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젠젠 Jan 10. 2021

발칸을 말할 때면 입에 호두 라키아의 고소함이 스친다.

발칸 반도 중부에 위치한 코소보는 한때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 소속되어 있었다. 90년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서 탈퇴했고 세르비아의 자치주였던 코소보는 98년 부터 2년에 걸친 전쟁을 겪고 2008년이 되어서야 독립 선언을 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공화국 내 자치주라고 주장하고, UN의 공식인정은 받지 못했다. 발칸을 여행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뭐였는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행해보지 않은 지역 중에 그나마 접근성이 쉽고 물가가 저렴하다는 이유였을까? 인도를 여행하다 날아간거니 인도와 멀지 않아서 였을까?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발칸의 역사가 그 이유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한 달 정도 살아보고 싶은 아름다운 오흐리드

발칸 여행은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를 거쳐 우리는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로 가는 버스를 스코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화 속의 마을처럼 아름다운 오흐리드에서 낮에는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밤에는 호수가 보이는 휴양지풍의 바에서 롱티를 한잔 마시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작은 마을의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휴가 같은 완벽한 일주일을 보내고 마주한 스코페는 다소 당황스런 도시였다. 걸어다니는 사람보다 동상이 많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 스코페는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분쟁에서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정부가 발벗고 건립한 거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거대한 동상은 마케도니아 광장 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다. 무려 무게가 30톤이나 넘는 초대형 동상이다. 동그란 광장의 가장 높이 거대하게 서 있는 동상은 공산주의의 우상화된 지배자의 동상과 꼭 닮아서 위압적이고 불편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외에도 정말 희귀한 각종 동상이 거리마다 즐비한데 1973년 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재건 사업을 하며 번듯한 관광도시로 만들 겠다는 목적하에 건축물과 동상을 1조나 쓰면서 건립했다고 한다. 사자와 온갖 동물과 어머니와 아들, 이름 모를 위인들, 다리 다리 마다 몇미터 거리두기를 하고 늘어서 있는 각종 사람들의 동상은 정말 스코페라는 갤러리에서 동상 전시회라도 한다는 듯 어디에나 있다. 만지는 것은 모두 금이 되는 마이다스의 왕처럼, 손을 대면 구리가 되는 누군가의 손이 도시 전체를 휩쓸고 간 형상이다. 반나절동안 이 괴이한 도시를 지켜보다가 프리슈티나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너무도 기괴한 스코페를 갓 지나쳤디 때문인지 프리슈티나의 첫인상은 그보다는 좀 더 친근했다. 우리가 묵은 게스트하우스의 분위기 덕분이었을 수도 있겠다. 아침부터 시끌벅적했던 게스트하우스의 공용 공간에서는 누군가 먼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점심을 먹자고 제안을 했고 대부분 받아들였다. 흔히 만나지 못하는 한 한국 여행자가 페이스북으로 사귄 부른 현지인 친구 2명까지 대략 열명 정도가 모이게 되었다. 서로의 여행이야기를 나누고 시끌벅적한 수다를 떠는데 현지인 친구가 말을 꺼낸다.


"모두들, 라키야 한 잔씩 마셔봐."

"라키야? 그게 뭐야?"

"전통술이야."


그의 제안에 우리는 모두 투명한 액체가 담은 작은 샷잔을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냄새를 맡아보니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은데 약간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 별 생각없이 한 입에 털어 넣다 그 독한 기운에 사래가 들어버렸다.


"괜찮아? 천천히 마셔야지."

"엑, 이거, 너무 독한거 아냐?"

"응 독하지. 한 40도 정도 일걸.'

"말 좀 해주지, 그것도 모르고 한입에 털어 넣었잖아."


자두나 포도 등을 증류하여 만든다는 라키야는 달콤한 향으로 시작하지만 강한 알코올 기운에 내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 했다. 향기로우면서 독한 맛은 마치 고량주를 연상시켰다. 터키에서 먹었던 라키와도 그 느낌이 비슷했는데 아마도 만드는 방법과 재료과 동일 할 것이다. 우리는 반주를 곁들인 거한 식사를 마치고 코소보 친구들이 알려준 알바니아를 상징하는 독수리 손모양을 모두 만들어 사진을 찍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같이 다닐래요?"


