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둘은 목포에서 왔고요. 저는 괜찮아마을 이라고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홍동우라고 합니다.
저는 똑같이 목포에서 기획사나 비건 레스토랑, 레트로스테이 등을 운영하고 있는 박명호입니다.
제가 10년 전쯤‘여행대학’ 때로 기억나는데 한국관광공사 컨설턴트로 숙대 부근 여행박사 건물에 뵈었던 거 같아요. 그동안 어떻게 성장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박명호) 저는 사실해야 하는 일보다는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을 지우며 지내왔던 것 같아요.
대기업 홍보팀 다닐 때도 대기업이 아닌 나라고 하는 사람의 존재를 알리며 일하고 싶었고, 그래서 개인 브랜드를 만들고, 개인 브랜드를 만든 다음에는 혼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일하기보다는 함께 하는 일을 고민했고, 2013년도에 홍동우 대표를 만나 ‘익스퍼루트’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비즈니스나 목표가 좀 명확하지 않은 시기라 비즈니스를 좀 더 명확하게 해 보자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좋아하는 일과 비즈니스로서의 일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기)
이후 여행대학의 기획자가 되었는데 이때 얻었던 교훈은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는 일하지 말자’였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신뢰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사람하고 일을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해서 그때 다시 홍동우 대표를 만났죠.
그러면 먼저 홍동우 대표를 만나 썼고 그다음이 여행대학 기획자로, 이후에 또다시 함께하게 된 거네요. 네, 맞아요.
그래서 공장공장을 만들 때에는 신뢰를 좀 더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업이니까 그때 저희가 목포에 처음 내려갔을 때에는 아주 외롭더라고요. 그래서 외로우니까 ‘우리끼리 좋은 일 말고,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좋은 일을 해보자’라는 취지로 괜찮아마을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의 생각은 생태계를 만드는 일들을 좀 해보자'라는 생각도 있었죠.
어떻게 보면 사람 중심의 마을,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을을 만드신 거네요. 네 맞습니다.
괜찮아마을의 자금 흐름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저희가 괜찮아마을에 대한 관계나 이런 것들을 좀 정리한 게 최근의 일인데 ‘아무리 힘들어도 저희끼리 적대하지 말자’가 굉장히 큰 이슈였습니다.
(홍동우) 명호 씨가 많은 부분을 스킵했는데^^ 여행대학에서 지금까지 오기 전까지 여러 개의 기획과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용산에 있는 해방촌 교회 옆 까맣게 그을린 조그마한 가게 하나를 빌려 ‘카페를 만들자’, 아니면 ‘여행사를 하자’ 뭐 이런저런 기획들을 했었죠.
그때 공장 공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었고, 비어있는 장소를 함께하는 장소로 바꿨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전국일주 여행사를 하겠다고 익스퍼루트를 만들어 당시 한국관광공사 창조관광기업에 선정되기도 했었죠. 그때 예산이 그때는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어요. 2~4천 정도 됐던 것 같은데 저는 처음에 보면 지원사업이고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명호 씨가 돈 쓰는 건 잘합니다. 대기업에서 큰돈을 많이 만져봤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죠 그때 로고 만들고 브랜딩 하고, 홍보영상 만들고, 전국일주 콘셉트 잡고 어떻게 기획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다 등등 그때 제가 투어 진행을 시작했죠.
저는 그때부터 여행을 열심히 한 3년간 했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문득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국을 돌아다닌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때 둘이 모여 뭐 할까 하다가 제주로 가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방촌에서 기획을 했었는데 그때 기획을 했던 게 ‘한량유치원’입니다. 이렇게 명호 씨는 이름도 잘 짓고 브랜드도 잘 만들어요. 스토리 또한 숙소를 하는데 그냥 숙소가 아니라 ‘한량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입주할 때 항상 노란색 옷을 입혀요. 노란색 옷을 입고 같이 여행을 하는 프로그램까지 있는 그런 숙소였어요.
호스트 기반의 체험과 숙박을 하는 에어비앤비 스타일이네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제주도는 땅값이 좀 비싸더라고요. 저희가 일하는 만큼 다 월세로 나가 버리니까 다른 곳을 물색했죠. 어디 싼데 없을까 하고 검색을 해보니까 그때 엄청 저렴한 임대료를 찾았어요. 그게 어디 있냐면 태국의 치앙마이입니다. 명호 씨가 치앙마이 좋아해요
제일 먼저 제주에서 시작했고 목포 이전에 치앙마이에 계셨군요
네 맞습니다. 치앙마이에 한 달 동안 지내면서 사업 타당성을 좀 분석을 해 봤는데 사람들이 치앙마이 까지 오기엔 다소 힘들어 보이더군요. 실제로 리조트까지 저희가 다 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기회가 생겨서 목포로 내려오게 됐죠.
그러면 목포는 뜻한 바가 있어 내려온 거예요?어떤 계기로 내려오게 된 거죠.
