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4
날씨가 귀하다 여겨지는 날엔 점심시간에 따릉이를 탄다. 갈 곳이 많다. 남대문을 스쳐 시청 방향으로 가면 광화문을 시작으로 서촌, 북촌, 삼청동, 원서동 등 구도심 일대를 마음껏 누빌 수 있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감수한다면 남산 도서관에서부터 하얏트까지 이어지는 둘레길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벚꽃, 신록, 단풍. 계절감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이따금은 후암동 일대를 방문하기도 하는데, 좁고 가팔라서 라이딩보다는 도보로 산책하며 사진을 찍거나 하는 편이 더 낫다.
요즘 선호하는 코스는 청계천변을 따라 세운상가를 통과해 종묘 돌담길인 ‘서순라길’을 통과하는 코스다. 집시 브루어리의 맥주를 파는 ‘서울집시’라는 가게 덕분에 몇 해 전 처음으로 가본 곳인데, 분위기가 정말 근사하다. 역시나, 수많은 가게들이 생겨나고 있다.
최근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북촌 한옥마을에 들른 뒤 삼청동길을 따라 내려와서 안국역 앞을 지나는데 누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서희였다. 오후 반차를 내고 친구 둘과 나들이를 나왔다고 했다. 자전거에서 내려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에피소드에 흥을 더할 겸 서희에게 푼돈을 보냈다.
오빠가 주는 용돈이다, 빙수라도 사 먹어ㅋㅋㅋ
나보다 나이만 어릴 뿐 나머지는 다 선배 같고, 실제로 나보다 돈도 훨씬 잘 버는 능력 있는 동생에게 철없는 오빠 노릇을 해본 셈이다. 인증샷을 잊지 않은 서희에게 고마웠다.
어제는 혜화동까지 갔다. 위트앤시니컬에 방문하기 위해서다. 다행히 시인님이 계셔서 뵐 수 있었다. 그는 서울역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나에게 건강하시네요, 하며 웃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급히 근황을 주고받고, 책을 두 권 들고 나왔다.
서울역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의 심사는 약간 센티했다. 잘 꿰매두었던 상처가 다만 몇 센티라도 벌어진 기분이랄까. 익숙하게, 내심 주인의식을 느끼며 내 공간처럼 여기며 자주 들르던 곳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일 년에 두세 번 겨우 찾는 곳에 다녀왔으니, 자연스러운 감상인지도 모르겠다.
늘 취해 있었거나 취한 채로 빠져나왔던 곳. 지독하게 재미있고 재미있게 지독한 시절을 보내온 곳. 왁자지껄한 술판을 벌인 다음 날 얼마간의 숙취는 당연한 수순. 아직 그 숙취 기운이 남았다기보단 간만에 “아 그때 대단했지”하는 회상의 여파이리라.
그래도 위트앤시니컬이 여전하게 제자리를 지켜주어 감사할 따름이다. 게다가 이젠 매달 그곳으로 페달을 밟을 명분도 생겼다. 회사에 새로 생긴 복지인 3만 원의 문화비. 사용처를 정했으니, 30분에 걸쳐 도달해 3만 원어치 책을 사서 3분 만에 나오는 삼삼한 플랜을 가동해야지. 물론 다른 때에도 갈 테지만, 어쨌든.
5월 문화비로 구입한 책은 허연 시인의 산문집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와 황인찬 시인의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시시하려야 시시할 수 없을, 읽는 즐거움만을 안겨줄 책들. 다음 달을 위해 부지런히 읽어 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