코소보 친구들이 프리슈티나 관광을 시켜주기로 했다며 한국인 h가 먼저 제안했다. 전날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 우리는 저녁에 맥주도 함께 마시며 이미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사이였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한국인들과 다니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한국인 보기가 드문 발칸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반가워 경계없이 그녀를 대했다. 딱히 일정도 없는 우리는 그 현지인 투어에 합류하게 되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몰랐다. 작은 승용차에 타고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주시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이 클린턴 거리야."

"클린턴, 미국 대통령??"

"코소보 내전 종식과 독립을 이끈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인데 그 개입을 결정한게 바로 클린턴이거든. 클린턴은 코소보에게 일종의 영웅인셈이지."


고마운 마음은 알겠거니와 왕복 8차선 도로의 이름을 클린턴으로 붙이고 높이 3.5m의 금박을 씌운 동상을 건립하고, 힐러리의 이름을 딴 옷가게 까지 있는 모습은 좀 유난스러워 보인다. 1974년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에 의해 연방내 자치주가 인정되었던 코소보는 1989년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자 이에 반발해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의 분리독립과 무장 투쟁이 벌어졌고, 세르비아에 의해 끔찍한 인종 청소이 자행되었다. 히틀러에 비유되기도 하는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알바니아계 민족을 학살 및 강제 추방을 주도해 알바니아계 민족 중 86만여 명이 추방하고 8,600여명이 사망했지만 이후 나토의 개입으로 코소보 땅에서 청소를 당한 건 오히려 세르비아계 주민과 집시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현재 코소보는 다수의 알바니아계와 아주 소수의 세르비아계로 구성되어 있다. h가 문득 코소보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세르비아 사람이야? 알바니아 사람이야?'


그 질문에 코소보 친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세르비아 사람도, 알바니아 사람도 아니야. 나는 코소보 사람이야.'


외부의 전적인 승인은 받지 못했지만 '코소보'라는 독립국가로 거듭난지 7년 차 되는 해였다. 그 때 까지도 그들은 아직도 자신을 코소보인이 아닌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으로 나누고 분리하며 꼬리표를 붙이려는 사람들로 지긋지긋 했을 것이다. 통쾌한 답이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그라차니차 교회. 세르비아 정교회야"


그라차니차는 프리슈티나에서 약 5km 떨어진 곳으로 코소보 내 세르비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곳이고 세르비아 정교의 발상지인 그라차니차 교회는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성지로 여겨지는 지역이다. 둥그런 아치가 층층이 쌓여있고 아담한 첨탑이 그 위를 장식하는 교회는 13세기에 지어진만큼 고풍스러웠고 손 때 묻은 프레스코화는 꽤 인상적이었지만 우리를 사로 잡지는 못했다. 교회는 나를 전율시키지 못한다. 아, 유일하게 전율을 느꼈던 건 뤼데샤임의 힐데가르트 수도원이었을 까? 수녀님들의 글레고리안 성가는 정말이지 성스러워서 등줄기에 한 줄기 소름이 끼치면서 경외심까지 느껴질 정도 였으니. 나는 단순한 인간이라 즉각적으로 '오감'이 발동하는 곳에서 여행의 즐거움을 느낀다. 코소보 친구들은 굳이 입장하지 않고 30분 뒤 그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왕이면 같이 즐길 수 있는 어딘가를 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이 곳으로 우리를 이끈 h는 사뭇 감탄하는 표정으로 교회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좀 지루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목이 말라 들어간 인근 슈퍼에서 그녀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세르비아인 인가요?"


할아버지들은 조금 갸웃거리다 웃으며 맞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독립국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을 찾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여행지와 역사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위장한 그녀의 행동이 나는 자꾸만 '코소보 속 숨은 세르비아인 찾기' 게임으로 보였다. 다시 돌아온 코소보 친구들의 차에 탔다.


"아, 내가 꼭 너희를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어."


