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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Nov 30. 2020

7. 행복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 이런 행복은 행복이 아닌가요?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함께 해온 친구, 대학 친구, 그리고 그들의 지인들이 모였습니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써내려가는 답변들을 읽는 시간이 너무나 신납니다. 미지의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거든요. 10여년 가까이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의 새로운 면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아가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매일 답변을 공유하고, 2주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10명이 써 내려갈 101일간의 여행기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매우 설렙니다. 모두에게 의미있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또다시 행복에 대한 질문이다. 사실 나는 행복에 대해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살지 않는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행복의 역치 또한 낮은 편에 해당한다. 생은 찰나의 행복과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고통의 반복이니, 찰나의 행복을 자주 느끼자는 취지에서다. 강도보다 빈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타고난 천성도 작은 것에 쉽게 감탄하고, 남들이 보기엔 의뭉스러운 지점에서 행복을 느끼기는 편이다. 나 스스로도 그런 연습을 해왔던 것 같다. 


나는 직장에서 아주 힘들었던 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워 침대에 누워 중얼거리곤 한다. '아, 보송보송하고 상쾌하고 누워있으니 참 좋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늘어놓을 때도 있다. 그 끝에 마음이 찡한 위로가 돌아올 때 '내 주변에 참 좋은 사람이 많구나'하며 행복을 만들어낸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부러 빨래를 돌리고 방 안에 가득한 섬유유연제 향을 맡아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행복은 자신의 마음에서 탄생한다. 


하루를 찬찬히 되돌아보자. 어느 순간에는 아주 찰나의 행복이 존재했을 것이다.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자면 행복의 빈도가 아주 잦았다.(아리스토텔레스 기준에서는 아닐지도.) 좋아하는 친구들의 생일을 맞아 맛있는 밥을 함께 먹었고, 미세먼지가 함께했지만 완연한 가을날을 느끼며 야외 테라스에서 밀린 수다를 떨었다. 품절로 한 달째 기다리던 히노끼 향 바디로션도 구매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동생과 팥호빵과 피자호빵 둘 중 뭘 먹을지 고민하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부분들일지라도 행복의 역치가 낮은 나에게는 모두 행복이 탄생한 순간들이었다.




101x10 모임 구성원들과 질문에 대한 피드백을 하다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으로까지 흘러갔다. 니코마스 윤리학에 따르면 행복한 삶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동체 속에서의 좋은 삶 혹은 성공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한다. (자세히 알지는 못할뿐더러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에게 따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행복은 나쁜 것인가. 혹은 이것은 가치가 떨어지는 행복인가. 나의 빈도가 잦은 쾌락들은 행복이 아닌 것인가.


나는 늘 사회 공동체를 향한 선한 행동, 그에 따른 만족감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을 간절하게 갈구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선택했던 길들 또한 사회적 가치를 만들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욕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늘 인간이 이러한 '최고선'만을 추구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최고선'에서만 행복을 추출한다면 내 인생은 행복하지 않은 삶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빈도가 매우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소소한 쾌락들을 불쏘시개처럼 쓰는 중이다. 이 불쏘시개들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나의 열망과 행동력을 꺼지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늘 이렇게 답하고 싶다. '꿈같은 거 없어도 되는 세상이요. 죽을 만큼 노력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삶을 영유할 수 있는 사회요.' 인간이 꼭 최고선을 추구해야만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개인의 삶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많은 노력들 그 자체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는 한 개인이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범법을 일삼지 않고 규범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사회 공동체를 향한 선한 행동이라고 믿는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들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나아가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쾌락으로서의 행복을 좇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관에서 2시간의 여유를 즐긴다던지, 혹은 머나먼 타지로 여행을 떠나거나 입에서 살살 녹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나는 이러한 작은 행복들로부터 더 큰 행복을 추구할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쾌락에 해당하는 행복을 포기하고 최고선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발전해나가길 원치 않는다. 




다시 돌아와 나는 쾌락으로 비롯되는 행복도, 자기완성에서 오는 만족감도 모두 다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순간적이고 휘발성이 강한 행복은 행복이 아닌가? 나는 가끔씩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 충동구매를 하곤 한다. 누군가는 도피성 기분전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행을 잠깐이나마 잊게해주는 마약같은 행위를 통해 때로는 그 불행을 딛고 일어날 아주 작은 동력을 쥐어짜내기도 한다.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 내일 배달될 택배일 수도 있듯이 행복도 그러하다. 누가 뭐라고 하건, 잠깐일지라도 행복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내가 의도하거나 스스로 최면을 걸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껴지는 행복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늘 강도가 강하고 순도가 높은 행복과 함께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최고선'의 범주에 있지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탄생하는 행복들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한 번만 고기를 먹는다거나, 택시를 타고 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다. 모두 지구를 위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충만함을 줄 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를 위한 일이다. 동시에 내가 잠깐의 유혹을 이겨내면 되는 일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지극히 개인적인 쾌락으로서의 행복과 이타적인 인간이 됨으로써 채워지는 행복의 균형을 잘 맞추며 살아가고 싶다. 나는 무엇보다 자주 행복한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들을 이뤄나가며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행복 또한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달릴 것을 밝혀두며 이만 총총.



P.S 방금 옆에 앉아있는 동생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불행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불행이 있어야 행복도 있다는 의미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태어나서 행복한 상태만 유지되었다면 행복하지 않은 걸까. 행복은 정말로 불행이나 어떤 반대의 성질로부터 탄생하거나 존재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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