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Jun 14. 2024

안개

-단편소설 습작 3

   1

     

   나는 군산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 내에 마련된 대기실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수다를 떨고 앉았다. 얼마 전에 시집을 간 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장례식에 함께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연까지 저마다 복잡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내 귀에 사람들 각각의 사연이 흘러들어온다. 

  세상만사 사연이 없는 사람이 있으랴. 나는 가장 편한 자세로 남은 시간을 보내고자 팔짱을 끼도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귀에 이어폰을 꺼내 꽂았다. 곧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따라 부르며 흥얼거리고 있자, 거짓말처럼 대기실 밖으로 눈이 내린다. 아침에 길을 나설 때 날이 밝아 눈이 내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눈이 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올해 첫눈이 내리자 휴대폰을 꺼내 저마다 사진을 찍어서 누군가에게 사진이 담긴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군산행 버스가 대기실 앞 승차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버스에 승차했는데 나도 그 무리에 끼었다. 십 분 정차 후 버스가 출발했다. 천천히 도심지를 가로지르던 버스는 곧 도시를 벗어나 외곽 국도를 달렸다. 차창 밖으로 겨울의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어느새 국도 주변에 펼쳐진 논바닥에도 눈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도적처럼 나타난 낫에 모가지를 잃은 벼들이 허리가 부러진 채 말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마다 바람에 차인 눈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좌석 등받이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고 버스 엔진의 공회전 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아버지가 출소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이주 전이었다. 나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교무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액정화면에 엄마의 전화번호가 떴다. 나는 평소처럼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에서 엄마의 떨리는 호흡이 들렸다. 무슨 일인지 불안해질 때 엄마가 말을 꺼냈다. 

  “민석아, 네 아버지가 …… 출소한데.”

  “……”

  “민석아! 듣고 있어?”

  “아 … 아버지? …… 잘못 들은 줄 알고. 아버지는 …… 언제쯤 출소한다고 그래?”

  “이주차 금요일…….” 

  엄마의 목소리에서 묘한 울음이 섞인 떨림을 느꼈다.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뒤섞여 복받친 것 같았다. 내가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말없이 엄마의 말을 듣기만 했다. 엄마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며칠 전 교도관에게 연락이 왔는데, 간단한 신원조회가 끝나고 아버지가 출소할 날짜와 출소일에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해달라고 연락이 왔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에게 언제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제야 전화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쁨의 감정보다는 ‘이 일이 기뻐해야 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였다.     



   2

     

  아버지는 1950년 6.25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이 절정에 달하던 1958년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월남민으로 과거 이북에서 연탄 공장을 운영했다. 그 시절 연탄을 태우지 않는 집은 없었기에 할아버지는 꽤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인생은 요지경인지라, 1950년 6.25전쟁과 함께 할아버지는 공산당을 피해 이북에서 월남했고 한순간에 난민 신세가 되었다. 

  당연히 전 재산을 잃고 전쟁통에 어떻게든 목숨만 부지해 떠돌다가 1953년 전쟁이 끝난 후 정착한 곳이 바로 서울의 신촌이었다. 말은 제주도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가라고 했던가. 전쟁이 끝난 후 할아버지는 서울 신촌에 터를 잡았다. 할아버지는 과거 이북에서 연탄 공장을 운영했던 실력으로 이번에는 연탄 공장에 취직해 돈을 모았고, 할머니를 만나 결혼해 두 아들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분이어서 가족들의 호구를 책임지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할아버지가 번 돈으로 네 식구가 먹고사는 일은 어려웠다. 그래서 할머니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옷을 수선하거나 아니면 빨래를 대신해 주고 품삯을 받았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 큰형만 집 안의 기둥이라고 챙김을 받자, 화가 나서 여러 번 가출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동네를 쏘다니다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집에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했고, 가출했던 아버지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모르는 척을 하였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무시험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도통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아버지는 학교를 안 가고 동네를 쏘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방랑벽이 있었고 이 같은 기질은 바뀌지 않았다. 훗날 엄마와 결혼한 이후에도 말없이 제멋대로 밖으로 돌다가 뻔뻔하게 집에 들어오고는 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아버지의 시련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별세로 인해 큰아버지는 다니고 있던 모 대학을 그만두고 H건설 회사에 취업했고, 애초에 공부는 관심 없었던 아버지는 술집 보이 일을 하였다. 특출난 재주가 없고 공부도 마치지 못했던 아버지였지만 자존심은 세었다. 술집에서 보이 일을 했으나 자존심 때문에 손님이 자신을 업신여긴다 싶으면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자주 다른 술집과 여러 공장에 전전하며 일을 했다. 하지만 워낙 사교성이 있는 성격이 아닌지라 아버지와 대화하거나 일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아버지가 활달한 성격의 어머니와 만나 결혼한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 말도 없고 무뚝뚝한 남자가 어떻게 엄마의 마음을 훔쳤는지 지금도 나에게는 미스터리이다. 

