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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남자 Mar 03. 2016

파리 테러

pary for paris



2015년 11월 13일 21시 16분, 파리의 10구역을 비롯한 7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테러가 일어났다. '바따클랑'이라는 공연장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캄보디아 음식을 팔던 식당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의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벌어지는 스타드 드 프랑스 국립 경기장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날은, 내가 태어나서 파리라는 도시를 처음 방문한 날이기도 했다.


여태껏 외국이라곤 엄마 환갑여행 때 괌을 한번 가본 것이 다였던 나였기에, 유럽에 대한 환상은 늘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결혼식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혼여행지는 유럽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로마를 시작으로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밀라노, 스위스 인터라켄, 스트라스부르, 파리, 런던이라는 한 달짜리 일정의 신혼여행으로, 사실 결혼식 자체보다 더욱 기다려왔던 여행이었다. 마치 결혼식이라는 힘든 일정을 마치고 나면 주어지는 포상과도 같은 의미였다고 할까. 결혼 준비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이 한 달짜리 신혼여행을 생각하며 많은 위안을 받기도 했다.


구름이 낀 하늘 사이로 노을이 내려앉자, 믿을 수 없을 만큼 로맨틱한 분위기의 하늘이 펼쳐졌다. -iphone


아무튼, 파리는 그렇게 계획된 여행의 일정이 절반 넘게 지났을 즈음 도착한 도시였다. 파리 이전에 머문 도시들에서는 모두 부킹닷컴에서 호텔들만 골라 예약했었지만, 파리만은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고 싶었다. (에어비앤비는 현지인들이 사는 가정집을 빌려주는 형태의 숙박 어플이다) 한창 유럽여행을 준비하던 당시, 매스컴에서는 에어비앤비에 관련해 부정적인 뉴스들이 자주 보도되었었고, 때문에 숙소는 비교적 안전한 호텔 위주로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파리에서만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정집을 빌리고 싶었다. 에펠탑을 뒤로 하고 기다란 바게트 빵을 누런 종이팩에(비닐봉지는 안 된다) 감싸서 가슴팍에 안고서는, 호텔이 아닌 일반 가정집으로 들어가는 그런 풍경! 똥 허세가 풍년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암튼 파리에 머무는 5박 6일 동안만이라도 그런 파리지앵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막상 바게트는 한 번밖에 안  사 먹었다).




파리에 있는 5박 6일동안 머물렀던 숙소의 입구. 많은 방들 중에 우리가 예약한 방의 입구를 찾느라 한참을 애먹었다. -iphone


호텔처럼 커다란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카운터에 직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집을 찾는데 한참 애를 먹었지만, 친절하고 예쁜 프랑스 처자의 도움으로 겨우 숙소를 찾고 짐을 풀었다. 집은 아담하지만 예뻤다. 하긴, 파린데. 여긴 paris인데! 뭔들 안 아름다워 보였을까. 길거리에 떨어진 낙엽조차도 멋있어 보일만큼 파리에 대한 환상은 컸었다. 


숙소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에펠탑이 있었기에(물론 의도한 위치 선정이다), 우리는 짐을  풀자마자 에펠탑을 보러 갔다. 직접 본 에펠탑은 생각보다 컸으며,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여태껏 가지고 있던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과, 여기저기에 보이는 관광객들의 들뜬 분위기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들뜬 기분이 되었었다. 해가 지는 센 강을 따라 걸으며 불빛이 반짝반짝 거리는 에펠탑을 보고, 네이버에서 '파리 맛집'을 검색한 우리는 9구역에 위치한 '히구마'라는 라멘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한국 음식은 거의 챙겨가지 않았기에, 20여일만에 맛보는 강렬한 매콤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iphone


내가 주문한 '김치 라멘'은 한국인인 내가 먹기에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매운 음식이었다. 옆자리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온 듯 보이는 외국인 남자애가 앉았는데, 호기롭게도 나와 같은 김치 라멘을 시키더니 땀을 비 오듯 흘리는 건 물론이고 다리까지 달달 떨며 면발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나도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라 테이블에는 휴지가 수북했는데, 그쪽도 만만치 않았다. 흘깃 눈이 마주치자 외국인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며 '스파이시'라고 하여 서로 웃음 지었다. 


서서히 겨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해는 빠르게 졌다. 해가 진 후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진 초보 여행자였던 우리는, 되도록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을 삼가 왔지만 그 날만은 예외였다. 그래 봤자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왔지만, 나름대로 한참을 파리의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숙소 근처에 있는 까르푸에 들러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고, 이미 시작되었을 프랑스와 독일의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TV를 켰다. 하지만 채널이 잡히지 않아 한참을 리모컨과 씨름했고, 결국 포기한 나는 네이버에 접속해서 문자 중계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휴대폰을 켜고 네이버에 접속하자,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있는 '파리'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파리 테러'였다.




L'horreur(공포). 테러 다음 날, 프랑스의 일간지 르퀴프의 1면은 검은색 바탕화면에 '공포'라는 단어만이 크게 적혀 있었다.      -iphone


처음에는 작은 인질극 정도인 줄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알았지만, 사건은 우리가 휴대폰 화면을 통해 봤던 기사들보다 (당연히) 훨씬 더 크고 생생하게 보도되고 있었다. 테러가 터지고 열흘이 넘게 지난 후에 귀국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뉴스에서는 큰 비중으로 그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으니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우리 엄마는 뉴스를 보고 걱정이 되어 눈물까지 흘리고 잠을 못 이뤘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런 적은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이후에 처음이었다.


