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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현실을 대처하는 법

단순함의 힘: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에 집중하자.

by 용PD

요즘 나는 두 개의 무거운 짐에 눌려 있다.


첫째는 업계 불황이다. 드라마 산업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 제작 프로그램 수는 줄어들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해진다. 큰 물줄기는 더 거대해지고, 작은 개울은 말라간다. 약육강식의 현실이 차갑게 다가온다. 드라마 연출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현장은 점점 낯설어진다. 이제는 무대를 떠나 객석이 내게 주어진 자리일까? 이런 질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른다.


둘째는 나이 듦의 부담이다. 나침반의 바늘이 예전만큼 정확하게 북쪽을 가리키지 않는 느낌이다. 트렌드를 놓치지 않을까, 내 연출이 구닥다리로 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돌고 돈다. 예전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이 더 크다.


이 두 가지 짐에 눌려 있던 어느 날,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를 붙잡았다. 한 사람은 잔디 위에서 선수들의 마음을 돌보는 스포츠 심리학자였다. 또 한 사람은 모니터 위에 이야기를 그려가는 만화가 윤태호였다. 서로 다른 분야였지만, 그들이 건넨 말은 마치 내 고민에 대한 답변처럼 들렸다.


패배 앞에서 배운 것


'웰컴투 렉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할리우드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와 롭 매킬헤니가 영국 웨일스 북부 소도시 축구팀 렉섬 AFC를 인수해 재건하는 과정을 다룬 내용이다. 시즌3에서 렉섬이 5대 0으로 참패를 당한 에피소드가 있다. 절망적인 패배 앞에서 선수들은 좌절했고, 팬들은 실망했다. 이때 등장한 팀 스포츠 심리학자 샘 코디아(Sam Kodia)의 조언이 내 첫 번째 고민과 묘하게 겹쳐졌다.


"어려운 현실을 맞이하고 좌절한다면, 그 실망감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변화를 받아들인다면 회복력이 생긴다. 성공하는 선수는 매사에 전념하고 노력하며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 불확실성이야말로 스포츠와 인생의 본질이다."


이 말이 특히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까지 불확실성을 적으로 여겨왔다. 안정적인 수입과 예측 가능한 프로젝트를 갈망하며 불확실성에 저항해왔다. 하지만 창작 자체가 불확실성의 연속 아닌가. 어떤 작품이 성공할지, 어떤 연출이 기억에 남을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오히려 재미없을 것이다.


업계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OTT 플랫폼의 부상, 웹드라마의 다양화 등은 기존 방송계에는 위기지만 창작자에게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회복력과 강한 정신력을 가진다는 것은 오히려 변화에 흔들리지 않을 때 가능하다. 그것이 꾸준한 성과를 내는 길이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었다.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업계가 변한다면 나도 함께 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근본은 잃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지 말고, 실수에 매이지 마라.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집중하라. 경기를 앞두고 생각을 많이 하지 말 것. 최소한의 사고. Less is More."


이 조언이 가장 실용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생각했다. 시청률, 화제성, 업계 평가 등 결과에만 집중하며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쳤다. 좋은 장면 하나, 의미 있는 대사 한 줄, 배우와 만드는 순간의 감동 같은 것들 말이다.


나이 듦의 새로운 의미

두 번째 고민에 대한 답은 윤태호 작가에게서 찾았다. 최근 '언더스탠딩'에 출연한 그의 인터뷰는 나이에 대한 내 관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윤태호 작가는 나이 들어가는 창작자로서의 고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젊은 척하지 말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이 든 연출은 젊은 감각을 따라잡으려고 애쓴다. 최신 트렌드를 흉내 내고, 젊은 연출자의 스타일을 찾아본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오히려 내 고유의 색깔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젊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나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시간이 주는 깊이에 대한 믿음 말이다. 윤태호 작가의 두 번째 말은 더욱 구체적이었다.

"나이가 든 만큼 업계에 대한 통찰력은 생긴다. 내 작업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고 가야 한다. 어쨌든 시작하면 예전의 그 리듬이 다시 찾아와서, 내 새로운 작업에 그 리듬을 다시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어쨌든 시작하면"이라는 말이 특히 위로가 되었다. "예전의 그 리듬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표현도 인상 깊었다. 창작자에게는 고유한 리듬이 있다. 과거 열정적으로 작업했던 그 감각, 몰입했던 그 순간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그 리듬을 잃은 건 아니다. 잠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망설이지 말고 일단 시작하는 것이다.


단순함의 힘

결국 두 고민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불안감 말이다. 하지만 샘 코디아와 윤태호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깨달았다. 문제는 불확실성 자체가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나의 태도였다.

업계 변화를 적으로 여기며 저항할 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이 듦도 마찬가지다. 젊은 감각을 잃는 게 아니라, 각 시기마다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것이다.

"최소한의 사고. Less is More"라는 조언을 다시 떠올린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 집중하자. 결과보다는 과정에, 성취보다는 성장에, 증명보다는 표현에 집중하자.

창작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생각과 불안에 휩쓸릴 때일수록 단순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마음,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의지. 그런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목표 말이다.

불안한 미래에 대처하는 법은 결국 단순하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불확실성을 인정하며,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각 시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과정 자체를 즐기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현실이 불안해 보일 때에도 내 안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다른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일지도 모른다. 불확실하기에 더욱 흥미진진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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