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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Jul 04. 2023

제주 최고의 풍수는 어디인가

2022년 초, 우연한 기회에 MBN에서 개최한 어떤 컨퍼런스에 연사로 초청받은 적이 있다. 청춘의 꿈과 목표를 위한 행사였다. 꿈도 목표도 이룬 게 없는데... 어떤 이야기를 할지 난처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발상으로 이야기를 해 보았다. '꿈이 없으면 하기 싫은 것부터 지워 나가자'는 주제였다. 지금 생각해도 잘도 둘러댔다는 생각이 든다.


발표를 마치고 나서 행사를 기획/진행한 에이전시 대표님이 찾아오셨다. 강연 재밌게 보았다며 명함을 주셨다. 마침 대표님도 제주에 별장이 있어 종종 찾아오신다고 했다. 제주에 가면 얼굴 한 번 보자고 하셨다. 마침 내가 사는 집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표님이 형식상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로 연락을 주셨다. 사업가는 다르구나 느꼈다. 서귀포에 있는 작은 빌딩을 회사에서 소유하고 있는데, 그곳 1층에 음악 감상실을 오픈하신 것이다. 오프닝 행사 겸 주변의 아는 분들(대부분 사업가들)을 모시고 파티를 열었다. 거기에 초대해 주신 것이다. 


괜히 쟁쟁한 사업가들 틈에서 밑천이 다 드러날까 봐 고민되었다. 하지만 불러 주신 예의를 저버리는 건 아니다. 그래서 쭈뼛쭈뼛 파티장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야외 주차장에는 온갖 외제차가 반짝거리며 서 있었다. 그중 하나는 롤스로이스 SUV도 있었다. 롤스로이스를 제주에서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참여자들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분들끼리는 신나게 명함을 교환하고 있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최소 일고여덟 살은 많아 보였다. 


"저는 근본 없는 사람이라서 명함이 없거든요. 와하하하하."


하며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명함. 명함을 가져가지 않다니... 하지만 나를 초대해 주신 대표님은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여신욱 작가님'이라고 열심히 인사를 시켜 주셨다. 역시 사업가는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명함이라도 들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대표님께 둘러대고 잠깐 자리를 빠져나왔다. 잽싸게 집에 가서 명함을 찾아보니... 작업실에 다 두고 온 것이다. 그래서 15분 거리 작업실로 급하게 달려갔다. 작업실에서 명함을 20개 정도 뽑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쭈뼛쭈뼛 들어가 대표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먼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대표님이 나를 보더니 빨리 여기로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나는 천천히 대표님 쪽으로 걸어갔다. 내 걸음이 너무 느렸는지, 대표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아까 말씀드렸던 회장님께 꼭 인사하고 가요. 저분이 여기서 가장 어른이고 정말 성공하신 분이에요. 꼭 인사하고 가요. 밖에 보면 롤스로이스 한 대 있는데 그게 저분 차예요.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 주실 거고 작가님한테도 도움이 될 거예요."


롤스로이스. 내 귀에는 롤스로이스 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도착해, 대표님은 그 '회장님'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여기 여신욱 작가님이라고, 젊은 분인데 참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멋있는 분이에요." 취기가 살짝 든 것 같은, 나이가 지긋한 안경 쓴 노신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오오 작가시라고?"


고작 책 두 권 쓰고 작가님이라니... 심하게 무안했다. 하지만 최근 2년 동안 책 두 권 말고는 뭔가 내세울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 차라리 작가라고 나를 소개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돈을 못 벌어도 작가는 작가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회장님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인 줄 아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후 30분 동안 '진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제주 최고의 명당'이 어디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쨌든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업가와 말을 섞어본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 생각해 보니, 대학 시절 광고 수업 교수님이 롤스로이스 키를 보여주며 자랑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분은 그저 처가가 부자였다고 들었다. 자력으로 롤스로이스를 타는 분은 처음 맞다. 


이 분은 이미 10년 넘게 제주에서 살고 계신다고 한다. 서울을 오가며 사업을 하시지만, 제주도, 특히 서귀포에 돌아오면 영혼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심지어 한라산 꼭대기를 향해서 말도 거신다고. 날씨가 화창한 날은 "할머니, 오늘은 얼굴이 참 고우시네요." 하며 인사를 건넨다고 하셨다. 


그냥 나이 든 노인이 술김에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 또한 한라산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제주에 살아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다. 여행으로 며칠 와서는 느낄 수 없다.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 1년 내내 끊임없이 변하는 한라산의 표정을 꾸준히 읽어 봐야 알 수 있다. 한라산은 살아 있다. 어찌 되었건,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람의 말은 흘려들으면 안 된다.


곧이어 그 회장님은 풍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젊은 작가님은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명당에서 작업을 하라고 하셨다. 구체적인 위치는 서귀포 칼 호텔에서부터 해서 우리들 CC 사이의 토평동 일대를 집어 주셨다. 


그곳은 말하자면 제주도라는 할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창조와 관련해서는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를 열어 그 지역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말을 믿기로 했다. 어찌 되었건,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람의 말은 흘려들으면 안 된다. 


집에 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무심하게 듣더니 한 마디 던졌다. "그러고 보니 왈종 미술관이 그 근처에 있잖아." 왈종 미술관은 이왈종 화백이 서귀포로 이주해 터를 잡은 곳이다. 그 위치에서 꾸준히 작업을 하다가, 2013년 사재를 털어 미술관으로 증축했다. 


왈종미술관을 방문해 보면 알겠지만, 정말 남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이왈종 화백의 그림은 당연하고, 미술관 건물 전체가 흥미롭다. 꼭대기에 가면 높은 야자수가 꽂혀 있는 바닷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남국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제주에서도 가장 이국적인 곳이다. 이왈종 화백은 '제주생활의 중도' 시리즈를 연작하며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했으니... 이래저래 풍수가 좋은 곳은 맞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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