당시 숙소 TV가 안 나왔던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다. TV는 물론이고 와이파이까지 작동이 안 되었기 때문에, 데이터가 많이 쓰이는 동영상은 볼 생각을 못했으며 테러에 관련된 소식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뉴스 기사를 통해 접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아비규환이 된 현장의 영상을 생생하게 보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었을 것 같다. 그것도 사건 현장이 바로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저녁식사를 하던 곳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자살폭탄이 터졌던 스타드 드 프랑스 국립경기장은 내가 당일 오전까지도 가자고 졸라댔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기 시간이 너무 늦고, 상대적으로 치안이 불안한 10구역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포기했지만 말이다(내가 좋아하는 축구 선수인 폴 포그바와 독일의 마르코 로이스가 결장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유럽의 밤은 듣던 대로 조용했다. 번화가가 아닌 거리는 밤 10시만 넘어도 마치 시골 마을처럼 인적이 없고 조용했기에, 방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조차 선명히 들릴 정도였다. 그 날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멀리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섬뜩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뭐랄까 어두운 방에서 괴담을 듣고 있는  어린애들처럼 긴장한 상태였다. 각자 휴대폰을 들고 네이버 뉴스 기사를 읽었으며, 여행 카페를 비롯한 각종 커뮤니티의 반응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있었다.


점점 사상자가 늘어났다. 절정은 공연장에 인질로 잡혀 있던 거의 모든 관람객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거기다가 용의자를 아직 체포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에이, 그래도 우리는 아무 일 없겠지'하는 마음 반, '혹시나'하는 마음 반이었다.


알 카에다와 IS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과 미국 CIA요원의 첩보전을 그린 드라마 홈랜드, 머릿 속에서 자꾸만 이 드라마에서 나온 무장괴한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긴장 탓인가 속이 답답해진 나는 담배를 피기 위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식은땀이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주 작은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청각은 예민해진 상태였다. 범죄현장을  빠져나간 용의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통로 형식으로 된 숙소의 입구에는 형광등이 없어 바로 앞 조차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사이로 기관총을 든 턱수염이 수북한 아랍인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생각이 도무지 떨쳐지지가 않았다. '신혼여행을 떠난 한국인 C 씨 부부, 파리의 숙소에서 인질로 잡혀..'와 같은 헤드라인의 기사가 머릿속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만약에 진짜로 테러리스트들이 도망 다니다가 여기로 들이닥치면, 나는 저항을 해야 하나? '한국인 C 씨, 아내 지키려 저항하다 용감한 죽음 맞이해..'라는 기사가 뜰까? 이런 되지도 않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불안감을 높아만 갔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인들은 휴전국인 한국을 아직까지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서, 위험하다고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체감적으로는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연평도 포격 사건 때도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사는 곳과 지리적으로 그리 가깝지 않았기에 두렵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은, 실제로 전쟁을 일으켜서 사상자를 만들어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이라는 것을 지겹게 봐 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그냥 무뎌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테러는 달랐다. 사상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며, 그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공포감은 극대화되고 그것이 바로 테러리스트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테러의 현장 한복판-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석 즈음에 서 있던 나 역시 완벽하게 그들이 전하는 공포와 불안의 메시지에 지배당해 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안의 밤을 보낸 우리는 다음날 저녁이 될 때까지 숙소 앞을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했다.




테러 다음 날, 에펠탑에는 삼색의 조명이 환하게 밝혀졌다.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은 '공포에 굴복하지 말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며 말했다. -iphone


'파도에 흔들릴지언정 침몰하지 않는다.'


다음 날 에펠탑에는 삼색의 조명이 밝혀지고, 이런 문구가 크게 쓰여 있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서는 'pray for paris'같은 테러 추모 메시지들이 줄을 이었다. 페이스북에서는 프로필 사진에 프랑스의 삼색기를 깔아주는 서비스를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이러한 추모 열풍에 어떤 이는 '왜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는 민간인 폭격사태 때는 추모하지 않고 선진국인 프랑스에서 일어난 테러에는 유난을 떠느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고, 이러한 추모 열풍을 그저 패션과도 같은 유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저 어딘가에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있다고 해서 앞집에 사는 배고픈 아이에게 빵 한 조각 나눠줄 수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프랑스를 '앞집 아이'에 비유한 것은 물론 지리적인 거리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느끼는 정서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최선은 그 둘 다를 챙기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숙소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그 날, 하루 종일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나는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에 삼색 효과를 주려다가 잠깐 망설였다. 저러한 의견들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거 유별난 짓 아냐?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잠시 고민했지만, 효과 주기 버튼을 클릭했다. 추모라는 것이 꼭 유가족들 만큼의 슬픔을 가진 이에게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명 연예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 밑에 R.I.P라는 추모 댓글을 달 수 있는 자격이 마음속 슬픔의 크기를 측정해서 합격하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저 지나가듯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하는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테러 발생 이틀 후,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contax. t-3


여행자로서 보았던 파리는 아주 매력적인 도시였고, 그런 아름다운 도시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안타까웠다.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웠고, 나 또한 그렇게 되었을 확률이 조금이나마 존재했다는 사실에 섬뜩했다. 그날 밤 파리에 머물렀던 수많은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나와 같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파리에서 의 일정 대부분을 '약간' 보다는 더한 정도의 불안함과 함께 했다. 


망할 IS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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