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장편소설
생후 11개월, 아기코끼리가 엄마와 물가에서 놀다 기우뚱하더니 물에 빠지고 말았다. 13살에 어린 엄마 코끼리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하여 발만 동동 구르고, 아기 코끼리는 놀라 허우적댄다. 그때, 다른 코끼리가 나타나 엄마 코끼리를 얕은 물가로 안내하고 아기 코끼리는 어른들을 따라 물 밖으로 나온다. 엄마 코끼리에 비해 경험 많은 35살 선배 코끼리의 침착한 대처로 아기 코끼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코끼리는 모계사회를 이루고 공동육아를 한다. 사자와 고양이도 그렇다고 한다. 출산을 한 여성의 높은 옥시토신 농도가 경계심을 낮추어 육아를 위한 공동체 형성을 돕는다. 선사시대 모계 중심 사회에서 공동육아를 하던 흔적이다. 연약한 유아를 성체가 되기까지 공동체가 나서서 양육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편리한 제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공동체란 기본적으로 모계 집단이며 양육에서 부성의 부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야말로 아버지는 생계를, 어머니는 육아를 담당하는 철저한 분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과연, 육아공동체가 현재 우리 사회의 낮은 출생률을 보완하는 합리적인 제도로서 가능할까? 구병모 작가의 <네 이웃의 식탁>은 마치 이런 환상을 예리한 날로 썰어내어 보란 듯이 대접한다.
소설은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가상적 제도 아래서 만난 네 가구의 이야기이다. 낮은 출생률의 근본적인 원인을 안정적인 주거의 부재로 가정하고 만들어진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3명 이상의 아이를 낳아야 하며,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주 양육자가 있어야만 입주할 수 있다. 미래사회의 대안이 마치 선사시대로의 회귀 같다. 5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것이 주거만이 아님에도 소설 속 허울만 좋은 제도는 현실과 다름이 없다.
임신부 배려석과 출국장 패스트 트랙은 자율적인 양보의 미풍양속을 마르게 했으며, 법으로 보장한 출산휴가는 대체인력 없이 쉬러 가는 무책임한 동료로 만들었다. 전기세 할인, 출산 시 100만 원, 200만 원의 지원금은 근본적 대책이 아니다. 허울 좋은 제도가 마치 모든 배려를 받음에도 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맘충’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그럼에도 아이를 낳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를 만들었다. 육아에 전념해야만 하는 아름다운 모성애의 그림은 시대착오적인 잔인한 풍속화일 뿐이다.
부모가 되면 여성의 돌봄 노동은 의무가 되며 그에 소홀할 때 게으르고 무책임하다는 평을 뒤집어쓰곤 한다. 덕분에 소설 속 요진과 효내의 사회 활동은 그 크기와 관계없이 ‘부업’의 취급을 받는다. 풀타임 근무자인 요진은 출근 전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 반찬을 만들고, 출퇴근 없는 프리랜서인 효내는 일과 가정에 경계에서 허덕인다. 24시간 양육자인 단희의 눈에 24시간 양육 중 8시간 이상의 근무를 해 내야 하는 효내가 게을러 보이는 역설적인 상황이 우습다. 우리는 아이에게 시간을 쏟는 것을 모성애라 부른다. 그리고 시간의 투자와 노동의 소비를 사랑이라는 말로 허울 좋게 포장하여 착취한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양육의 주체를 여성으로 고정시켜 성인 여성이 없을 때는 미성년의 여자아이가 자연스럽게 양육자의 위치에 서도록 만든다. 어른이 있음에도 아이에게 돌봄 노동이 떠 넘겨지는 것은 그 역할이 여성이어야 한다는 암묵적 규율에 동의다. 6살 시율이가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에 단희와 요진이 경각심을 느끼는 것에 반해 시율이의 아버지인 은오는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당연시된다는 것은 저항할 마음조차 들지 못하게 하는 강요의 분위기다. 거절할 수 없는 강요가 폭력이듯 이런 분위기 또한 폭력임을 알아야만 한다.
강요당하는 모성애는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부성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여 한발 물러설 면죄부를 준다. 재강은 해외 다큐에서 본 멀티태스킹 능력이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근거로 여성이 양육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남성의 부족함을 납득하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보란 듯이 그 일을 회상하는 단희가 마트 주차장에서 T 자형 자리에 한 번에 주차를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재강, 많이 인간 됐다.” 단희의 주차 실력은 은오가 무관심과 게으름을 본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노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모성애만큼 신화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공동체 생활이다. <네 이웃의 식탁>이란 제목처럼 소설 속 공동체 생활의 중심은 식탁으로 상징된다. 끼니를 공유한다는 것은 식구가 됨을 뜻한다. 그 식탁을 중심으로 식사를 공유하던 네 가족들은 그 식탁만 두고 떠나게 된다.
왠지는 몰라도 이 공간은 이렇게 활용해야 마땅한 곳 같았다. 어떤 효용이나 합리보다는 철저한 당위가 지배하는 장소 … 중략… 그럼에도 눈앞의 식탁은 이 주택에서 제일 오래갈 듯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향후 몇 가구가 들고 나든지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것만 같은, 이웃 간의 따뜻한 나눔과 건전한 섭생의 결정체처럼. - 191p
네 가족들 중 세 가족이 떠나고 난 자리, 식탁만 남아있다. 공동양육을 목적으로 자연스럽게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게 되면서 아름답지 못한 일들 조차 개방되고 말았다. 서로의 치부를 꺼내어 두고 껄끄럽지만 그렇지 않은 척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불편함이 해결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공동체였던 ‘네 이웃’이 ‘내 이웃’이 되었을 때는 불편한 사이일 뿐이다.
몇 년 전 강남 보금자리주택은 현상공모로 임대주택의 디자인을 선정했다. 선정 시 외부에 공개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던 주최사는 마침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위한 혁신적인 디자인이 있어 선정했다. 그 디자인은 이웃 간의 소통과 노약자들의 위급 상황 시 신속하게 외부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현관문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전하는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 임대 주택 단지는 정말 그렇게 지어졌다. 결국 입주자들은 무상으로 배부받은 블라인드를 설치했다고 한다.
공동체의 가치가 과도하게 평가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과연 공동체가 개인의 사생활과 주거의 안락함을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일까? 관계자들이 자신의 집을 위한 디자인을 선정했다면 뽑힐 수 없었을 것이다. 과도한 의미 부여를 위해 주목적을 상실하고 말았다. 가장 안락해야 하는 집이 몸을 숨길 수 없는 공개적인 장소가 되었을 때 우리는 불편함을 넘어 공포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소설은 네 가족들의 공동체가 악취를 풍기고 해체되어 또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치, 공동체의 해체가 소수의 문제적 구성원 탓 인 것 처럼 말이다. 강요당한 모성과 공동체는 서서히 속에서부터 멍들어 갔다. 줄어드는 출생률이 과연 주거의 안정 때문인지에서 시작되는 소설은 아직까지도 강요되는 모성 신화의 단면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아직도 모르겠어?
깔끔하고 단정한 문장들 사이 숨겨져 있는 섬뜩함이 아름답기까지 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