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에서 벗어나 현대교회로의 변화를 이끈 교황
2014년 4월 27일, 로마에서 두 분의 교황이 시성 되셨습니다. 한 분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셨고 한 분은 요한 23세 교황이셨죠. 33일밖에 교황직에 계시지 못했지만 역사상 최초로 두 분 성인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삼았던 요한 바오로 1세 교황님은 요한 23세와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을 닮고 싶다는 염원으로 두 분의 이름을 가져왔고 그 뒤를 이으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같은 뜻으로 그 이름들을 당신의 교황명으로 쓰셨습니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경우, 두 번이나 우리나라에 방한하셨고 103위 순교복자들을 시성하시면서 우리나라 신자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져 계신 분이지만 함께 시성 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의 경우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착하신 교황(Il Papa Buono)’으로 불리셨고 짧은 제위기간에도 현대 천주교회의 모습을 일신하셨던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의 도시 베르가모 주변의 작은 마을 소토 일 몬테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던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는 그 어느 나라의 장남들처럼 태어난 순간부터 가장과 더불어 가난과 싸울 운명으로 정해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워낙 명석하고 총명했던 그를 지켜본 삼촌 자베리오의 지지를 받으며 사제의 꿈을 키워가게 됩니다.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부모님과 가족들 모두 두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없는 살림에도 그를 1892년, 소신학교에 진학시켰습니다. 그곳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그는 3년 만에 정규신학생으로 인정받는 탁발례를 받았습니다. 16살이 되던 해 평생의 스승이 되는 라디니 테데스키 몬시뇰을 만났고 그의 권유로 로마에서 공부하게 된 그는 당시 징집제였던 이탈리아였기에 1901년, 입대해야 했고 제대 후 1904년 로마에서 서품을 받으며 사제의 길에 헌신하게 됩니다.
스승 라디니 테데스키 몬시뇰이 고향 베르가모의 주교로 서품 되며 그의 비서신부로 임명된 론칼리 신부는 당시만 해도 소외되고 하층민을 형성하던 베르가모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앞장섰던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함께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그의 스승을 바라보는 눈길은 ‘급진주의자’, ‘공산주의에 경도된 성직자’와 같은 부당한 것들이었고 대표적인 정통주의자로 라디니 테데스키 주교에게 노동운동을 멈출 것을 명령한 교황 비오 10세의 경고로 헌신해왔던 사회운동을 타의로 접게 되는 스승의 좌절을 곁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이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스승 라디니 테데스키 주교는 결국 비오 10세 교황이 선종한 이틀 후, 선종하게 되고 그즈음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며 전 세계는 전화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됩니다.
군에서 제대했지만 세계대전에 참여한 이탈리아군으로 다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된 론칼리 신부는 의무병으로 후방에 배치되었다가 1916년, 이탈리아 정부가 군대에 입대한 모든 사제들을 군종사제로 임명하면서 중위로 임관합니다. 이후 전쟁이 끝난 후인 1919년, 다시 전역하였고 그 직후 신학교 교수로 발령받게 됩니다. 1921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명으로 몬시뇰에 임명되며 전쟁이 끝난 후, 전 유럽에 우후죽순처럼 퍼진 선교단체들을 통합하는 임무를 맡으며 처음으로 교황청 특임사제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교황청 특임사제로 임무를 시작했던 론칼리 몬시뇰은 교황 비오 11세의 명으로 1925년, 주 불가리아 교황대사로 임명되며 대주교 서품을 받게 되는데 당시 가톨릭이 주류였던 서구 국가들과 달리 불가리아는 정교회가 주류를 이룬 국가인 데다 가톨릭 신자가 극소수를 차지하는 상황이었으며 근 600여 년 만에 처음 교황청 외교관으로 임명된 상황이라 잘하면 좋고, 못해도 그만에 가까운 인사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와 함께 했던 먼저 다가가는 겸손함으로 불가리아 정교회 장상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10년간 불가리아 정교회와 왕실과의 원활한 관계를 이어갔으며 1935년, 불가리아 대사직을 마무리하자마자 대표적인 무슬림 국가인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주재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대로 일을 해내는 외교관으로서 그 역량을 인정받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교황청 대사는 터키와 대단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리스까지 총괄하는 자리였는데 이슬람권인 터키와 동방정교회권인 그리스에서 교황청의 외교관으로 일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정치감각이 없었다면 업무자체가 불가능한 자리였죠. 게다가 그가 업무를 맡았던 1935년부터 1944년까지는 유럽을 휩쓴 두 번째 세계대전이 있었던 시기와 맞물리며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1944년, 론칼리 대주교는 주 프랑스 교황대사로 임명됩니다. 당시 나치독일의 치하에 있었지만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서구국가로 임명받은 것은 그의 긴 외교관 생활에서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프랑스에 와서 했던 일은 당시 최절정에 달했던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들을 빼돌리는 작전이었죠.
