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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Jan 13. 2022

카운터 뒤에서 벌어지는 일

《카운터 일기》를 읽고

카운터 일기, 이미연, 시간의 흐름



왜 이 책을?

이 책은 강릉의 ‘한낮의 바다’라는 서점에서 샀다. 감사하게도 내가 쓴 책인 <일일 다정함 권장량>이 무척 잘 팔리는 곳이라 한 번쯤은 찾아가 보고 싶었다. 서점에서 샘플 도서가 있는 경우는 대부분 서점 주인 분의 독서 흔적이 남아있다. 먼저 읽어보신 책들은 추천사와 함께 소개해두는 것. 카운터 일기도 짧은 소감과 함께 나와 있었는데, 책의 만듦새가 좋아 펼쳐보았다. 1쇄 표지만 후가공을 하여 만든 것 같았다.

제목의 ‘카운터’는 카페 카운터로 작가는 브루클린에서 약 5년 간 바리스타로 일하며 글을 썼다. 서서 읽어본 부분에 이끌려 책을 샀는데,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카페에서 자꾸만 손님과 점원에게 구걸하는 여성이 있다. 초라한 행색에 철면피이면서 매우 살가운 이 사람은 구걸하여 본인도 커피와 음식을 구매한 손님이 되면 몇 시간씩 카페에서 자다가 간다. 그런 날들의 무안함과 불편함, 삶의 어쩔 수 없음과 구질구질함을 적어낸 작가의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태도가 좋았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화려한 문장이나 대단한 감동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저 친애하는 단골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오듯, 받은 것 없고 주는 것 없이도 편안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책을 덮을 수 있는 것. 이다음의 환대의 표정을 기대하며 문을 다시 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독서라는 행위를 하고 싶을 때, 세 번쯤 숨을 고르고 읽을만한 책이었다. 카페의 움직이는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혼자서는 카페에 가지 않는 사람이나, 카페에서 사람 구경하는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크게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나의 공간을 나누어 쓰는 일

하나의 장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규칙을 나누고 지킨다. 나와는 다른 삶을 가진 사람들과 시공간을 나눌 때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과 있는 영역,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보인다. 카운터 일기는 브루클린 거주 지역의 한 카페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그 카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가 평소 머물던 곳이 아닌 카페에서 유일하게 도달할 수 없는 작은 구역에서 보내고 사람들을 마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작은 구역에서 대부분의 사건과 사고, 대화가 이루어진다.

    타인과 잠시만 대화를 해보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가 쏟아진다. 우리는 그 순간을 안전하게 넘어가기 위해 편견과 빠른 망각,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그간 쌓아온 사람을 빠르게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고,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빠르게 잊으며, 상대의 많은 부분을 신경 쓰지 않는 방식(상대의 얼굴에 주근깨가 있었나요? 쌍꺼풀은? 그가 무슨 색 셔츠(혹은 니트)를 입었는지 기억하나요?)으로 순간을 지나간다.  

    

세상이 돌아가는 무언의 규칙, 즉 상식을 열심히 쌓고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그간 쌓아온 상식을 가차 없이 부수며 사는 것이 어른의 삶인가 보다. 덧붙이자면, 상식을 깨기에 가장 좋은 기회는 먼 곳으로의 여행과 연애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상식 폭격, 상식 학살의 최고봉은 결혼이다. 나와 내 가족이 당연하다고 믿고 살아온 그 많은 것들이 ‘우리 집 특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 64, 상식의 연약함


매일 갈 곳

영화 인턴을 보면 주인공인 70세의 벤(로버트 드 니로)은 은퇴 후 매일 아침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과 신문 읽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출근하는 삶을 살아온 그에게 매일 똑같이 갈 곳은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은퇴한 아버지에게 집에서 좀 쉬시라 말해도 그게 오히려 그에게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익숙한 사실이다. 사람에게 ‘할 일’과 ‘갈 곳’이 없는 것과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무기력한 순간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카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갈 곳이자 패턴화 하기 좋은 장소다. 여전히 사람이 북적이며 냄새와 소리, 시각적 자극, 무엇보다 이동을 통한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둔 뒤에 한동안 혼자 배회하다  시간 거리의 작업실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작업실에서 책을 팔았고 사람들이 오가며 활력이 생겼다. 단순히 작업실이 생기고 사람과의 교류가 생긴 것만 도움이  것이 아니라  시간 거리를 매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변하는 장면과 소란이  그대로 동력을  것이다. 창이 넓은 곳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사는 하루가 건강에 좋다고 한다. 몸과 마음  가지 모두. 변화가 없는 곳에서는 정신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힘든데, 그럼 정신이 몸을 이해하기는 어려워진다. 건축가 유현준은 사람들이 바깥이 보이는 좋은 (크고 넓고 풍경이 있는) 얻기가 어려워진 요즘에 작고  화면 속에 갇히는 경향이 크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면에 비치는 것들은 자연스러운 시간을 가져다주지 않아서 사람은 쉽게 피로해지고, 시간을 느끼며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보이는 것을 무신경하게 바라보게만  뿐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는 곳에 속해야 한다. 시간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나는 멈춘 채로 이미 그것이 다 지나가버리는 일도 흔하다. 변하지 않는 삶의 곤란함을 떠올린다. 사람도 시간도 공간도 일도 변하지 않는 삶의 애석함을.

