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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Jan 06. 2021

100%의 위스키를 만날 가능성에 대해, 부산스페이스바

부산 여행 둘 째날 저녁, 원래 이 날 가고 싶었던 바는 3개였다. 분위기가 좋던 HOTEL BAR, 버번 바 소셜클럽, 라인업이 좋고 저렴하다는 스페이스바. 근육통으로 몸 상태도 안좋은데다 맥주도 한잔하고 집에서 회와 위스키를 먹은 탓에 이미 숙소인 해운대에서 먼 바는 다 스킵하고나니 딱 하나의 바가 남았다. 바로 스페이스 바이다. 스페이스바의 위치는 센텀시티이니 지하철로 멀지 않으나 중간에 한 번 버스를 갈아타야했다. 사진에서 본 느낌이 아늑하고 빌딩에 위치해 있어서 고층 건물 혹은 루프탑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좀 생뚱맞게 상가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캐주얼한 카페와 국밥집 같은 게 있었는데 자정이 넘은 그 시간 문이 열려있는 곳은 오직 스페이스바였다.


딸깍. 문을 열면 자동적으로 인사를 한다. 나는 동방예의지국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재빨리 바의 분위기를 스캔한다. ㄱ자 바가 길게 설치된 내부에는 4~5명의 혼성 손님과, 2명 남자 손님이 앉아있다.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짧은 순간의 몇 초간 사장님과 나는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침묵을 깬 건 사장님이었다.


"저희는 몰트바구요. 잔술로 드실 수 있어요. 메뉴판은 없고요."


메뉴판이 있으면 좀 더 선택은 쉬우련만 직접 눈으로 보며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저는, 피트 위스키를 좋아하는데요. 피트가 어디 쪽에 있나요?"


자정이 넘어 혼자 방문한 의문스러운 여자 손님의 입에서 '피트'얘기가 나오자 사장님은 한결 편해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피트는 저 쪽 끝에 있어요."


단체 손님의 앞 쪽이다.


"직접 가서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내려가실 때 바닥에 턱을 조심하세요."

시력이 좋지 못해서 술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킬호만이 쪼로록 놓여있길래 로크곰 2020을 먹고 싶었는데 못먹었던 터라 주문했더니 2020년 버전은 이미 끝났고 그 전 버전만 있다고 한다. 이미 먹은 적이 있길래 패스. 킬호만 크리스마스 버전 마키아 베이 CS를 마셔본다. 뭔가 리치하게 강한 느낌이 아니라 약간 알콜이 정제되지 않은 채 날카롭게 튄다. 버번 캐스크 피트 답게 달달하고 부드러운 바닐라의 맛에 적당한 피트가 어우러진다. 알콜이 튀지만 않으면 괜찮을 텐데, 목을 치는 알콜의 찌르르함이 아쉽다. 복숭아와 아몬드류의 고소함도 끝에 맴돈다. 킬호만은 늘 먹으면서도 '와 맛있다!!'. '존짱!!' 이런 느낌은 없다. 그저 신생 증류소로서 더 맛있는 술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마음과 그 증류소집 막내 아들이 잘생겼기에 응원한달까...(더 몰트샵에서 본 막내아들 사진을 투척하려했더니 안보이네...)

튀는 알콜에 좀 진정시키려고 물을 조금 섞어 아주 천천히 마셨다. 무슨 술이 있는지 둘러보다가 아일라&피트가 모여있는 곳이 아닌 내 시선 바로 위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술을 발견했다.

가장 윗선반에 뭔지 알겠는가? 이 때 카메라가 약간 이상이 있어서 초점 다 날아가고 난리 난리...


라프로익 25년과,,,탈리 30년이다. 보자마자 헉, 저건 마셔야만 돼!!! 황급히 가격을 물으니 두 개다 30ml 한 잔에 생각보다는 비싼 가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나로서는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라프로익 25년 반 샷만을 시켰다.

세상에,, 너무 아름답다...사진을 보는 것 만으로도 두근거리며 그 날의 기분이 다시 살아난다. 이 날의 나의 테이스팅 노트가 진짜 가관이다. 보통 밖에서 위스키를 마실 때 카카오톡 나에게 글 남기기로 테이스팅 노트를 쓰기 마련인데 그 어떤 때 보다도 길게 흥분해서 썼다.

한 입을 머금는데 와 진짜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와,, 사장님,, 와,,, 얘 미쳤는데요...존맛이예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내게 사장님은 맞장구 쳐주시다가 한마디를 웃으며 날리셨다.


"진짜 행복하신가봐요."


