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든 인간을 향한 위로의 눈길
위로를 받고 싶은 시기에 위로처럼 연극이 다가왔다. 삶의 구체적인 어려움 때문에 내가 바람 흔들리듯이 맥을 못 추릴 때도 위로가 간절하지만, 모든 격랑이 지나가고 그저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언가 버거울 때도 위로를 절실히 원한다. 점점 산다는 것, 살아진다(제목 ‘사라지다’와 같은 발음이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곤 한다. 연극에서 말한 것처럼 이 우주적인 시간 속에서 내 존재는 짧은 섬광처럼 순간이지 않은가. 섬광처럼 빛을 내긴 할까? 점점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고향처럼 회귀한다. 이 연극은 “나는 누구인지” 다시 천천히 더듬어보게 한다.
연극의 분위기는 진지하지만 유쾌한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다. 여자 5명이 수다 떨듯이 자기 삶의 작고 무거운 이야기를 내려놓고 감정의 실타래를 자기 방식대로 풀고 있다. 코로나 시기, 서로의 정이 그리운 시절에 따뜻한 위로를 선사하는 연극이다. 이들과 함께 웃고 울다 보면 나도 이들처럼 한 해를 정리하는 느낌을 받았다.
연극은 모든 경계를 흔들어 놓는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 있는 트랜스젠더 이모 말복, 결혼과 이혼 사이에 있는 상강, 안정된 삶 속에서 우울감을 호소하는 청명, 유부남과 비밀연애 중인 동지, 여자를 사랑하는 신정, 그리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서 있는 윤주가 등장한다. 경계의 위기는 성소수자, 이혼녀,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이 공간 모든 인간이 경계의 불확실성을 호소하면서 존재의 흐릿함에 불안해한다. 심지어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도 흐릿하다.
스위스의 철학자 칼 융이 인간은 절반 가까운 시간을 무의식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무의식 속에서 그저 살아진 시간은 정말 내가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제사의 주인공인 윤주는 죽었지만 누구보다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강박적으로 붙어 있고, 트랜스젠더와 그 아내는 자꾸 자신은 산 게 아니어서 삶의 투쟁을 했다고 주장하고, 트랜스젠더 이모는 죽은 윤주의 환영과 대화하기에 이른다. 산 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대한 생각은 결국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 푸르스름한 불꽃을 낸다. “나 잘 살고 있는가?”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말복과 그의 아내가 격렬한 대화를 나눈 후 혼자 남겨진 말복의 뒷모습이었다. 아내와의 전쟁 같은 대화를 끝낸 후 혼자 남은 말복은 감정과 함께 관객들에게 뒷모습을 보여준다. 가끔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속임없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뒷모습으로 본 말복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저 사람이었다. 감정을 충분히 간직한 말복은 이내 뚜벅뚜벅 자신의 침실로 들어간다. 말복의 걸음이 순간 말복의 역사, 그리고 미래로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그녀의 등에서 작은 영웅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수선화를 든 다리를 저는 남자의 등장에서 감정이 심하게 요동쳤다. 경계 안에서 불안해하는 여성들의 대화에 이질적인 타자인 ‘남자’의 등장은 내 머리를 때렸다. 이로써 남자, 여자를 넘어 모든 인간의 불안이라는 보편성이 오롯이 다가왔다. 인간은 이렇게 모두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따뜻한 윤주의 시선이 저 세계에서 이 세계의 인간 모두를 조용히 위로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힐링되고 치유 받았다. 그들 수다의 실타래를 따라가면서, 그들의 자기 고백을 숨죽인 채 들으면서, 그리고 춤과 노래의 예술 속에 녹아들면서, 그리고 경계를 힘있게 넘나들면서 말이다. 이처럼 연극은 치유의 해법을 이곳 저곳에 흩어놓고 관객에게 직접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슬픔 뒤에 사랑이 올까.” 이 동화 같은 대사를 그저 믿어보고 싶다.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메시지가 은은히 새어 나와 연극이 힘있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