  엄마는 대뜸 아버지가 기차역에서 자신에게 다가와 이 기차역에서 당신이 가장 아름답다며 꼭 한 번만 만나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낸 것인지 알 수 없다. 엄마는 아버지의 용기가 가상해 한 번 만났다가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사람 같아서 열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

  1983년에 아버지와 엄마가 결혼한 이후 내가 태어났고 사춘기 무렵부터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나에게 “네가 뭘 알아?”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1970년 유신 시대에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1980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에는 전두환 정권에 맞선 6월 항쟁을 목격했으며, 1997년에는 IMF 외환 위기를 경험한 아버지에게 나의 사춘기는 아주 사소한 철모르는 시절의 일에 불과했다. 

  대화할 때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네가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하라는 데로 너는 해라.’와 같은 암묵적인 답이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고집을 피우면 뒤로 무르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결정한 일은 어르고 달래서라도 밀어붙여서 하고야 마는 성미였다. 비록 그 고집의 결과가 시원찮아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남의 말을 듣지 않던 아버지는 가게를 무작정 차려놓고 장사가 되지 않아서 망하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참다가 못해 당신은 장사 체질이 아닌 것 같으니 어디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해도 화를 내기만 했다.

  “이 여편네가, 내가 나만 잘 살자고 그래! 우리 가족 전부 잘 살자고 하는 짓이잖아!”

  “그래도 지금 좀 상황이 …….”

  엄마가 말을 덧붙이면 갑자기 손으로 근처 무엇이든 집어 들어 벽에 내던지고는 했다. 그리고 휙-하고 밖을 나가서는 며칠씩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점차 엄마의 마음이 불안해질 무렵이면 아버지는 집에 들어와 뻔뻔하게 밥상을 좀 내오라고 했다. 엄마는 화가 났지만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심정으로 밥상을 아버지에게 차려주었다. 

  때로는 아버지의 가출이 통하지 않고 도리어 엄마가 화가 나서 외가로 내려가 버린 적도 있다. 아버지는 일주일을 참다가 외가에 찾아가 외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엄마를 어르고 달래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약발이 먹혀 좀 잠잠하나 싶으면 아버지는 이내 떡하니 상가 계약을 맺고 일을 벌였다.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다가 망하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고, 다시 장사하다가 망하면 빚을 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결국 사달이 났다. 



  3     


  아버지가 은행에 진 빚이 반복된 투자와 사업 실패로 눈덩이처럼 늘어서 되돌아왔다. 아버지는 급한 빚부터 상환하기 위해 예전에 자신에게 돈을 빌린 지인을 찾아갔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언성이 높아진 끝에 사고를 치고 말았다. 아버지와 지인이 서로 엉켜서 멱살을 잡고 싸우다가 아버지가 지인의 몸을 밀쳤는데, 그만 지인의 몸이 벽에 부딪혀 넘어져 식탁 모서리에 목이 걸려 부러진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절명하고 말았다.

  나는 원망보다 황당함이 앞섰지만 벌어진 일을 먼저 수습해야 했다. 집 전세금은 물론이고 친척들에게 빌린 돈마저 모두 아버지의 재판에서 사용해야 했다. 변호사 비용과 재판을 열기 전에 걸어야 하는 공탁금 그리고 이후 피해자들과의 합의금까지 그 과정 전부가 전부 돈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죄가 무서워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무서워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재판에서 십 년 구형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날 아버지에게 나는 묻고 싶었다. 

  ‘항상 그렇게 뭐든지 잘 아시는 분이 이번에 왜 그러셨어요?’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묻지 못했다. 재판장에서 굽은 등으로 앉아있는 남자를 말없이 지켜보아야 했다. 아버지가 없더라도 나와 엄마는 여전히 세상에 남겨졌고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가 떠맡기듯 남기고 간 빚과 경제적 궁핍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난 지금도 왜 엄마가 그 일이 있은 다음에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어도 엄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외가로 내려갔던 것처럼 돌아보지 않고 떠나도 괜찮았을 텐데. 아버지의 재판이 끝나고 엄마는 큰이모와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놈은 왜 그랬다니? 어휴. 내가 복장이 터져서. 야, 이년아! 그놈하고 헤어져. 그런 놈 뭐가 좋다고 이러고 사냐?”

