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꼰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첫째, 더 이상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멈추었을 때
인간은 누구나 성장 가능한 존재라는 교육학의 전제는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완전한 존재인 양 행동하게 될 때 더 이상의 성장을 포기한 꼰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판단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난 책을 좋아해. 배우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니 꼰대가 아니야."
과연 그럴까요? 독서를 좋아한다고,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꼰대의 늪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도식(schema)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이 도식은 학습하면서 확장되기도 하고 심지어 새로운 도식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도식이라는 것을 통해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꼰대에게는 학습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만들기는커녕 기존의 도식만으로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게 마련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꼰대들은 보통 타인의 생각을 내 식대로 해석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화가 헛돌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신가요? 바로 이 경우입니다. 성장하고 싶은 욕구란 바로 공부할 때만큼은 나의 불안전함을 인정하고 나를 일단 배제할 줄 아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둘째, 관심의 초점
이러한 꼰대의 특성 중 하나는 '타인의 생각이나 의도'보다 '내 생각에 비추어 같은지 다른지'에 먼저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타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면 '왜 다른 점으로부터 배움을 구하기보다 그것이 왜 ‘틀린지’에 대한 이유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꼰대는 자기방어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틀린 것을 인정하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제 완전한 존재이니까요. 물론 말이나 생각으로는 그것을 부정하겠지만 더 이상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배우는 일에 게을리한다는 것이 자신이 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상대가 나와 다르다면 꼰대는 다른 이유를 찾기보다 상대가 왜 틀린지를 찾아내려고 하는 이유는 후자가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흔히, 자기 합리화라고 하지요.
셋째, 권위에 굴종
그렇다고 꼰대들이 모든 사람의 말에 귀을 닫는 것은 아닙니다. 꼰대들은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약점이나 틀린 점을 지적하고 싶어하지만 반대로 자기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은 정말 잘 듣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에 매우 취약합니다. 대표적으로 자기보다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의 말은 들으려하지 않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러한 태도는 주로 학생 때)이나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은 정말 잘 듣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부정하는 일은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못한 것을 이룬 사람이 한 말이니 당연히 맞겠지?"라는 아주 자기방어적 태도이지요.
또 하나, "우리 대통령은 무엇이든지 잘 알까요?"
흔히, 어떤 분야에서 지위가 높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 분야 이외에서는 인정 받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분에게서 그 분의 전문분야 이외의 말은 걸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실 초등학생에게서 자주 보이죠. 선생님은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다 아실 것이라는 믿음은 초등학생에서 보이면 아주 귀엽지만 다 큰 어른들에게서 보이면 매우 끔찍합니다(제가 끔찍하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한 마디로, "대통령의 딸이니 얼마나 정치를 잘 하겠어? 혹은 저 큰 대기업의 재벌의 자제이니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겠어?"라는 태도가 우리나라를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인정할 수 없는 것
그런데 아무리 상대를 존중하려고 해도 상대로부터 배우려고 해도, 존중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움 자체에 대해 부정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배움이란 나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 원인을 되돌아보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게다가 개인적 정황상 배움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인정하나 이를 합리화하는 태도, 심지어 배움의 무용론을 제기하는 태도는 더더욱 존중할 수 없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이 틀리다고 할 수 없지만, 타인의 생각을 배척하고 배움을 거부하는 태도만큼은 틀린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