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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호 그리고 보람 Jan 28. 2024

[윤] 낯설고 물선 말레이시아에서 팀장을 하라고요?

Saya cuma ornag Korea.. (저는 그냥 한국인입니다..)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한 커플로, 말레이시아에서 거주 중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2023년 7월, 우여곡절 끝에 말레이시아에서 세 번째 회사로 이직했다. 화장품 브랜드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뷰티 업계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소비재를 다루는 회사로 돌아오게 되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데이터 분석과 보고서 작성 및 전략 수립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편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8월, 입사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한국에서 주재원으로 오신 Brand General Manager이자 나의 상사인 A님이 내게 오시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물어보셨다.


윤호야, 너 팀장해보지 않을래?


그때 나는 단 번에 대답했다.

"팀장이요? 아휴, 저 이제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됐고 아직 브랜드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우선 저도 일 익히면서 옆에서 많이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는 뷰티 인더스트리도 처음인 데다가, 팀장은커녕 대리급 업무도 안 해봤는데요. 그리고 지금 팀도 소속되지도 않아서(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BGM 아래에 직속으로 있는 구조였다) 직원들이랑 친해지지도 못했어요. 이 친구들은 제가 A님 비서인 줄 안다고요(실제로 A님 어디 갔냐, 나 회의 갈 테니까 A님이 찾으면 말해달라, 같은 질문과 부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리고 저는 영어도 아직 잘 못하는 데다가(진부한 이야기지만 외국에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외국어 실력의 향상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다.) A님이랑 저만 유이한 한국인이잖아요. 여기 직원들은 전부 말레이-중국계여서 자기들끼리는 중국어(사무실에 있다 보면 영어와 말레이어, 만다린과 광둥어가 혼재된 기상천외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로만 얘기하네요? 그리고 팀장 맡기시려는 팀, 제가 한 달밖에 안 됐지만 팀원들 문제 많은 거(e.g., 기싸움, 편 가르기, 숫자 다 틀린 보고서 보내기, 데드라인 어기기) 저도 보인다고요. 전 못합니다...'


그렇다. 나 같은 초짜 외국인이 팀을 맡기에는 결코 적절한 상황은 아니었다.


저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팀장 해볼래?'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팀장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녹록지 않겠지만 어쩌면 나에게 온 좋은 기회가 아닐까?'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진급 욕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회사 생활을 계속해서 할 팔자라면 다음 스텝을 위해 팀을 이끌어 본 경력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한국에서야 잘하시는 분이 쎄고 쎘지만 디테일이 약한 말레이시아에서라면 숲보다 나무를 잘 보는 나의 능력이 더 잘 발휘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어느 정도 있었다. 앞으로 닥쳐올 일도 모르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다 처음은 있지 않은가? 내가 CEO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팀장인데, 누구는 못돼서 안달인 직책을 놓고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나 자신이 웃기기도 했다.


그렇게 김칫국을 조금씩 흡입하며 며칠이 지난 후, A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아직까지 받은 이력서 중 마땅한 인재가 없다는 말씀과 함께, 다시 한번 나의 의중을 물어보셔서 나도 걱정되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것은 다 어떻게든 극복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팀장이 처음이라(그것도 외국에서) 약간 걱정된다고 말씀드리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영업팀 팀장 W도 네가 잘할 것 같다고 하던데?"

"W가요? 저 W와는 얘기를 거의 안 해봤는데요? 아직 일 같이 한 것도 없고... 뭘 보고 그랬을까요?"

"글쎄다. 암튼 그러더라고."

"알겠습니다. 그러시면 일단 더 구인해 보시다가 마땅치 않으면 저도 하는 쪽으로 생각해 볼게요." 


사실 기분은 좋았는데 역시 회사가 무섭구나, 안보는 것 같아도 다 보는구나(그런데 뭘 보고 그랬을까 아직도 의문이기는 하다),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감히 말하건대 이건 한국 회사생활만의 무서운 점이 아니다.


그리고 이틀 후 저녁, A님에게 카톡이 왔다.

E(=기싸움, 편 가르기, 숫자 다 틀린 보고서 보내기, 데드라인 어기기 하던 4년 차 직원)가 방금 사직서 냈다.
윤호 네가 팀 맡아줬으면 좋겠다.
바로 후임 찾을 거야. 품의도 올렸고, 필요한 인원은 신속하게 보강해 줄게.

올 것이 왔구나. 길게 생각 안 하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저도 많이 부족하지만... 새 판 짜서 잘 가보시죠!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외국에서, 외국인 팀원들을 이끄는 팀장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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