운전해서 간 곳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라키아 증류소였다. 증류소라고 하면 위스키나, 맥주 브루어리가 먼저 연상되어 나도 모르게 큰 규모를 예상했으나 이곳은 과연 술을 만들까 싶은 정도로 작은 집과 앞마당이 있는 곳이었다. 코를 찌르는 알콜 냄새를 맡으니 그제야 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족히 몇 백년은 썼을 법한 기스가 잔뜩 난 대형 솥에서는 자두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포도, 자두, 살구, 체리 등의 충분하게 익은 과일을 으깨고 설탕을 넣고 발효를 시킨 후 증류하여 만들어지는 술이 라키아다. 운이 좋게 증류 작업을 볼 수 있었다.

뚜껑이 달린 증류기와 드럼통은 긴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었고 발효된 원액이 끓고 기화되어 드럼통으로 이동하고 드럼통 위의 냉각 장치로 순수한 증류주가 받아 진다. 엄청난 설비는 아니고 오히려 엉성한 설비였지만 내가 낮에 마셨던 술을 만드는 걸 직접 보고 갓 증류된 술을 마셔보는 건 술꾼으로서 큰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라키아를 맛있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시내로 나가 보기로 했고 h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교외의 코소보 내전 최대의 격전지를 찾아가겠다고 해서 흩어졌다. 프리슈티나 중심가에는 거대한 뉴본(NEW BORN) 조형물이 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 그대로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하고 새로 태어난 걸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독립을 거머쥐고 승리감에 벅찼을 사람들의 얼굴이 글자 뒤로 보인다. 새로 태어난 나라는 실제로도 인구의 70%가 30대일 만큼 젊은 나라이기도 하다. 길을 걸을 때에도 나이가 든 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코소보 젊은이들로 가득 찬 거리를 걷고, 코소보 젊은이들로 왁자지껄한 가계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코소보의 다음 여행지인 프리즈렌에서 숙소를 알아보던 나는 단 한가지 문구에 매료되어서 바로 예약을 했다. “FREE BEER’ 공짜 맥주라니! 가난한 배낭 여행자지만 술은 무한대로 먹고 싶은 우리를 위한 곳이었다. 오후에 숙소로 도착한 우리는 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으며 프리비어 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프리즈렌은 조금은 삭막하고 새로 만들어진 프리슈티나보다는 정감가는 작은 시골 도시였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거실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페트에 든 맥주를 알아서 원하는 만큼 먹는 시스템이었다. 한 켠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이런 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여행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게스트하우스의 큰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재밌는 사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마치 무슨 매뉴얼이 있는 마냥 똑 같은 질문과 대답에 금새 피곤해 지기 마련이니. 그날 역시 매뉴얼의 수순에 맞게 대화가 진행되었다. 어디에서 왔니? 남한? 북한? 여행 얼마 동안 했니? 어디 어디를 다녀왔니? 여기에 얼마나 있을 거니, 다음에는 어디를 갈거니 앵무새처럼 답변을 하고 있으려니 바로 피곤이 몰려왔다. 이럴 땐 취하는 게 상책이다 싶은 나는 속도를 높였다. 한참을 마시다 게스트하우스 스탭과 몇몇 아이들이 마음을 모아 나가려는 채비를 했다.


‘우리 나가서 마실 건데 같이 갈래?


J는 몸이 안 좋다며 숙소로 올라가겠다 했고 나는 미친 듯 고민을 했다. 술을 계속 먹고 싶은 욕망과 혼자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했다. 하지만 술을 이미 마신 사람에게 술을 더 마시고자 하는 욕구보다 더 강한 게 있을까. 나는 자연스레 그들을 따라 동네 펍을 갔다. 맥주가 배가 부른 우리는 라키아를 시켰다. 맛없고 독한 술은 한 번에 먹어야 오히려 탈이 덜 나는 법이기에 나는 두 눈 꾹 감고 샷을 단숨에 마셨다.


“오오 잘 마시네?”

“원래 한국 사람들, 특히 한국 여자들은 술이 쎄”


뭐 자랑이라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야기했다. 이런 나를 보고는 게스트하우스 스탭인 미스터 차가 말했다.