  “언니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마. 내가 혼자야? 나만 살면 끝이야? 민석이는? 재도 결혼하고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데, 엄마까지 없다고 해봐. 언니도 답답하네.” 

  “…… 그럼 어째. 이 년아. 네가 불쌍해서 그렇지. 흐흐흑”

  “뭘, 어째. 끝까지 버티는 거지.”

  이때 엄마는 단호히 말하며 혼자서 술을 마셨고, 큰이모는 엄마 대신에 대성통곡을 하다가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건너방에서 조용히 모르는 척을 하고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방문 밖의 대화를 들으며 어쩌면 엄마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바로 ‘나’라는 장애물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성년의 나를 엄마가 굳이 책임을 질 필요는 없었다. 아마도 당시 엄마가 책임지고자 생각했던 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세상과 당면하고 살아갈 미래였던 것 같다.

  하지만 한 인간의 의지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기 쉬웠다. 엄마는 동네의 한 국밥집에서 일을 하다가 아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엄마의 얼굴을 알아본 친구가 대뜸 재수 없다고 말하며 일행과 수군거리다가 다른 가게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엄마는 충격을 받았고 그 친구의 머리채를 잡아주지 못해서 아쉽다며 이를 갈다가 혼자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서였을까? 술기운에 갑자기 자기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통곡하다가 천장에 끈을 묶어 목을 매었다. 그런데 천운이었는지 끈이 낡아서인지 엄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끈이 끊어져 엄마의 자살 시도는 미수로 끝났다. 

  엄마는 바닥에 몸이 쿵 하고 떨어졌을 때 깨달았다고 한다.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삶이란 것을 말이다. 그날 이후 엄마는 댄스 학원을 끊고 시간만 되면 춤을 추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국밥집에서 일을 하고 퇴근할 때면 반드시 댄스 학원에서 춤을 추고 집에 와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다.

  “엄마. 왜 그렇게 춤을 춰?”

  “몰라. 미친 듯이 추고 나면 머릿속이 비워져. 그저 몸만 살아있는 거야. 나는 사라지고. 민석아, 너도 머리 아프면 이렇게 흔들어봐.”

  엄마는 휴대폰으로 설운도의 노래 ‘사랑의 트위스트’를 크게 틀고 춤인지 흐느적거림인지 모를 어떤 움직임들을 선보였다.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난생처음 그녀를 알았고~~~’

  “민석아, 너도 해보라니까. 이렇게, 이렇게 …….”

  나도 엄마의 권유에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우리 모자는 노래에 맞춰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몸을 쓰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팔과 다리가 꺾이며 일어나는 신체의 반동뿐이었다. 그 반동에 몸을 맡기면 심장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마치 날아갈 것 같았다. 어디든지 이 세계를 넘어서 나를 던져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껏 몸을 쓰고 나자 금방 땀이 흘렀고 나와 엄마는 지쳐 바닥에 쓰러졌다.

  “어때?, 좋지?”

  “헉헉, 힘드네…… 힘들어.”

  내가 지쳐서 숨을 헐떡이며 말하자 엄마가 웃어댔다.

  “민석아, 엄마 나중에 댄스 스포츠 강사라도 할까?”

  “크크큭. 엄마, 인간적으로 너무 욕심내는 것 아냐. 엄만 딱 봐도 몸치인데. 댄스 스포츠 강사가 무슨 말이야.”

  “야, 나도 뭐 하나라도 인생에서 좋아하는 것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좋아하는 것?”

  “응. 정말 좋아하는 거. 잘하면 좋겠지. 그런데 그냥 좋아하는 거. 그래야 내 인생도 좀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

  엄마는 누워있다가 일어나며 냄비를 집어 들고 말했다.

  “민석아, 라면 먹을래?”

  “오케이, 콜!”    

  


  4

     

  어느새 버스 밖 이정표에는 군산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군산에 진입하자 앞서 지나온 전주보다 더 거세게 눈이 날렸다. 군산은 항구 도시로 서해를 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날씨가 바닷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눈발도 굵고 거셌다. 

