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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May 12. 2021

나의 다정하고 그리운 단골바, 람파스

"에게스쉐키라!"


새로운 나라의 친구들을 사귈 때 내가 가장 먼저 물어보는 말은 '건배'이다. 오고 가는 '건배' 속에 쌓이는 정만큼 쉽고 빠른 게 없으니까. 대부분 언어의 '건배'는 길지 않다. 두음절에서 세음절이 일반적이다. 모르긴 몰라도 빨리 술잔을 부딪히고 술 먹기 바쁜데 길게 건배를 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삶의 지혜가 녹아있지 않나 싶다. 얼마나 마음이 급하면 한국 사람들은 '건배'를 '짠'으로 줄여서 한 음절로 해결하고 있지 않은가. '에게스쉐키라'라는 여섯 음절의 헝가리어 '건배'를 처음 들었을 때 한 대 맞은 것처럼 띵했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해서 비슷하게 말하느라 대여섯번을 다시 들었으며 가까스로 비슷한 발음을 하고는 바로 까먹어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다. 길이도 길이거니와 말 자체도 입에 전혀 달라붙지 않고 전혀 흥이 나지 않기에 도무지 '건배'라는 말 같지 않았다. 그래도 부다페스트에 머무는 동안 한 번은 꼭 써먹겠다는 마음으로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해놨다.

부다페스트에 있은 지 2주 정도 지나니 헝가리의 전통술 팔링카를 이제는 마셔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하루는 꼭 마셔보겠다 마음을 먹고 요리조리 시내를 누비다 팔링카를 저렴하게 파는 작은 바를 찾았다. 금발 머리를 높이 묶고 뿔테 안경에 링 귀걸이를 한 여주인은 나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바라곤 했지만 사실 바라기보다는 주점의 느낌이다. 길가다 누구나 부담없이 들어가 맥주 한잔 정도 들이킬법한 그런. 색색의 영롱한 술병들이 줄지어 있고 나는 고심하다 그 중 사과 팔링카를 첫 잔으로 시켰다.

“395포린트.(1,580원)”

“다 먹고 한꺼번에 카드로 계산하면 안 될까요?”

“노, 온리 캐시”

현금이 별로 없어서 카드로 계산하고 싶었건만 야박하게 그지없다. 팔링카는 가히 노골적이다. 한 입도 아닌 입술만 적셔서 맛을 보는데 ‘제가 40도의 알코올입니다만…’하며 자기주장을 해댄다. 당연히 싱그러운 사과 냄새가 강하게 날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다. 독한 알코올 향에 아련하게 풋사과 냄새가 스칠 뿐이다. 팔링카는 발칸에서 먹었던 라키아와 흡사하다. 배, 자두 살구 등 과일을 증류시켜 만든 브랜디라는 것도 도수가 높은 것도. 이름만 다르고 생김새와 맛과 만드는 방법이 비슷하다는 데서 우리나라의 만두, 일본의 교자, 중국의 자오쯔를 떠올리게 한다. 헝가리를 비롯한 발칸 국가들에서 서로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한다고. 찌르르르 독한 알코올 뒤 단맛이 스르르 입 안에 퍼진다. 하지만 단맛의 여운을 즐기기에는 찌르는 알코올이 강하다. ‘어우, 독해 독해.’ 하면서도 다른 맛이 궁금해진다. 위스키와 마찬가지로 공기 중에 두니 알코올향이 날아가 좀 더 먹기 쉬워진다. 찌르는 맛이 좀 날아간 팔링카는 길이 든 야생 망아지 같다. 여전히 거칠지만 부드러워서 다루기가 힘들지는 않다.