“내가 진짜 특별한 라키야를 마시게 해줄게”

“뭔데?”


지금껏 먹어본 라키야들이 향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맛이라고 생각했기에 난 심드렁하게 답했다.


"뭘 기대하던 예상 밖일걸?"

검정 색깔의 술이 내 앞에 놓여졌다. 당연히 무색의 술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난 흥분한 채로 물었다.

“이건 뭐로 만든 거야?”

“이거는 왜 검정색이야? ”

“이게 정말 라키야라고?”


흥분해서 쉴새 없이 질문을 하는 나를 진정시키며 미스터 차가 말했다.


“잠깐만 진정하고, 나 이거 영어 이름이 뭔지 모르겠어. 찾아볼게. 기다려.”


그가 구글에서 검색해서 보여준 이미지는 호두였다.


“호두??? 호두로 라키야를 만든다고??”

“응, 이것은 정말 놀라운 맛이야. 말은 그만하고 직접 먹어봐”


나는 호두 라키야를 집어서 단숨에 입에 털었다. 그리고 입안에서 그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오래 숙성된 와인을 먹는 듯 진득진득 깊으면서도 달콤한 과일 맛이 입안에 맴돌다가 끝에는 기름지면서 고소한 맛이 내 입안을 적셨다. 살면서 처음 먹는 맛이었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깊은 감동이 몰려왔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소리쳤다.


“뭐야? 이 술은? 정말 어메이징해”

“몇 달 전에 라키아 축제를 여기서 했었거든, 그때 빚은 술이야. 이걸 먹을 수 있다니 넌 행운인걸?”


나는 그 놀라운 맛을 더 탐구하기 위해 연거푸 들이켰다. 샷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복잡하고 미묘한 호두의 맛이 나를 사로잡았다. 어둠이 깊숙이 자리잡고 노란 조명이 도시를 덮고, 조용한 거리에 우리의 떠들석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연거푸 호두 라키야를 마시며 지금 여기서 이 술을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나는 의기양양하게 J를 데리고 전 날의 호두 라키아가 파는 아담한 펍으로 향했다. 그녀는 나만큼 아니 나보다도 더 그 맛에 감탄했다. 라키아는 코소보 뿐만 아닌 발칸 반도 전역에서 즐겨먹는 술이고 이름은 조금씩 다은데 라키야, 라키아, 라키 등등의 고만고만한 이름이다. (알바니아어 : rakia ; 불가리아어 : ракия , 로마자 표기 : rakiya ; 그리스어 : ρακί , 로마자 표기 : rakí [raci] ; 터키어 : rakı (/ rɑːˈkiː /, / rɑːˈkuː /, / rɑːˈkɜːr /); 크로아티아어 : rakija / ракија[ˈrǎkija] ); 마케도니아 어 : ракија , 로마자 표기 : rakija)


일반적인 라키아는 우리가 먹은 독한 증류주이지만 가장 일반적인 자두와 포도 라키아를 증류 후 허브, 꿀, 사워 체리, 호두와 같은 다른 재료와 혼합되어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나라 별 기후나 특산 과일에 따라 여러 변종 혼합 라키아를 만든다. 호두 라키아의 맛에 반한 이후로 우리의 발칸 여행은 '라키아 맛 정복하기'가 되어버렸다.

이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마신 라키아의 메뉴판이다. 50ml 한 샷에 비싸도 3,000원(지금 환율)을 넘지 않는다. 꿀 라키라도 달달하니 좋았고 체리의 새큼함을 품은 체리 라키아도 좋았지만 늘 우리의 원픽은 호두 라키아였다. 호두 라키아를 시장에 350ml 병에 파는 걸 발견하고는 뛸 듯이 기뻐하고 두 손 가득 사서 한국에 가져가기도 했었다. 이 여행이 벌써 6년이 다 되어가니 호두 라키아의 맛은 사실상 완전히 잊었다. 그래도 발칸을 생각하면 여러 풍경과 많은 사람이 스쳐가는 와중에 고소한 호두 라키아의 끝 맛이 느껴져 꿀꺽, 군침을 삼키게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