매일 남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는 회사 옆의 카페에 앉아 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아침 그림을 그리다가 은퇴를 한 이후에는 여전히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 집 근처 카페인 이곳에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림을 그린 지 이제 40여 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 92, 드로잉 아저씨


자꾸만 받는 환대의 기분

카운터 일기를 읽는 동안 자꾸만 카페에 가고 싶어 진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카페적 모먼트가 떠오른다. 카페에 가고 싶은 것을 넘어 카페의 일부가 되고 싶어 진다. 요즘은 개인 카페가 성행해서 개인적인 코드가 딸깍하고 맞추어지는 경험을 하기 어렵지 않다. 나만 해도 내 집과 흡사한(냉장고, 스피커가 같다. 큰 원목 테이블에 맥북을 켜 두는 것까지 같다.) 카페를 발견해 내 방처럼 드나들기도 했으니까. 심지어는 그렇게 코드가 딸깍 들어맞은 카페에서 일하고 싶어 진다. <카운터 일기>가 자꾸 나를 환대하기 때문이다. 카운터 너머에서 작가가 바라보는 카페의 모습에서, 카페에서 주고받는 불특정 다수와의 만남으로부터 서로가 반복하는 일상의 루틴에 섞여 상대의 존재를 감지하고 느끼는 순간들에서 자꾸만 반가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 무표정으로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스쳐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의 즐거움이 반복하는 일상의 몇 안 되는 고마움이다.


음악을 틀어놓고 무아지경으로 청소를 하다 보면 창밖에서 ‘똑똑똑’ 소리가 날 때가 있다. 지나가던 단골손님이 유리창을 두드리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이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보라색 고무장갑을 낀 내 오른손을 한껏 추켜올려 흔들어 화답하고는 다시 열심히 청소를 한다. - 98, 민들레 홀씨



언제든 볼 수 있고, 영영 볼 수 없는

언제든 볼 수 있다는 말은 종종 영영 볼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다음에 한 번 보자가 아니라 다음에 언제 볼까?라고 묻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만나지 않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 말로 나를 질타했던 사람도 있고, 내가 상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도 있다. 일방적으로 다음에 한 번 보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말을 듣고 있을 테니까.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서야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영 어렵다. 그것이 전염병으로 인해 더욱 어려운 시절이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야 더욱 안 볼 이유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쩌면 결과적으로는 서로 영영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기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다음에 한 번 언제?라고 물을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첫인상을 깨고, 오해를 깨고, 다시 시작할 힘을 낼 필요가 없는 날들이다.

조숙한 여섯 살짜리의 파격적인 제안에 아이의 엄마와 내가 모두 움찔했다. 30대 바리스타와 40대 아이의 엄마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사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섯 살짜리의 세계는 좀 더 솔직하고 단순하다. 호감이 있는 상대는 만나면 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깊숙하고도 동시에 얄팍한 관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매일 쓰고 정리하는 삶

글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을 보면 그가 그날그날 성실하게 쓰기에 임했음을 알 수 있다. 매일 쓰고 정리하는 삶에 대해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글을 쓴다고 했는데 사실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일은 생각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매일 글을 쓰며 그날의 일을 정리하는 것은 단지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음식을 씹지 않고 꿀떡- (으, 글로 쓰기만 해도 불쾌하다) 삼키는 대신 꼭꼭 씹어 삼키면 소화기관이 수월하게 작용하고 하루를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어제의 일이 오늘로 능구렁이처럼 넘어와 하루를 무신경하게 만들도록 두는 대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오늘을 꼭꼭 씹어 삼킬 수 있다면 어떨까.

생물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있는데 사람의 정신이 내장 상태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얘기해 주 면서 “너라는 존재는 전적으로 소화기관에 달린 거야 you are actually all about gut”라고 말했는데 깊이 동감했다. 장기가 조금만 불편해도 예민해지고 일상이 힘들다 못해 우울해지기까지 하니까. 그런 면에서 내가 쓰는 일기는 머릿속 장 건강을 위해 마시는 요구르트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음식도, 생각도, 원활하게 순환시켜 배출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 99, 내장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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