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8.
얼마 전 서재를 정리하다 낡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김연수가 2004년에 펴낸 『청춘의 문장들』이었다. 군대에서 한창 책을 읽던 시기에 부대로 받았으니 2008년, 혹은 2009년에 산 것일 테다. 색이 많이 바랐군, 하고 첫 장을 넘기니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내 나이 서른다섯’.
나와 같은 나이의 김연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썼을까. 바닥에 널브러져 제자리가 찾아지기를 기다리는 책들을 잠시 외면한 채 글을 읽었다. 곧 이런 단락이 나왔다.
“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산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깊은 밤, 가끔 누워서 창문으로 스며드는 불빛을 바라보노라면 모든 게 불분명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살아온 절반의 인생도 흐릿해질 때가 많다. 하물며 살아갈 인생이란.”
2021년을 맞이하면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가? 아닌 것 같다. 외려 김연수가 저 글을 쓴 2004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깊은 밤 노란 전봇대 불빛 아래를 서성이며 “왜 사는 걸까” 심사에 빠졌던 것 같기도. 그 모습을 상상하면 귀엽고 징그럽고 우습다고 할까. 아무튼 낯부끄럽다.
오늘 낮엔 정원에서 미야모토 테루의 산문집 『생의 실루엣』을 읽다가 “나는 그때 서른다섯 살이었다.”라는 문장과 만났다.
서른다섯의 그는 소설 집필을 위한 취재 차 동서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공고하던 때라 국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동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한 사내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국경을 통과했다. 당시 경험으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현실에 생겨나는 현상을 믿게”되었다 한다.
짧은 여행기를 완독한 뒤 책을 덮고 턱걸이를 하면서, 작가들의 시간과 나 같은 보통 사람의 시간은 참 다르구나, 했다. 그러면서도 머지않아 만 9개월을 채울 내 서른다섯을 돌아보았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떠오르는 대로 끄적인다면, 먼저 점심을 거르거나 군것질로 갈음하는 대신 도시락을 싸다니게 되었다. 날이 좋으면 따릉이를 타고 나들이를 떠나는 건 여전하지만. 살이 조금 빠졌고 수염이 약간 옅어졌고 옷을 전보단 깔끔하게 입고 다닌다. 이전의 나라면 상상조차 못할 예쁜 것들로.
제임스와 셰어하던 작업실 ‘각방’을 다른 이에게 넘겼고 부모로부터 독립을 했다. TV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고, 기계가 개발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로봇청소기랄지, 식기세척기랄지, 건조기랄지, 음식물처리기랄지.
여섯 살 조카가 만든 알록달록 비즈팔찌 대신 시계를 차고 다닌다. 지난주부턴 반지도 낀다. 가족이 두 배로 늘었고 살림은 제곱 이상 늘었다. 물론 부모 더부살이하던 내 살림은 살림이라기도 뭣할만치 빈약했지만 말이다.
잠자리도 바뀌었다. 공간도 침대도 이불도 다 바뀌었다. 그리고 잠을 청할 때면 늘 누군가 옆에 있다. 그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이불을 독차지하고, 자신의 오른 다리를 내 왼 다리에 겹치지 않고는 잠에 들지 못하지만, 다행히 나의 수면에 큰 지장은 없다.
써나가다 보니 문득, 서른다섯의 미야모토 테루와 서른다섯의 내가 새로이 믿게 된 게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지금 나를 둘러싼 이 모든 변화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확신이 또 어떤 현상들을 만들어낼까.
두근두근하는 마음만 간직하고, 별다른 각오나 다짐은 하지 말아야지. 서른다섯 김연수가 위 책에서 “이제 다시는 이런 책을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라고 했단 사실을 거울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