 입구까지 가는 내내 짜증을 냈었다. 아니,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도 했으니 짜증을 내지는 못했겠지. 징징거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수도 있겠다. 아버지를 따라가고 있지만, 울상인 얼굴로 친구들이 있을 동네어귀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멈춰 선 아버지께서 물었다.


 " 따라가기 싫으나. "


난 아마 " .. 예. "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조금 텀을 두시더니,


 " ..그람  내려가그라. "


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이지만,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애들과 놀 수 있다는 마음에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왔던 길을 되돌아 뛰었지만, 내려오면 올수록 뭔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때는 그게 무슨 기분인지 몰랐었다. 평소와 같지 않은 아버지의 말투와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린 것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아버지와의 기억들을 더듬고 싶어 졌던 그때부터, 그날의 기억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그날 아버지의 모습은 많이 쓸쓸해 보였었다. 상처라고 할 것 까지야 없겠지만, 아마 그 날 아버지는 나 때문에 많이 섭섭하고 쓸쓸했을 것이다. 아버지 혼자 산길을 걸었을 그 한 시간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버지는 독불장군이었고 폭군이었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그렇듯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아들과 함께 하고픈 마음과 그것이 거절당했을 때 받는 상처 또한 보통의 사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인이 되고 나니 결점이 사라지고 좋은 점만 보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나도 내 자식에게 같은 종류의 섭섭함을 느낄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겠지. 


그 날, 죄송했습니다 아버지.














매거진의 이전글 소심한 남자-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