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워킹홀리데이 #9 더블린, 코펜하겐 여행
런던에 들어온 지 벌써 수 개월 째,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온 이유였던 여행을 잊고 살고 있었다. 초기에는 런던에 얼른 먼저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어디로 쉬이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여기서의 삶이 그저 좋아서 그랬다. 하지만 점차 런던이 익숙해지고, 집처럼 느껴지자 무언가 새로운 공기가 필요해졌다. 잠깐 나를 환기시킬 수 있는 그런 색다른 분위기. 항상 나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터전이라는 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 같다. 어느 장소든 간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진다. 나도 1월 쯤 되니까 한국을 떠나 이런 먼 타국에 있지만 또 떠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1월은 여행으로 충만한 달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지금은 모로코 어딘가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 있다. 이렇게 여행을 다니며 느낀 것들이 있다.
나는 대도시를 좋아하더라. 그리고 날씨에 남들보다 영향을 덜 받더라.
더블린 여행은 조금 무리해서 다녀왔다. 가게에서 클럽이 열리는 날 마감을 하고 곧바로 공항으로 향해 비행기를 탔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밤을 꼴딱 새서 일 하고 그대로 비행기에 올랐다. 내 체력을 간과하는 바람에 더블린 여행 내내 피곤했고, 더블린 도시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의 내내 흐렸던 하늘, 조그마한 강, 그 강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낡은 집들, 어두운 골목. 심지어는 길치인 내가 이틀 째에는 길을 외워 더블린 이곳 저곳을 다닐 수 있었으니, 더블린이 얼마나 작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거다. 더블린에서 몇 개월 씩 어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산다는 건 나에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렇게 더블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한 건 아마 내 기분이 여행 중에 최저점을 찍은 탓도 있을 것이고, 날씨가 안 좋았던 탓도 있을 것이며, 피곤했던 것도 분명히 한 부분을 차지할 거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대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임을 이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더블린 여행을 다녀와서는 런던에 산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기게 되었다. 새삼 런던이 얼마나 큰 도시인가 깨닫게 되었고, 런던에서 내가 못해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되짚어 보게 되었다. 사실 런던에서는 날씨가 안 좋은 날에도 새삼 길을 걷다가 내가 이 도시 한 복판에 서 있음에 와-하고 탄성을 지를 때가 종종 있었다. 코펜하겐에서도 맑은 날이 없었고, 미친듯한 추위에 바람이 볼을 때려 걸어다니는 것 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코펜하겐 여행은 그저 행복했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더블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단순 날씨 탓만은 아닐거다. 아마 내가 지금 런던을 사랑하듯, 코펜하겐은 비가 주룩주룩 내렸어도 좋아했을 거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게으른 사람이더라.
사실 코펜하겐에 가는 비행기를 놓칠 뻔 했다. 단순 늦잠 때문이었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고 놀라 배낭을 들쳐 매고 바로 우버를 탔고, 기차역에서 기차로 갈아탔으며, 기차에서 내려 또 공항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빼고는 전부 뛰었다. 그렇게 게이트가 닫히기 1분 전에 게이트 안으로 입장했고, 비행기 탑승구까지도 엄청나게 뛰어서 겨우 비행기에 올랐다. 체크인 데스크에서 받아야 하는 도장을 받지 못했는데, 그건 항공사 직원분들이 봐줘서 우여곡절 끝에 코펜하겐에 겨우 도착했다. 나는 내가 실수도 많고 덤벙거리는 사람이라는 걸 그 전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중요한 일,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는 일, 까지 허둥댈 줄은 몰랐다.
또 나는, 가만히 앉아 시간을 잘 죽이는 사람이더라.
더블린 여행에서는 피곤해서 카페에서 몇 시간 씩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여행지까지 가서 뭐 하냐고 답답해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더블린 여행 중 이렇게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무언가를 봐야한다는 압박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 런던에도 카페는 많지만 분명 더블린의 카페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기운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새로웠고, 내가 지금 새로운 도시의 냄새를 맡고 있구나 생각하면 좋았다.
코펜하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코펜하겐은 크게는 공항, 거리, 가게들, 작게는 비상구 계단이나 작은 골목까지 그냥 만들어진 게 없었다. 이걸 만든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고 해야 맞을거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꾸며진 건물들, 가게들,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는 도시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행복해졌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 어디가 맘에 들면 한참을 서서, 앉아서 그 풍경을 가만히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추워지면 근처 아무 카페나 들어갔다. 모든 카페가 그들만의 독특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카페에 가만히 앉아서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으면 몸도 녹고, 마음도 포근했다.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코펜하겐의 분위기를, 커피를 홀짝이며 각기 다른 카페의 느낌을 즐기는 것 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났다.
가끔 '새로운 공기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한 마디로 여행이 필요할 때다. 나의 경우에는 나 자신이 일상에 함몰된 것 같을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반복되는 하루가 단조롭고, 그 하루에 있는 나에게 전혀 새로울 게 없을 때. 같은 일상, 같은 감정 패턴, 같은 행동, 그런 것들에서 탈피하고 싶을 때 말이다. 여행은 확실히 사람에게 새로움을 전해준다.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던 나, 물론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깊게 와닿지 않던 내 모습들을 인정하고 나니까 여행도 삶도 한결 쉬워지는 것 같다. 더블린 여행을 통해 나는 런던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에 산다는 걸 감사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큰 도시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앞으로의 여행은 아마 그런 도시들 위주로 짜게 될 거다. 코펜하겐 비행기를 놓칠 뻔 했던 경험으로 나는 앞으로도 내가 그런 실수를 범할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더 조심하게 될 거다. 또, 앞으로는 여행 계획은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고, 이전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여행을 하게 될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여행은 새로운 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기 보다, 내가 모르던 나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다만 그 나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이라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거 아닐까. 그리고 그걸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는 사람의 정의를 찾아가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