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리스 패션
“남자아이에요? 여자아이인가?” 요즘 겉모습만으론 남녀 구분이 어려운 어린아이가 종종 눈에 띈다. 딸을 낳았다는 지인의 소식에 분홍 꽃모양이 새겨진 옷을 선물하거나 반대로 아들을 낳았다고 파란색에 공룡 디자인 제품을 찾는 것이 옛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남녀 성별 구분을 없앤 이른바 ‘젠더리스(Genderless)’ ‘유니섹스(Unisex)’ 같은 남녀 공용 패션이 아동복에도 등장하고 있어서다. 이 같은 패션을 지향하는 부모들은 관습적으로 고정된 이분법적 시선에서 벗어나 아이의 취향을 존중하고 아이가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남아용과 여아용으로 고착된 아동복에 금이 가고 있다. 성별 구분 없이 누구나 입어도 잘 어울리는 남녀 공용 아동복이 부쩍 많아졌다. 잘록한 허리선을 없애고 다채로운 색상을 입힌 패션이다.
유명 브랜드 남녀 공용 패션 속속 선봬
사회적으로 성 역할 구분이 허물어지면서 3년여 전부터 젠더리스 패션이 성인 패션에서 꾸준히 인기를 모았다. 이 인기에 힘입어 젠더리스 흐름이 지난해부터 아동복으로 이어졌다. 젠더리스 아동복 패션은 특히 젊은 N세대(1977년 이후 태어나 인터넷에 친숙한 세대) 부모들 사이에서 호응이 좋다. N세대 부모들은 자녀가 사회적·관습적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선택하고 누리기를 바라는 경향이 크다. N세대 역시 과거 10·20대에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과감하게 드러냈던 세대다. 이를 통해 못이 튀어나오면 망치에 맞는다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당시 기성 세대와 구분 지었다.
38개월 된 딸에게 젠더리스 패션을 권하는 주부 유희진(37·서울 삼전동)씨는 “여자아이라고 매일 치마나 원피스만 입고 다소곳하게 앉길 바라는 주변 분위기가 싫었다”며 “그래서 일부러 아이 옷장에 치마뿐 아니라 활동하기 좋은 넉넉한 크기의 티셔츠와 바지를 사두었더니 어느 순간 아이가 젠더리스 패션을 즐기고 있더라”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은 아동복 시장의 한 축을 형성해 가고 있다. 미국 패션 브랜드인 아베크롬비앤피치는 지난해 성별 구분 없는 아동복으로 에브리바디 컬렉션을 출시했다. 셔츠·재킷 등 25가지 제품을 모두 남녀 공용으로 내놨고 옷 안에 부착된 라벨에 성별 표시도 전부 없앴다. 캐나다 가수 셀린 디옹이 지난해 선보인 아동복 브랜드인 누누누도 모든 제품을 젠더리스 의류로 출시했다.
프랑스 가방 브랜드인 페페수프는 다양한 색상과 패턴 디자인으로 제품을 구성해 아이들이 성별 구분 없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가방을 선택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정자영 페페수프코리아 대표는 “프랑스 디자이너 아멜리에 두브룰레가 아들을 낳은 첫해에 개발한 디자인”이라며 “디자이너가 아이의 옷과 소품을 사려는데 모두 파란색이거나 자동차 모양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아 아이가 보다 다양한 디자인 제품에서 개성을 찾고 영감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 남녀 공용 가방을 디자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기존 아동복 브랜드들도 남녀 공용 옷을 추가로 내놓고 있다. 국내 유아용품 브랜드인 아가방은 지난해까지 여아용으로 선뵌 분홍색 코트를 올해는 남녀 공용 코트로 내놨다. 아들을 둔 부모가 여아용 분홍 코트를 사거나 반대로 딸을 둔 부모가 남아용 셔츠를 사는 등 젠더리스 패션을 선호하는 수요를 파악해 제품군을 확대했다.
안경화 아가방앤컴퍼니 국내사업본부 상무는 “최근 아이 옷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경향을 살펴보면 성별에 경계가 없는 젠더리스 디자인에 거부감이 없다”며 “오히려 젠더리스 아동복 패션은 넉넉한 품으로 착용감이 편하고 화려한 색으로 세련미를 더해 젊은 부모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고 분석했다.
프랑스 유아 패션 브랜드인 봉쁘앙도 성별 구분 없이 입는 재킷을 내놨다. 봉쁘앙은 종전까지 대부분 레이스와 꽃모양을 강조해 여성스러움을 극대화한 여아용 제품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관습적인 성 관념 깨는 데 긍정적
그렇다면 젠더리스 아동복 패션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젠더리스 패션이 관습적인 성 고정관념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희경 부천대 유아교육학과 교수는 “신체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다름을 인지하는 나이는 만 4~5세지만 이보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치마를 입고 머리가 긴 인형을 보면 여자일 것이라고 말한 다”며 “이를 어른들에게 자연스럽게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사회적으로 남녀 차별 없이 능력을 발휘하는 현대 시대에 패션이나 제품으로 아이에게 고정관념을 먼저 심어줄 필요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도 있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억지로 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1~3세엔 대부분 부모가 주도적으로 아이의 옷을 고른다. 하지만 4세부턴 아이가 자신의 옷을 선택하고 싶어해 이를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이 또 다른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각자 여성스럽거나 남성스러움을 원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인지 발달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드레스를 입기 원하는 아이에게 바지를 강요하거나 파랑 옷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다른 색상 옷을 강제로 입힐게 아니라 아이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줘 자기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함께 “아이 옷을 살 때 매장에 부모만 가지 말고 아이와 함께 가서 아이가 원하는 디자인을 직접 선택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글=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
사진=프리랜서 김동하, 각 사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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