마트에서 라키아를 쉽게 찾아볼 수 없던 것과 달리 헝가리에서는 팔링카를 마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맛도 다양하고 브랜드도 여러가지이다. 나는 두 번째로는 마트에서 가장 자주볼 수 있는 브랜드 퓨툴러스의 블루베리 팔링카를 두 번째 잔으로 시켰다. 사과 팔링카와는 반대로 이 술은 끈적한 단맛이 압도적으로 입 안에 맴돌다 알코올이 마지막에 ‘저를 잊지는 않으셨죠?’ 하며 불현듯 나타난다. 달아서 먹기 쉬운데다 돗수도 높아 은근 취하니 정말이지 가성비가 좋아도 너무 좋다. 마지막 잔으로는 아몬드 팔링카를 먹었다. 한입을 마시니 견과류의 고소함과 단맛이 입안에 퍼지는데 혀가 마비될 정도의 단 맛이라 내 입에는 맞지 않았다.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서너명 밖에 없던 바는 어느새 여행객과 동네 단골들도 바글바글하다. 바쁜 주인에게 두 손을 흔들며 격하게 인사를 하며 나오는데 그녀는 무뚝뚝하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잘가라고 인사를 건낸다. 그 무심함이 그 가게와 잘어울려 마음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아직 밖은 푸른 빛이 성긴 초저녁이었다. 해질 녘 어슴푸레하고 몽롱한 시간을 걸어오니 왁자지껄한 밤의 시간으로 진입한다. 낮술로 시작했으니 이제 밤술로 이어갈 참이다.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부다페스트는 언덕 위의 부다 지구와 낮은 페스트 지구로 나뉘어져 있다. 부다는 왕궁, 어부의 요새. 교회 등의 오랜 유물들이 밀집하며 옛날에 귀족과 왕족들이 살았던 부촌이라면 페스트는 서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구분은 없다. 부다페스트에 한 달 넘게 있던 내게 부다는 관광 지역이고 페스트는 삶의 터전일 뿐이다. 나는 대부분 데악 광장에서 아스토리아 역 사이에서 머물렀다. 그곳이 가장 번화가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혼자 술을 늦게까지 먹고 안전하게 집에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술집 밀집지역에서 사는 것이니. 나는 간단한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와 그 근처의 '람파스 스튜던트 펍'으로 향했다. 구글 평점도 좋았지만 이름에서 풍겨오는 훈훈한 기운이 좋았다. 학생을 정면으로 내세운 가게가 비쌀리는 없으니까. 딱 한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검정색 철문이 열려있고 그 위에는 lampas라고 적힌 성의없는 네모난 간판이 있다. 간판의 램프 그림으로 람파스의 뜻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좁은 계단으로 걸어내려가니 동굴 같은 지하 바가 있고 공연을 하는 작은 무대도 있다. 바에는 사람들이 술을 사려고 북적거리고 작은 공연장에 있는 스무석 남짓의 좌석은 꽉꽉 채워져 있다. 작고 북적이는 분위기에 이미 기분이 들뜬다. 메뉴를 한참을 보다 고른 술은 유니쿰이었다. 자고로 여행에는 테마가 있어야 몇 배는 더 즐거운 법! 오늘의 바 투어 테마는 '전통 술'이다. 헝가리 대표 전통주인 유니쿰은 무려 40개가 넘는 약초로 만들어 오크통에 숙성하는 술이다. 유니쿰을 처음 본 건 베오그라드에서 부다페스트를 도착하자마자 들른 중앙 시장에서였다. 빨간 원안의 노란 십자하며 초록 병으로 보이는 검고 진득진득한 모습하며 예거마이스터가 바로 떠올라 굳이 도전하지 않았던 술이다. 예거마이스터 만큼 달고 강하지는 않은데 느낌이 비슷하고 씁쓸함이 더 강하다. 샷으로 먹자니 진짜 감기약을 털어먹는 느낌이 들었는데 애초에 약용으로 개발되어 소화제로도 쓰며 위장을 진정시켜주기도 한다고.

