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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인생에서 압축인생으로

삶, 인생, 재수, 삼수, 김부장

by 강재상 Alex


성인이 되고나서부터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은 '지각인생'이라고 종종 이야기해왔는데, 불현듯 이제는 더이상 지각인생이 아니라 오히려 '앞선 빠른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각인생이라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빨리 달려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강박적으로 부지런히 달려왔더니 어느덧 남들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걸 지난 주말 막을 내린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다가 깨달았다.


더이상 지각인생이 아니라 남들보다 앞서 빠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을 남들보다 더 풍족하게 잘 살고 있다는 의미로 쓴 것은 아니다. 단순히 보통사람들이 시간 흐름상 평균적으로 겪는 경험을 먼저 했고 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 지각인생의 시작은 대학을 삼수해서 (정확히는 재수와 반수해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래서 그 당시 평균에 비해서 군대도 늦게 갔고 취업도 늦었다. 사회생활 전 대학시절에도 남들보다 늦어진 그 2년을 채우기 위해 내내 달렸지만 IMF로 집안 상황도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꿈을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2년 늦게 한 취업과 함께 시작한 사회생활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2년을 당기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집안 일들과 예상 못한 나의 내외부 상황상 일부는 따라잡기 시작했고 일부는 계속 늦었다. 늦다못해 결혼과 육아 등은 그냥 넘겨버리는 남들과 다른 삶도 살게 되었다. 스무살 성인이 된 이후 경제적으로는 독립했지만 물리적 독립을 하는 것도 인생 계획보다 한참을 늦었고. 그래서 다 늦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다가 더이상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인생을 돌이켜보니 이미 10대와 20대부터 앞설 수 있는 바탕을 하나 둘 쌓아갔다. 그 당시 노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천재들과 넘사벽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절망하고 극복하면서 내 무기를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어마어마한 부자들과 권력을 가진 사회지도층을 만나 실존하는 계급에 대해 충격을 받고 역시나 극복하면서 더 열심히 살게되는 원동력을 갖게 되었다. 사기꾼 친구들과 동생들을 만나 고생도 해보고 평생 영원할 것 같은 의리와 우정, 사랑에 처절한 배신도 당해보면서 사람과 인간관계에 대해 깊게 배울 수 있었다. 죽음을 오가는 가족을 챙겨야 하는 상황도 겪어보고 친구나 지인의 죽음이나 자살도 겪었다. 남들이 평생 경험해보지 못하거나 대부분 나이 먹고나서야 겪는 일들을 왜 나만 먼저 어리거나 젊었을 때 겪게 되는 건지 그 당시에는 하늘도 원망해보고 너무나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 때 겪었기 때문에 잘 넘길 수 있었고 인생이 삐끗하지 않았고 심신은 더욱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중장년이 되고 나서 그런 일로 흔들리지 않고 원래 인생은 그런거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직장생활 동안 2년 늦은 걸 채워야 된다는 마음으로 달려가다보니 이직과 2번의 특진으로 연차와 나이 대비해서 오히려 남들보다 빨리 높은 직급과 직책을 달 수 있었다. 2년 늦게 시작했는데 4~5년은 당긴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 드라마에서 겪은 모든 일들을 40대 초반까지 경험하고 진작에 졸업했다. 하다못해 희망퇴직 엔딩도 말이다. (물론 이직할 다른 직장 몇곳 미리 준비해두고 희망퇴직을 통해 나 대신 팀원 2명 살리고 희망퇴직금을 종잣돈 삼아 집을 살 바탕을 만들었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인지 김 부장에 완전 몰입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김 부장과 다른 점 하나는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결국 임원까지 달고 직장생활을 마무리했다는 정도다. 그리고 41살에 본격적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김 부장보다 10년 이상 빠르게 말이다. 재미있는 건 이 시점 다른 의미에선 또 남들보다 10년 이상 늦은 부분이 있는데 정확하게 40살까지 집안 집 모두 갚고 40살부터 드디어 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는거다. (그 이후부터는 본가에 용돈과 아버지 병원비, 요양병원 비용 등만 계속 보냈다) 한마디로 40살에 희망퇴직금 딱 하나 가지고 시작해서 지금 내 꺼는 모두 40살 이후에 만든 거다. 물리적 독립은 많이 늦었지만 대신 서울 자가에 은행빚 없이 오롯히 내 집이니 이 역시 빠르게 달성했다. 아직 친구들 부모님 부고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 3년전 병환으로 몇년 고생하신 아버지도 평온하게 보내드렸고, 빨리 인생 2막을 시작해서인지 올해 최우선 관심사는 노후대책이라 고민 많이 해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인생 3막도 슬슬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인생 2막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하는 또래나 주위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나는 다음 10년을 어떻게 살아갈 지, 인생 3막은 어떤 삶을 살 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니 확실히 더이상 지각인생은 아닌 것 같다. 지각인생이었다가 '압축인생'을 살아왔구나 싶다. 앞으로 지각인생 표현은 쓰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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