론칼리 대주교는 바티칸에 다른 중립국으로 유대인의 망명을 허용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유대인을 돕는 것이 교회가 승인한 자비로운 행위임을 방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요청서를 전달했습니다. 외교 특사들과, 교황 사절들, 그리고 시온의 성모 수녀회를 통해 헝가리 유대인들에게 세례 증명서, 이민 증명서, 위조된 비자를 발급했고 이를 통해 학살 직전에 있던 유대인들을 구조하는데 나서게 됩니다. 그 행동은 훗날 국제 라울 발렌버그 재단이 야드바쉠(이스라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홀로코스트 기간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행동했던 이들을 기리는 '열방의 의인'으로 추천하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1945년 종전 후 전쟁기간 중 나치에 부역했던 프랑스 성직자들을 처벌하고 열악한 상황에 구금되어 있던 독일 포로들에 대한 처우개선과 석방에 간여하며 교황청 대사로의 역할에 매진하게 되죠.
1951년,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다가 1953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대교구장에 임명되며 추기경 서임을 받게 됩니다. 교황청 외교관으로 전 세계를 떠돌다 드디어 자신의 교구를 직접 운영하는 교구사제로 임명된 것을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기뻐하셨다는 후일담이 있지만 이미 칠순을 넘은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생애 마지막 봉사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적당한 시기에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인 소토 일 몬테에서 은퇴 사제로 살아갈 계획을 세우고 계셨지만 그 뜻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1958년 10월 9일 교황 비오 12세가 선종하며, 10월 28일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죠. 당시 프랑스계와 이탈리아계 나뉘어있던 추기경단에서 이구동성으로 탁월한 중재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론칼리 추기경을 주목했고 오랜 교황청 외교관 생활과 겸손하고 검소한 삶으로 업무적 능력과 도덕적인 모범이 될만한 인물이지만 77세의 고령인 그를 징검다리처럼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택하여 콘클라베를 통해 261대 교황으로 세우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이미 사제로 서품 받았던 그 시절부터 마음먹었던 일들을 작정하고 밀어붙이게 되는데 지난 이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교회에 가장 큰 변혁을 일으켰던 사건이 그의 손에서 시작되게 됩니다. 그가 교황으로서 한 첫 번째 일은 바로 첫 번째 주의 수난 성금요일 전례에서 유대인들을 반역자로 취급해 왔던 교회의 유대인 차별을 철폐한 것이었습니다. 강론 중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전체 교회가 즉각 중단할 것을 지시하였고 수세기에 걸친 교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도 고백하며 사죄하게 되죠.
그리고, 90여 년 전에 미완된 채로 폐막되었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 짓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공의회(公議會, 영어: Council, 라틴어: Concilium)란 가톨릭 교회의 주교단이 모여 교리, 전례, 윤리, 교회 운영 등에 대해 토의하고 결정하는 공식 회의로 교회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입니다. 첫 번째 보편 공의회였던 서기 325년에 개최된 니케아공의회에서는 당시 대두되던 아리우스파를 단죄하고 그리스도교 신자의 고백에 해당하는 니케아신경을 포고하였으며 직후 개회된 서기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교리를 확립하게 됩니다. 1542년에 개회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당시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신구교의 분리가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보편교회의 교리를 다지고 당시 지적되던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하는 내용으로 공의회가 진행되죠.
1869년에 개회된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보불전쟁과 이탈리아 왕국의 교황령의 병합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더 진행되지 못하고 '천주의 아들(Dei Filius)',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 두 가지 헌장만을 채택하고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그 1차 바티칸공의회를 마무리 짓는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입니다.
공의회 소집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려면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시대적 흐름을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역사적 배경으로는 산업화와 사회 변화 20세기 중반, 세계는 급격한 산업화와 기술 발전을 경험하며 사회 구조가 변화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신자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시대에 맞는 신앙 실천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세계 대전과 평화의 필요성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인류는 평화와 화합을 절실히 필요로 했습니다. 요한 23세는 교회가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교회의 개방성과 개혁 요구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했지만, 20세기 들어 교회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특히, 미사의 언어 변경, 타종교와의 관계 개선, 평신도의 역할 확대 등이 논의되었습니다. 직전인 19세기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는 교황의 권위를 강조했지만, 이후 교회는 보다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여 교회의 쇄신을 추진했습니다.
