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은 탈로 막으면 된다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또다시 선물 같은 연극을 선보였다. 이 극장에서 본 연극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재미와 의미, 그리고 예술성까지 알차게 성취한다. 이번 연극은 극단 고래의 20번째 정기 공연 <별탈없음>이다.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연극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는 이바구들이 관객들을 친근하게 반기고, 연주가가 다정한 노래로 맞이한다. 부드러운 노래와 따뜻한 환대가 연극 보기 전 긴장을 풀어주었다.
맞아, 관객도 연극의 한 요소이고 배우들은 우리를 귀한 손님처럼 생각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탈을 깎는 장인 ‘도열’과 그의 딸 ‘남주’는 둘이서 투닥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도열’은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며, 중학생이 된 ‘남주’의 고민을 흘려듣는다.
‘남주’는 나름대로 티를 내보지만, 도열은 그저 여타 어른들처럼 그럴싸한 조언을 끝으로 별일 없을 것이라 여긴다. 그 길로 학교에 간 ‘남주’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에 도열은 자책하며, ‘남주’의 죽음 원인을 알기 위해 오랫동안 방황한다. 결국 ‘도열’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순간, ‘도열’의 집에 가보로 내려오고 있던 탈로부터 1500년 전 신라시대 인물 ‘황창’이 갑작스레 나타난다. 이에 ‘도열’은 ‘황창’을 이상한 무단침입자라 생각하고 쫓아내려 하고, ‘황창’은 현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게 된다.
연극을 보는 내내 연출가의 상상력에 놀라웠다. 황창은 실존 인물로 1500년 전 신라인이었다. 그는 열다섯 살 소년으로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찔러 죽인 뒤, 백제인들에게 피살당한 인물로 역사에 묘사되어 있다. 후에 신라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그의 형상을 본뜬 ‘탈’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춘 것이 우리의 전통춤 검무의 연원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탈’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탈춤에 대한 이 짧은 기록이 멋진 연극 서사로 탄생한 것이다. 연극은 황창을 어리지만 나름 정의감에 불타는 소년(혹은 소녀)로 묘사하고 있다. 현대의 여중생 ‘남주’ 역시 그저 올바른 것을 선택하다 변을 당한다. 그리고 연극은 두 인물 사이에 태곳적부터 유유히 흐르고 있는 보편적 심성에 주목하고 있다. 마치 인간의 기본 조건 중 하나인 양 그들은 무언가에 자연스럽게 이끌려 결국 죽고 만다. 나에게 황창의 유산은 어느 정도 있으며, 나는 그것을 내 삶에서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가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시간 여행을 마친 황창이 다시 삼국 시대로 돌아가 취하는 행동은 꽤 인상적이다. 왕을 죽인 자신의 행동으로 자칫 마을 사람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결자해지의 자세로 홀로 의연히 죗값을 치른다. 우리는 예전부터 황창, 그리고 남주와 같이 타인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 덕분에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황창의 절망처럼 현대 사회도 여전히 전쟁 같은 일상이 펼쳐지고 있지만, 황창 한 명 한 명의 역사가 모여, 황창이 놀라는 현재의 발전된 모습을 이룩한 것일 테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우리는 꿈꾸었고, 해결해왔고,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연극의 마무리는 다시 청소년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면서 탈을 제작하는 도열의 복귀로 마무리된다. “탈은 탈로 막으면 된다.”
연극의 은밀한 메시지처럼 등장하는 대사이다. 연출가는 탈은 우리가 현재 있는 위치에서의 삶이라고 언급했다. 마치 탈을 정성스럽게 깍듯이 연출가는 정성스럽게 연극을 깎고, 배우는 성실하게 연기를 다듬으며, 연주가는 소리로 자신의 탈을 깎는 것이다. 황창과 남주같은 의인만이 황창의 기질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도열의 마지막 모습처럼 우리 모두 현재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탈을 묵묵히 깎고 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탈을 탈로 막으면 결국 탈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탈이 그래도 있는 것일까? 아무렴 어떠한가. 탈이 있으면 또 탈로 막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