저희가 서울에서 인연이 있던 분께 연락을 받고 제주도에 저희가 한량 요청할 때 손님으로 오셨던 한 시인 분이 계세요. 저희가 태국 치앙마이에 떠나기 전에 서울에 잠깐 보자고 했는데 서울에서 봤을 때 ‘치앙마이도 좋은데 내가 목포에서 한 건물에 있으니까 혹시라도 괜찮으면 갔다 와서 한 번 목포에 와봤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었죠.
건물주시네요?
네. 저는 사실 그전에 좀 알기는 알았는데 다른 섬에서 만났었는데 유명한 분이세요. 강제훈 시인님이라고 유명하신 분이고,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님이기도 합니다.
통영이나 인천 등 여러 개의 거점을 두고 있었는데 목포의 건물 하나를 회원분들과 함께 구입하신 건데. 12개 방 중에 하나만 필요하셔서 저희에게 추천한 거죠.
공짜로 빌려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공짜요. 그러면 아... 그런데...’ 공짜로 빌려주다가 또 나중에 또 월세 올릴 수 있잖아요. 나가라고 할 수도 있고. 그래서 ‘아, 공짜요? 그런데 혹시 얼마나 쓸 수 있을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는데 ‘원하는 만큼’ 그래서 그 원하는 만큼을 담보하기 위해서 그분께서 계약서를 써줬는데 10년 무상임대였습니다.
그 사람도 대단하시네요. 그냥 내주겠다였죠. 10년이었어요.
저희가 그걸 페이스북에도 올리고 해 가지고 사람들이 되게 좋아도 해줬고 되게 관심도 많이 받았죠.
근데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어쨌든 목포라는 도시가 굉장히 쇠퇴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공간을 청년들이 와서 활용하면서 특히 섬이나 이런 데를 많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셔서 저희한테 그런 제안을 해주셨고 덕분에 지금의 목포 괜찮아마을이 탄생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 이제 자, 목포에 내려왔다. 두 청년이 목포에 내려왔다. 여기서부터 괜찮아마을에 역사가 시작되는 건데 그동안의 히스토리가 궁금합니다.
괜찮아마을은 회사가 아니었어요. 공장공장이라는 회사의 공동대표였고.
괜찮아마을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섬에 와서 살게 된 지 한 2년쯤 됐을 때였는데 저희가 원래 한량유치원이라는 브랜드도 있었고 하니까 그런 걸 하려고 했던 거예요.
목포에 와서 무진장이라고 하는 여관 건물을 활용해서 ‘장래희망은 한량입니다'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그렇게 여러 가지를 했었는데, 그러던 중에 2018년에 행정안전부에서 시민주도 공간활성화용역사업이라는 게 나왔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시민이 주도해서 지역에 있는 유휴공간을 활성화시키는 사례를 만들어내는 용역사업으로 관이 주도가 아니라 시민주도의 사업이었습니다. 그 당시시 정부가 혁신을 강조했던 정부였습니다.
여하튼 뜯어보니까 우리가 하기에 적합한 사업처럼 보이더라고요. 저희는 이미 목포에 내려와 있었고 목포에 유휴공간을 활용하고 있었으며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청년들이 와서 함께 지내며 재미있게 사는 것 그리고 서로 챙기며 언젠가는 지역에서도 살아볼 수 있는 그런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저희의 사업모델이었는데 딱 이 사업이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역 입찰에 참여하게 되었죠.
그때 저희는 입찰이 처음이었습니다. 2천만 원 미만의 수의계약만 경험이 있었죠. 사업비가 최대 7억이었고, 그때 입찰 제안을 위한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 청년마을 ‘괜찮아마을’이란 이름이 나왔습니다. 내용은 30명의 청년들을 선발해서 목포라는 지역에 6주 동안 살게 하자. 그리고 그걸 두 번 진행한다였습니다.(인구소멸 얘기도, 청년마을 얘기도 없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청년들과 함께 사업창업 캠프나 취업캠프가 아니라 그들이 하고 싶은 걸 찾고 충분히 쉬고 찾고 하는 과정들을 거치게 하는 거였는데, 축제도 열고 그리고 영화도 만들고 했었는데 그때 만든 영화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장편경쟁에 올라가기도 하고 또 친구들과 함께 책도 여러 번 만들고 또 각자 혹시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런 것들도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 볼 수 있게 해 줬고 여러 결과물들을 만들어내었죠(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결과물과 가치가 만들어짐)
그때 제가 기억하기로는 좀 신선했던 게 뭐냐면, 공공기관 사업 목적성이라는 게 공적인 부분을 강조하잖아요. 그랬는데 괜찮아마을 같은 경우는 민간이 주도하다 보니까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이 거기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진짜 한 번 내려가서 인생에 대하여 깊이 있게 생각해 보거나 또는 글을 쓰거나 개발을 해보고 싶은데 정말 그 공간에 가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정말 참신한 아이디어다라고 생각했었죠. 당시에 인기도 대단했었죠?
처음 1기 모집에 30명을 선발 예정이었는데, 지원자가 한 180명이 넘었습니다. 저희가 참가비는 받지 않는데 식비, 교통비, 생활비는 본인들이 부담해야 하고 6주라는 시간을 온전히 비워야 하는데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었죠. 참가비는 이듬해부터 받기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