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글로 정리해보고 싶었던 미국에서 보낸 사춘기 이야기이다. 글로 담기에는 너무나 많은 추억들이 있고 또 미화하기에는 너무 힘든 시절들도 많았다. 남들이 얼핏 보면 쾌적하게 유학 생활을 했다고 짐작할 수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고등학생 시절이 매우 고통스러웠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삼켜내며 살았다. 쓰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들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 믿는다.
*Special thanks to my dearest mother, father, two sisters for all loving support
시작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ECC란 영어학원을 다녔었다. 학원가의 메카였던 대치동 학원가에서 ECC 영어학원은 버스를 7호차까지 운영하며 근처에 있는 또래 친구들을 등하원시켰다. 문법, 회화, 작문부터 나름 가열차게 배웠었고 4학년 때부터 매년 여름마다 3주 정도 진행되는 여름 캠프를 부모님께서 보내주셨다. San Diego, Vancouver, England, Boston, Bakersfield(Los Angeles) 총 5회에 걸쳐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영어 캠프를 다녀오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마치 해결되었던 기분이었다. 미국 공항에 도착하면 어린 나이에 느꼈던 이문화 감성, 새로운 꿈나라 같은 넓디넓은 세상에서 보이는 모든 게 신기했었다.
애초에 유학을 염두에 두고 이 모든 걸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국문학과셨던 터라 언어에 대한 중요성은 항상 강조하셨고 아들 또한 글로벌 시대에서 경쟁하려면 영어를 무조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으로 추측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었다. 영어 캠프를 약 1주간 다녀오면 그 당시 가격으로 참가비는 약 300만원 수준이었는데 아버지 월급이 1997년 당시 300만원이었겠는가? 아버지는 한 번 다녀오면 되었지 굳이 여러 번 다녀와야 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고, 어머니는 월급을 더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니 신경 끄라고 아버지께 말씀하셨었다. 그 뒤로 4번은 영어 캠프를 더 보내주셨고, 내가 거기서 놀다 오든 뭘 하든 학습적 아웃풋에 대한 부분은 일체 신경도 안 쓰셨다. 그저 잘 놀고 오면 되었다는 마음을 비추셨었다.
"원어민 선생님과 한국인 선생님 수업을 번갈아가며 진행했지만 매번 원어민 선생님과의 대화가 기다려졌던 ECC 학원"
나는 ECC 학원을 꾸준히 다녔었던 터라 친구 또래들이 학원을 그만두고 다시 돌아오고 하는 것을 항상 옆에서 지켜봤다. 각자 다른 사정으로 학원을 그만두게 되고 나 혼자 원어민 선생님 방에 1:1 영어 수업으로 강제로 전환되었던 적도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친구들이 학원을 그만 나오거나 결석을 하면 그 순간이 참 좋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왜냐하면 일대다로 수업을 들으면 내가 영어 발화할 시간이 상당히 줄어들었었고 나는 50분 내내 원어민 선생님과 떠들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지는 것을 당시에 스스로 불평했었다. 어느 순간 나 혼자 또는 1~2명과 원어민 영어회화 시간에 참여하였고 나는 그 학습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었다. 당시 1997년에는 외국인과 떠들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이런 기회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보면 문법 점수가 항상 낮았고 회화는 항상 점수가 높았던 것을 기억한다. 문법은 주어진 틀 안에서 움직였지만 회화는 단어 선택부터 자유 의지(Free will)의 영역이다. Why를 선택 안 하고 How come을 선택하는 것도 내 자유였고, 대화할 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를 통해서 문장을 구성해볼 수 도 있었다. Passive 형태로 말을 하면 뭔가 더 프로페셔널했다고 느꼈던 어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나는 영어에 대한 관심을 항상 가슴속에 품어둔 채 한국에서 중학교 생활을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하게 된다.
교환학생(Exchange Student)
영동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의 부모님은 나를 한 번 시험해 보시기 위해 1년간 교환학생을 보내시게 된다. 적응을 못하고 다시 돌아오면 알아서 한국에서 다시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이고, 적응을 잘하면 일반 사립고로 편입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모색하는 옵션을 주셨던 것이다. 유학생들이 현지에서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었고 미국 법은 예외가 거의 없기 때문에 타국에 있는 유학생들이 사고를 치면 말로는 뻔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마약을 건드려볼 수도 있겠고 흔한 범죄에 연루되거나 적응을 못해 모국을 그리워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주변에서 들려왔다. 영동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자마자 나는 미국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South Carolina주의 아주 작은 공립고등학교에 교환학생(Exchange Student)로 가게 된다.
"2002년 여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Blue Ridge Highschool"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막연한 기대감에 부푼 채 도착한 곳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Greenville이란 도시였다. 10학년 교환학생이었던 나는 90% 백인 학생들만 있는 학교로 덩그러니 온 것이다. 그마저도 학교 안에서 아시아 인이라고는 키가 매우 컸던 중국인 2세(미국에서 태어난 Native)가 있었고 나는 아주 마르고 비쩍 마른 안경 쓴 한국인 교환학생이었다. 그는 영어가 모국어였고 여자친구도 백인이었고 심지어 풋볼을 하며 체격이 컸던 터라 학교에 2명밖에 없는 동양인 중에서 나는 자연스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자유롭게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탓에 나는 이 첫 1년이 고달펐었다.