독주만 연거푸 마셨더니 목이 말라 맥주를 마시며 크지 않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술을 고르고 마시느라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음악이 또렷하게 들어온다. 경쾌하면서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그런 재즈 음악이다. 고개와 발가락이 어느 순간 리듬에 맞게 까닥까닥 움직이고 눈을 감고 음미하게 되는 그런 음악이었다. 처음 람파스를 간 날은 재즈였지만 어느 날은 레게가 어느 날은 소울풀한 흑인 음악이 공간의 무드를 바꾸웠다. 한국이든 외국이든 아주 가끔 라이브바를 가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작은 규모로 공간 자체가 조금의 빈틈없이 음악으로 들어찬 곳은 처음이다. 꽉꽉 들어찬 음악은 생동감있게 고막에 꽂혀 내가 서 있는 공간을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즈나 자메이카로 이동시켜줬다. 오해하지 말야할 것은 그곳이 엄청난 뮤지션들이 소름끼치는 연주와 노래를 제공하는 곳은 아니라는 거다. 지역의 작은 밴드 혹은 원한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오픈 마이크'시간까지 있어 가끔은 웃음이 나올 법한 어설픈 연주와 노래도 있다.

여행을 왜 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낯선 곳을 떠다니는 것일까? 마음 붙일 곳 없이 긴장되는 나날 중 불쑥 오랫동안 알았던 것 처럼 나타나는 다정한 공간을, 다정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내가 길에 서 있는게 아닌가 람파스에서 눈을 감고 생각하곤 했다. 매일 다른 노래로 채워진 그 공간은 아는 사람 하나 없어도 홀로 표류하지 않았다. 노래 마다 달라지는 파동을 모두 함께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즐겼다. 대범한듯 은근 소심한 나는 특히 혼자 밤문화를 즐길 때내가 이 공간에 어울리는지를 가늠하고 눈치보다가 불편해서 금방 자리를 뜨기도 하는데 신기하게도 여기서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세상에 술 마실 곳은 많고 값비싼 술이 진열대를 어마어마하게 채운 곳도 있고 휘황찬란하거나 독특한 인테리어로 입은 물론 눈까지 즐겁게 하는 곳도 많다. 마음 편히 그 곳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람파스는 내게 그런 공간이었다.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

"맞춰봐. 어디일거 같아?"

"태국?"

"아니야. 한국 사람이야. 그럼 너희는 어디에서 왔어?"

"맞춰봐."

"사실 난 니네가 한국 사람인줄만 알았어. 혹시 홍콩?"

"아냐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이야."


하루는 람파스에 있던 세 명의 아시아 여자아이들이 말을 걸어왔다. 오랜 바다 여행으로 피부가 구릿빛으로 변해있었던 나는 동남아 사람처럼 보였고, 뿔테 안경에 얼굴이 하얗던 베트남 아이들은 동북아 사람처럼 보여서 서로의 국적을 쉽게 맞추지 못했다. 우리는 사소한 수다를 떨었다. 귀여운 아이들은 얼굴을 붉히며 BTS를 좋아한다는 말도 했다. 소녀같은 그들의 재잘거림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 아이들에게 술을 한 잔씩 샀다. 람파스는 3잔의 술을 사도 주머니에 큰 무리가 가지 않는 그런 곳이 없기에 이런 선심도 가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뒤져 헝가리의 건배 '에게스쉐키라'를 기억해내 같이 외치자고 했다. 그들은 그 말을 처음 들은 그 때의 나처럼 몇번이고 묻고 되뇌였다. 그리고 람파스 바에서 동양인 여자 넷이 잔을 높이 들고 "에게스쉐키라'라고 같이 외쳤다. 헝가리에서 건배를 외칠 때면 꼭 눈을 마주치며 눈빛을 교환하며 해야한다는 말처럼 나는 나보다 열살은 어려보이는 귀여운 아이들의 눈을 오래 마주보며 '에게스쉐키라'라고 외쳤디. 이 긴 건배는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을 더 다정하게 오래 마주보기 위해서라는 걸 그때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 내 다정한 단골 바 람파스가 못견디게 그리워 검색을 해보니 그곳이 버스킹 음악여행 <비긴 어게인, 부다페스트 편>에 나온 걸 알게 되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유튜브에서 그 음악을 찾아 플레이 했다. 손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지긋이 미소를 지으며 공연을 바라보는 관객의 모습이 너무 나 같아서, 즉석에서 합류한 현재 밴드의 베이스가 즉흥적인 연주가 다정해서,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부다페스트에 간다면, 갈 수 있다면 그 이름처럼 어둠 속에서 빛을, 추위에서 따뜻함을 주는 람프스를 가장 먼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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