행복이 별 게 아닙니다. 인생 위스키를 만났는데 어찌 잇몸이 만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첫 맛에 포도의 맛이 나면서 바로 그윽하면서 잔잔하게 피트가 깔린다. 방금 엄청 튀는 알콜을 먹어서 더 대비되는 거겠지만 알콜은 전혀 튀지 않고 그 어떤 맛도 모가 난 부분없이 둥굴둥굴하게 조화를 이뤄 입에 감기고 여운도 길다. 최근 cs 피트들을 먹으며 역시 cs가 맛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다. 아니야. 48.9도로 도수는 높지 않지만 도수는 균형감을 이기지 못한다. 정말이지 피트가 너무도 세련되고 부드럽고 정제되어 있고 우아하다. 그런 피트에 쉐리의 단맛이 더해져 더 고급스러운 맛이 완성되고 은은한 너트, 호두, 밀크 초콜릿이 달콤 고소하게 입안을 감싸 안는다. 약간 느끼하다 느낄 수도 있지만 시트러스함이 받쳐주기에 전혀 그렇지 않다. 탄탄한 힘까지 있는 진짜 조화로운 균형감 쩌는 위스키다. 라프로익 10cs도, 라프로익 카디아스도 맛있었지만 단연 지금까지의 내 인생 최고의 위스키는 라프로익 25년이다. 라프로익을 한 두모금 먹는데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사장님,,,이걸 마지막으로 먹었어야 하는데...제가 여기서 다른 어떤 걸 먹어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아요."

"동감입니다."


그렇다고 나를 말리지 않은 사장님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내가 라프로익을 먹기 직전에 손님들이 전부 빠지고 바에는 나와 사장님 단 둘이 남아 있었다. 사장님 핸드폰으로 줄곧 전화가 왔는데 영업을 하는지에 대한 문의였다. 라프로익을 먹을 때 쯤에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쯤의 커플이 들어왔는데, 취기가 좀 오른 그들은 메뉴판이 없고 잔 술로 판다는 얘기에 죄송하다며 다음에 오겠다며 나갔다. 아마도 캐주얼한 바에서 맥주 한 잔을 하거나 칵테일 한 잔을 하려했던 거겠지. 그리고 내가 한창 라프로익을 마실 때 남자 셋이 들어와 앉더니 분위기를 쓱 보고는 나갔다. 아마도 그들은 여자가 나오는 바를 기대하고 왔었을 것이다.

"이 주변에 바가 별로 없어서인지 많이들 오해하고 잘 못 찾아오시곤 해요."

사실 사장님은 연락도 없이 자정이 넘은 시간에 불쑥 온 나 역시도, 늘 이렇게 잘 못 찾아온 손님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내 입에 '피트'란 말이 나오는 순간, 잘 찾아온 손님이구나 싶었다고.


양보다 질! 피트 위스키를 꼼꼼히 살펴본 뒤 아드벡 드럼과 쿨일라 독병을 반샷으로 시켰다. 아드벡 드럼은 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부드러운 첫맛 다음에 아드벡 특유의 석탄? 느낌의 강렬한 피트가 부담스럽지 않게 깔린다. 엑스버번과 엑스럼 캐스크를 사용했고 부드러우면서 달콤하며 버번 특유의 단맛이 깔리면서 럼의 프루티함이 어우러지고 마무리는 굉장히 실키하다. 지하실의 쿰쿰함이 약간 느껴져서인지 지하의 어두운 피트 같은 느낌도 들었다. 부드랍고 맛있다. 하지만,,,아드벡 고질적 문제는 힘이 금세 빠진다는 거다..최근에 보틀을 비운 우가달도 그랬다. 마지막에 진짜 축 늘어진 느낌이 들 정도로 힘이 빠지고 밍밍해졌다. 이런 고찰을 사장님께 나누자, 다른 손님 또한 같은 말을 오늘 했다고 하셨다.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라면 진짜 그런건가? 아드벡,,,,섭섭쓰....

마지막 술은 좀 테이스팅 노트도 귀찮았던 나는 대충 마구 쓴다, 독병 쿨일라 쉐리 벗! 은은하며 그윽한 쿨일라답게 쉐리도 그윽하게 품었다. 화사하고 밀크 초콜릿 맛이 부드럽고 진짜 튀는 느낌이 전혀없고 스모크함이 두드러진다.


"정말, 피트만 드시네요."

"네...피트충입니다. 피트를 먹어야지만 맛있다 느끼고 웃을 수 있더라고요."


핕밍아웃을 오늘도 찐하게 했다.

"언제 까지 하세요?"

"2시 까지인데 더 드셔도 돼요."

사장님은 여유롭게 마시라고 배려해주셨지만 민폐 끼치는 게 죽을 만큼 싫은 나는 킬호만 30ml 한 시간 나머지 하프샷 3잔 45ml 한 시간, 총 2시간 동안 알차게 마시고 2시에 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여기 너무 좋아요....이 곳 때문에 부산에 이사오고 싶은 마음이예요."

진심이었다. 부산 여행 2박 3일 중 가장 크게 웃고 가장 행복했던 날이다. 박인환 시인의 인생 술이 조니워커 블랙인 것을 안 이후로 늘 나의 인생 위스키가 뭘지 궁금했다. 내가 마음 놓고 마시지 못했어도 내가 죽은 후 내 친구들이 나를 위해 흩뿌려줄 그런 술. 바뀔 수는 있겠지만 이 날 이후로 내 인생 술은 라프로익 25년이 되었다. 11월 자정이 넘긴 어느 컴컴한 밤에 만난 100% 위스키, 그건 라프로익 25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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