1959년 1월, 교황에 선출되고 얼마 후 바로 공의회 개최를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교회법을 손보고 콘클라베 당시 참여한 추기경의 수가 51명 밖에 안되었던 것에 따라 추기경의 수를 늘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도미니코 타르티니 몬시뇰을 교황청 국무원장에 임명하며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는데 그는 공의회를 준비하는 데 있어 교황의 최측근으로서 그 최선봉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공의회 준비가 한창이던 1961년 7월 30일, 타르디니 추기경은 심장마비로 선종하게 되는데 공의회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교황이 겪은 가장 큰 시련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고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됩니다. 교황이 밝힌 공의회의 정신인 아지오르나멘토(Aggiornamento)는 이탈리아어로 변혁, 변화를 뜻하는 말이었고 이는 공의회의 정신이 현대에 맞춰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함을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의욕적으로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달리 교황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가족력으로 위암이 있었던 교황은 마찬가지로 위암을 앓게 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이런 병력들은 비밀로 부쳐지고 있었고 80세에 가까운 노구에 지병이 겹치면서 하루가 다르게 건강은 악화일로로 걷게 됩니다. 그와 상관없이 공의회의 첫 번째 회기는 1962년 10월 11일 시작되었고 12월 8일 마무리됩니다. 교황은 그 시작미사에서 "어머니 교회의 기쁨" (Gaudet Mater Ecclesia)을 주제로 연설하였고 교회 조직의 정비, 공의회 주제의 설정, 논의된 주제에 대한 작업 절차를 다루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인 미사전례의 변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3차례의 회기를 더 가지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무리되지만 1차 회기와 달리 2,3,4차 회기는 교황의 손에서 후임자인 바오로 6세 교황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죠.
공의회 일정만큼 그의 상황을 쉴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사건이 같은 해에 벌어졌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였습니다.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미사일로 인해 미국과 소련 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요한 23세는 소련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에게 각각 전쟁 반대 입장을 밝히며 자제에 나설 것을 호소했으며 라디오 방송으로 "현시대엔 전쟁이 아닌 평화가 필요하다"란 내용으로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미소 양측에 은밀히 '동시철수'라는 서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중재안을 제시하여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하기도 했죠.
이와 같은 국제적인 상황들은 과로와 함께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교황의 상태를 점차 좀먹고 있었고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공의회 1차 회기를 마치고 불과 6개월이 지난 후, 교황은 지병인 위암으로 자리에 눕고 말았고 결국 1963년 6월 2일,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의 대답인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를 유언으로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지셨고 성령강림대축일 하루 전날이었던 이튿날 6월 3일 오전에 선종하셨죠.
향년 81세, 제위에 오르신 지 불과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둘러 주님 곁으로 떠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중세와 현대를 가르는 중대한 역할을 했지만 그 시작을 알렸던 요한 23세는 네 번의 회기 중 단 하나의 회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고 실제 공의회를 통해 결론까지 도달된 일도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후임자였던 교황 바오로 6세는 전임자가 시작했던 공의회를 차질 없이 마무리했고 그 결과 현대교회의 기틀을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워낙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전에 라틴어로만 봉헌되던 미사를 각자의 국가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봉헌하게 된 것, 직무 사제직(서품으로 사제들에게 주어진 사제직)에 보편 사제직(세례로써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제직)을 추가하며 평신도의 역할을 강화시킨 것이죠. 또한, 종교개혁을 통해 갈라진 개신교를 이단이라 단죄해 온 것에서 벗어나 갈라진 형제들로 인식하고 교회일치운동에 나서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예전 우리나라에서 구교와 신교의 공통된 성서로 공동번역 성서를 내놓은 것이었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쳤고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교회의 모습을 일신하려 했던 노교황의 제위 5년은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갈아 넣었던 성실한 주님의 종의 피땀이 맺힌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늘 처음처럼 겸손함을 잊은 적 없던 착한 목자는 그렇게 주님 곁으로 떠났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아직도 교회 안팎에서 그 흔적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2000년 9월 17일,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요한 23세 교황을 시복 했고 2014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성하며 요한 23세 교황은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