당시 역사나 수학은 쉬웠지만 영어 수업을 따라가기에 너무 버거웠고 내 GPA에 반영되고 있는 바닥 수준의 영어 점수가 훗날 내 미래에 발목을 잡을까 하루하루를 노심초사하며 보냈었다. 영어 수업 당시 주홍글씨를 읽고 독후감이나 비판을 써야 했던 터라 한글 번역본을 어머니께 소포를 받았고, 매번 새로운 책들이 나올 때마다 한국에서 해당 번역본이 있는지 샅샅이 서점을 찾아가시며 고생하셨을 어머니를 떠올리면 나는 그걸 요청하는 입장에서도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까 싶다. 영어 해석이 되지 않아 한글본이 무조건 필요했고,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2002년 당시에는 인터넷 검색이나 교보문고, e-book은 커녕 검색 포털도 모든 정보를 못 가져오는 탓에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수업은 둘째고 일단 학교에 오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일단 나와 얘기해주는 친구가 없었다. 당시 홈스테이를 했었는데 (홈스테이: 외국의 유학생이 그 나라의 일반 가정에서 체류하며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을 말한다) 아주머니께서 학교에 아침에 나를 내려주시면 나는 철저히 혼자 학교 문을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가장 두려웠던 이유는 수업 시간은 각자 집중을 하며 듣지만 점심시간은 친구들끼리 밥을 먹는 시간이고 친구들끼리 잡담을 떠는 시간, 즉 가장 그들에게 기다리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수업시간 중간에는 Recess라고 해서 수업 중 밥을 먹고 다시 같은 교실로 복귀하는데 다들 카페테리아를 향해 친구들과 웅성웅성 떠들며 갈 때 나는 같이 먹을 친구들이 없어 머릿속이 새하얀 채로 복도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테이블이 대개 Group용이라 혼자 점심을 먹기 어려운 구조다"
애석하게도 나는 교환학생 첫 1년간 이 테이블에 친구들과 무엇을 먹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도 점심은 먹고살아야 하므로 제일 음식 먹기가 빠른 치킨 너겟을 항상 골랐었다. 그 치킨 너겟의 이름은 "Chick-fil-a"인데 그 뒤로 이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 감튀를 제외한 너겟 세트가 당시 $2.25였고 소스도 안 찍고 그냥 먹었었다. 다들 친구들끼리 앉아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혼자 먹을 수는 없으니 나는 치킨 너겟을 사자마자 바쁜 척 카페테리아를 빠져나왔고 비어있는 수업교실 앞에 앉아 먹었다. 화장실에서도 아주 가끔 먹었다. 부모님께도 이 사실을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희소식만 들려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나에게 있어서 교환학생 1년의 시기는 영어를 결코 배웠던 시기가 아니었고 결국 외로움과 싸움에서는 오로지 나와 세상, 딱 2명만 남는다는 것을 배웠다.
"이 메뉴를 선택한 이유는 모든 음식 중 가장 빠르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그 이유 말고는 없었다."
세상이 나의 기도를 들었는지 교환학생 마지막 3달 정도를 앞두고 딱 1명의 친구(Jake)가 생겼는데 그 친구는 그 학교를 통틀어 가장 부자였으며 당시 노란색 허머를 타고 다녔다. 당시 내가 신기했나 본지 이것저것 물어보며 친해졌고 그의 여자친구(Erin)도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는지 주변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귀국 두 달 정도를 앞두고 나름 2~3명의 친구가 생겼던 나는 참으로 감사했고 귀국하는 그날까지 감사함에 벅찼다.
그렇게 나의 첫 1년은 흘러가 있었고 나는 사립고 입학을 준비하게 된다.
정식적인 고등학교 생활
첫 1년은 첫 장막에 그대로 남겨두고 다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었어야 했다. 뉴욕 주의 Canisius High School이라는 가톨릭 사립고에 지원을 하여 합격하게 되어 뉴욕주로 나는 바로 넘어가게 된다. 이곳은 남녀 공학이 아닌 남고등학교이다. 과장 조금 보태면 랄프로렌 광고에 나오는 백인 남자애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학교 캠퍼스는 매우 이뻤고 호그와트에 온 기분도 조금 들었었다.
"넥타이를 하고 다녔었던 가톨릭 사립고: Canisius High School"
"학교가 엄격했던 터라 교내 고성방가 없이 다들 처신을 잘했던 기억이 난다"
이곳에서도 역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다행히 수영팀과 재즈 밴드에 들어가서 몇몇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으며 교환학생 1년만큼의 고독함은 아니었다. 수업은 그럭저럭 따라갔으나 내가 이 기간에 학교에서 배운 것은 결국 사람은 혼자 분투해야 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목표지향적이 된다는 것이다. 초반에 와신상담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런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어떤 목표를 세팅하면 꼭 이루어내야겠다는 일종의 근성 또한 생기게 되었다. 혼자 있으면 있을수록 사색은 많아지게 되나 감사함 또한 여러 에피소드에서 느끼게 된다. 쉽게 말하면 '그래, 이 정도면 어디야 감사하지'에 대한 스탠스를 취하게 되며 또 동시에 '어차피 세상 홀로 싸움인 거 한 번 해보는 거야' 도 갖출 수 있게 되는 마인드셋이다.
