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이 전도된, 그 자체가 재난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 등등 이 정도면 거의 올스타라고 봐도 무방하다. 캐스팅 단계부터 관심을 모았던 이 재난 영화는 2021 칸 영화제 상영 후 긴 대기시간을 가졌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때문에 개봉 시기는 계속 밀렸고, 2022년 여름에 개봉하게 되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하는 한국영화들, <외계+인 1부> , <한산: 용의 출현> , <헌트> 등과 함께 올여름 극장가를 주도할 BIG4로 손꼽혔다. 기대 속에 개봉했던 <외계+인 1부>는 참패란 말이 어울릴 지경이고, <한산: 용의 출현>은 나름 선전하고 있는 여름의 전쟁터에서 <비상선언>은 어느 정도의 승리를 맛볼 수 있을까.
항공재난영화를 표방하는 영화의 시작은 매우 호기롭다. 재난의 빌미가 되는 테러범의 정체를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시키는 과감한 전략을 쓴다. 이런 선택은 테러범 역할을 맡은 임시완 배우의 열연과 더불어 영화 초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영화의 초반은 테러범의 정체가 드러나고 바이러스가 퍼지는 하늘에서의 상황과 살인사건을 뒤쫓는 지상에서의 상황을 적절히 교차시켜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이는 <비상선언>이 꽤 흥미진진한 장르영화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임시완 배우는 그 수많은 배우들 속에서도 기대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하이재킹 재난 영화의 서스펜스를 온전히 책임질 매력적인 악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비상선언>은 이 매력적인 악역을 데리고 그냥 그 매력에 편승한 일반적인 장르영화로 목적지를 설정했어도 됐었다. 더군다나 올스타급의 호화 출연진은 그럴만한 힘을 충분히 가지고도 있다. 그러나 테러범은 너무나 일찍 퇴장했고, 그 이후 이 영화가 선택하고 보여주는 것들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다.
악역의 급작스런 퇴장 후 이 영화는 재난 영화의 그 지긋지긋한 클리셰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애틋한 가족사가 있고, 위기상황에도 여지없이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고, 무능한(혹은 그렇게 보이는) 정부와 공무원들이 있고, 악덕 기업이 있고, 가족을 구하기 위한 헌신도 있고, 뜬금없는 희생도 있고... 뭐 다 있다. 호기롭게 이륙한 영화는 신파와 클리셰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끝도 없이 추락한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신파적 요소는 마치 나의 한계를 시험이라도 하는 듯했다. 시험에 드는 이유는 신파적 요소가 단순히 감동과 눈물을 짜내기 위해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다시 말해 가장 인상적으로 나쁘게 여겨지는 부분은 다름 아닌 이 영화의 '태도'다. 영화 <비상선언>은 어떤 특정한 사상 또는 정치적 뉘앙스를 품고 있는 영화다. 분명 그렇다. 이 영화는 세월호 사건부터 코로나 시국까지 이르는 대한민국 사회를 경유하며 영화 속에서 나오는 항공재난을 통해, 그리고 그 속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무언가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는 멀리한 채 정치적&사상적 메시지만 전달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가 크나큰 재앙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피상적이며 위험하다' 또한 굉장히 교조주의적이기도 한데, 이는 클리셰의 반복보다도 더 최악이다. 그리고 미세하게나마 프로파간다 필름 같은 느낌도 내게는 있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 <비상선언>은 어떤 메시지들을 기계적으로 주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위험한 시도를 위해 포기한 완성도는 주객이 전도된 영화, 진짜 재난 같은 영화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메시지가 서사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는 포기한 채 메시지의 주장을 위해 무리한 설정들을 연이어 사용하면서 전반부의 좋았던 부분을 제 발로 차 버린 꼴이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매력적인 장르영화의 길을 포기한 영화 후반부의 그 선택은 같은 감독이 만들었나 의심이 들 정도다. <비상선언>의 진짜 목적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어쩌면 진짜 재난영화의 모습이다"라는 대명제를 관객들에게 설파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길을 돌고 돌아 수많은 억지와 무리수를 견뎌가며 이 영화의 메시지를 알아차렸을 땐 감동보다 허탈함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