  바닥에 쌓인 눈 때문에 도로가 미끄러워 느릿하게 버스가 달리는 바람에 도착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었으나 군산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정류장에는 승객들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날이 궂어서 그런 것 같았다. 정류장을 나서자 곧 입구 근처에 정차한 택시들이 보였다. 어렵지 않게 택시를 타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군산교도소요.”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나를 쓱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택시 기사는 미터기의 주행 버튼을 누르더니 차를 몰았다. 자동차에 운전석 부근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이 군산 외곽 도로 방향으로 안내해 주었다. 시원하게 차가 달리더니 곧 군산의 옛길들이 나타났고 서해 항구가 보였다. 항구에는 나란히 서 있는 배들이 부둣가의 말뚝에 묵인 채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밧줄에 묶인 배들은 정박지를 벗어나려고 목에 힘을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택시가 항구를 지나자 교도소로 진입하는 길목이 나타났다. 택시가 교도소 근처에 거의 도착했을 때는 진입로가 막혀있었다. 눈이 많이 내려 택시가 더 이상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교도소로 가는 길이 좁기도 했고 눈 때문에 자동차 뒷바퀴가 헛도는 차량도 보였다. 그래서 다른 자동차들도 입구 근처에서 비상 깜빡이를 켜고 정차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택시 안에서 다른 차들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한정 없이 흘러서 요금을 계산하고 교도소 입구 근처로 직접 걸어가기로 했다. 눈을 맞으며 교도소 입구로 갔다. 질퍽하면서도 눈길은 미끄러웠고 나무에는 서리가 내려 눈꽃이 피어 있었다. 빠르게 내리는 눈 때문에 세상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차가운 온도에 안경 낀 성애를 닦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보이지 않는 길을 터벅터벅 걸을 때 바닥의 눈이 밟히며 소리를 내질렀다.

  뿌드득 - 

  눈이 밟힐 때마다 내 발도 헛돌 것 같았다. 그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오디세이아 신화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나는 발목을 잡아끄는 눈길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마치 걷어낼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미 나는 안개 속에서 헤매었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죄로 인해 우리 집안은 몰락했고, 엄마는 남의 집 식당을 전전하며 찬물에 손을 담갔다.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무직이었던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학을 휴학한 이후 군에 입대해야 했고 퇴역한 다음 바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알아보아야 했다.

  편의점 알바는 물론 현금 수송 알바까지 해보지 않은 것이 없고 공장을 전전하며 일해서 번 돈으로 뒤늦게 학교에 복학해 졸업하였고, 그 이력으로 학원에 취직해 일하며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 막막한 나의 삶에도 사랑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대학 친구의 소개로 만난 여인이었다. 우리는 겨울로 접어드는 십일월쯤 만났고 지금도 그녀가 입었던 갈색 코트와 빨간 목도리가 기억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끌렸던 그녀와 나는 점차 관계가 깊어졌다. 그럴수록 번민의 감정이 커졌다. 우리가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에 관해 말하면 그녀가 나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볼까? 나는 언젠가 아버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문득 그녀는 웃으며 나의 부모님에 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석 씨, 부모님은 어떤 분이에요?”

  “부모님이라 ……. 글쎄요.”

  “무슨 대답이 그래요? 말해봐요.”

  나는 차분하게 웃으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삭혔다. 

  “…… 우리 엄마는 밝고 좋은 분이에요. 한정식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엄마가 고생을 좀 많이 했지만 그래도 씩씩한 편이라서 제가 힘들 때마다 오히려 든든하게 위로해 주는 편이에요.” 

  “그럼 아버지는 어떠세요?”

  “글쎄요. 아버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냥 그렇죠.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

  애매모호한 답변을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라 짐작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부모님에 관해 물었을 때 나는 웃음을 방패로 마음에 번지는 파문을 감추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번민하던 나는 결국 그녀에게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의 젖은 눈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의 손을 잡아끌던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울음을 참고 있는 작은 호흡까지 뇌리에 떠오른다. 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뻔뻔함도 진실을 말할 용기도 없었다. 

  이미 알고 지냈던 친구들 외에 다른 사람과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것은 이때부터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고 이해를 받고 그의 무의식에 도사린 불안을 제거하는 일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러면 차라리 필요한 관계를 넓히지 않고 더 인간에게 어떤 기대라는 것을 하지도 받지도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삶에서 아버지는 지울 수 없는 얼룩과 같은 존재였다. 세탁기에 돌려도 지워지지 않고 인이 배어 지워지지 않은 선명한 상흔이었다. 누군가 아버지에 관해 묻는 것에 대해 불안을 떨쳐낼 수 없었다. 분명 내 곁에 없지만 나를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나를 정의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것은 나를 감싸고 있으며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안개였다. 투명하지만 흐릿하고 겉으로 자유롭게 보이지만 내 삶의 공간을 점유하는 힘을 떨쳐내고 싶었다. 