이곳에서도 나는 홈스테이를 하게 되는데 Ann과 Michael이라는 가족을 만나게 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Michael은 Canisius College의 철학과 교수였고, Ann은 사회복지사였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그들이 쓰는 단어나 문장 구성들이 매우 고급스러웠고 나는 이 환경에서 2년간 같이 지내면서 영어 실력을 크게 향상하게 된다. 특히 Michael의 경우 나의 영어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려고 거진 매일 밤 나와 대화하였고 나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보다 개념이 모호한 영역에 대해 주제를 잡았다. 예를 들어서, 어떤 것을 봐서 좋았다 수준이 아니라, 어떤 것을 봤는데 나의 생각은 어떤 점이 달랐고 다른 관점을 통해 어떻게 느꼈어야 하는지까지 펼쳐보았다. 결혼에 대한 찬반을 논했고, 자식 육아에 대한 토론을 했고, 누가 더 어려운 단어를 저녁 식사 때 얘기하는지 배틀도 해보았다. 집이 총 3층까지 있었고 나는 다락방인 3층에 살았는데 학교 숙제를 마치면 어김없이 1층 거실로 내려와 그들과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당시 나는 SAT를 준비하고 있었고 영어(Verbal) 파트를 준비하면서 나는 여러 단어로 그들을 stump(판도를 바꾸다)하기 위해 매일 저녁 특이한 단어들을 들고 내려왔다. 첫날 들고 온 단어는 Peevish였고 그다음에 들고 온 단어는 Defenestration이었다. 유학생이라면 querulous나 peevish란 단어는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defenestration이란 단어는 못 들어봤을 것이다.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쓸모 짝에도 없는 단어다.
Defenestration: 창밖투척(n)
a throwing of a person or thing out of a window assassination by defenestration
Peevish: 짜증 또는 화를 잘 내는(adj)
querulous in temperament or mood
핵심은 이 단어들이 '흔하고 안 흔하고' 가 아니었다. 모르는 단어들을 탐색하려는 지적 호기심과 영어에 집착하려는 아집 등을 내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어 표현에 대한 습득을 이곳에서 거의 모두 익혔을 정도로 다양한 slang과 표현들을 무섭게 배워나갔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홈스테이를 해주셨던 사슴 사냥꾼 Joe & Cindy 가족들은 나의 어리고 아픈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셨고, 뉴욕주에서 홈스테이를 해주셨던 Michael & Ann 가족들은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제2의 엄마 아빠처럼 나를 전적으로 서포트해주었다.
"Michael과 Ann과 2년의 소중한 시간을 같이 보냈던 버팔로 집"
사진을 자세히 보면 창문 앞에 Hanging couch(소파)가 있다. 저기에 자주 앉아서 햇살 좋은 날 주말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버팔로는 날씨가 좋지 않아 가끔 날씨가 좋으면 한없이 맑고 좋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들과 사춘기를 보냈던 소중한 시간이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 햇살을 쐬면서 저 벤치에 앉아 키우던 고양이를 무릎 위에 올리고 쓰다듬고 있으면 그 고요함의 전율이 아직도 느껴진다.
대학교 이후 보다 고등학교의 유학시절이 나는 더 기억에 남는다. 아주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흔한 연애, 썸 한번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이 나에게는 더 절박했던 시기였다. 친구들과 관계들에 있어 전혀 풍요롭지 않았고 내게 주어진 자원 내에서 해결해보려는 마인드셋을 장착해보려 했다.
나에게 있어 고등학교의 시기는 10대 후반의 개인이 인생에 대한 관점을 최초로 확립해나가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 당시, 그 시점에, 그 장소에서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교류하는지에 따라 인생은 바뀐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시 영어를 통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 영어 단어 하나에 따라 문맥의 형태가 크게 바뀐다는 중요성을 크게 인지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분투해야 하며 결국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개인의 영역이 중요한 것을 인지하여 "Doer vs. Thinker"의 차이점이 크게 와닿았다. 실천 없는 생각들로 가득 채워진 세상에서 실천의 중요성을 점차 배우게 되었다.
성공적으로 아직 이룬 것이 아직 없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가진 두뇌, 내가 가진 자원 내에서 최대한 활용해보려고 애썼다. 미국에서 고등학생 유학 시절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며 생각의 다양성, 즉 아이디어의 무한성에 매료되었다. 누구는 좋은 두뇌와 탁월한 노력으로 좋은 대학에 가고, 누구는 사업성을 발휘하여 학교와 상관없이 비즈니스로 크게 성공하는 것처럼 주어진 내 자원 내에서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이다. 다양한 친구가 없어도 되고, 화려한 연애 시절이 없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