  5     


  교도소 입구에 도착하자 이미 사람들이 눈을 맞으며 출소자들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사람들은 곁을 떠났던 친구들과 가족들을 기다렸다. 출소자들은 버스를 타고 교도소 입구로 이송되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곧 출소자들이 한 명씩 하차했고, 밖에서 추위를 견디며 출소자들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버스 앞으로 다가가 기다리던 지인들을 끌어안고 서로의 등을 다독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아버지가 나오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생각했다. 원망이나 독설이라도 퍼부어야 할까? 그러기에는 서로가 많은 시간이 흘렀고 불필요했다. 나는 자식의 의무를 다하면 서울로 다시 돌아갈 것이고 당분간 아버지를 보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버스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버스에서 출소자들이 거의 모두 내렸을 때쯤 모자를 눌러쓰고 푸른색 점퍼를 걸린 장년의 남자가 내렸다. 바로 내가 기다리던 아버지였다. 뿌연 성애가 핀 안경으로 보여도 나는 아버지인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입소 때보다 살이 빠졌고 걷는 자세가 구부정했다. 다리 근육이 빠져서 그런지 무릎이 살짝 굽어서 걷는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가방을 바른손으로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아버지를 마주하자 온갖 감정들이 밀려왔다. 기뻐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탈색된 감정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내가 곁으로 가자 곧 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왜 나왔냐. 그냥 …… 집에 있지.”

  “엄마가 집에서 기다려요. 가죠.”

  나는 더 아버지와 말을 나누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가방을 빼앗듯이 들고 돌아섰다. 나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만으로 바로 알아차렸다. 비록 행색은 남루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자존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터벅터벅 눈을 맞으며 우리는 걸었다. 교도소 앞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존재를 확인하던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서로 어색함을 감추며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앞서 걸어가는 내 뒤를 아버지가 뒤따라 걸었다. 크게 거리를 벌리지 않으며 나는 간격을 유지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한참을 걸으니 군산 시내로 향하는 도로가 나왔다. 

  우리는 그곳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군산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폭설로 버스 운행은 지연되었고, 정류장 안에서 대기를 하며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6

     

  나는 아침부터 움직인 터라 마침 허기가 졌다. 

  “뭐, 드시고 싶은 것 없어요? 그래도 밖에 나왔는데 말씀해 보세요.”

  아버지는 고민하는 것 같더니 간단히 답했다. 

  “…… 소주에 순댓국.”

  나는 휴대폰으로 검색해 정류장 근처의 순댓국집 위치를 찾았고 우리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버지는 순댓국을 시키고 맥주잔을 가져와 소주를 가득 부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크윽-”

  아버지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런 다음 나에게 맥주잔을 내밀었다. 나는 술잔을 받았고 아버지는 그 잔에 소주를 채워 넣었다. 나도 아버지가 따라준 소주를 벌컥 들이켰다. 소주 특유의 비릿한 알코올 냄새가 났고 곧 몸에서 열이 올랐다. 우리는 순댓국에 숟가락을 말며 술을 마셨다. 얼마나 마셨을까? 아버지는 식탁 위에 돈을 꺼내 올려두고 가방을 집어 가게 밖으로 나갔다. 뒤따라 나도 나섰다. 아버지가 뒤쫓아 나오는 나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렸다. 

  “너에게 짐이 되지 않을 거다.”

  아버지는 다짐하듯이 말했다. 

  “엄마에게는 나를 찾지 말라고 전해줘. 때가 되면 연락한다고.”

  도대체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다리도 굽어버린 노구의 몸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와 남은 말년을 보냈으면 했지만 아버지는 어딘가로 떠나고자 했다. 

  “뭘, 어쩌시려고요? 지금 와서 이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요.”

  짜증이 일었다. 기껏 출소일에 아버지를 데리러 왔더니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동안에 밀어두었던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사라지면 끝이에요?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엄마와 나에게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요? 그날 아버지가 죽인 것은 바로 엄마와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이에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잠자코 듣기만 했다. 굳게 다문 입에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갇혀 지낼 때 출소하면 좀 여기저기 돌아 다녀보려고 했다. 그리고 이거 받아라.”

  차분하게 말하며 아버지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돈이 담긴 봉투였다.

  “교도소에서 노역하며 번 돈이다. 엄마에게 사고 싶은 것 있으면 이걸로 사라고 해. 너도 필요하며 꺼내 쓰고.”

  아버지는 마치 ‘미안하다’라는 말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방을 들고 뒤돌아섰다. 나는 떠나가려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뿌리쳤다. 가방을 들고 굽은 무릎으로 엉거주춤 걷는 아버지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나는 결코 아버지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멀어질수록 그 주변으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버지는 서서히 그 모습이 지워지다가 이내 완전히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도록 사라져 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