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콘텐츠 리뷰 No 2.
추억이란 무엇일까? 혐관이라는 말이 있다. 소위 시쳇말 인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뜻은 나도 모르겠지만, 대충 애증의 관계에 놓인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런데 한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애증을 지니려면 적어도 함께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바로 추억이 아닐까? 남들 말대로 추억은 힘이 세서 이미 한번 산산조각 나서 깨져버린 관계를 봉합하기도 한다. 물론 아닌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어쨌든 생각해보니 나는 친구든 연인이든 혐오 관계에 놓였다가 종국에는 화해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즐겼던 것 같다.
사실, 나한테 혐관은 삶, 그 자체라고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중2병이나 다름없는 마인드겠지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조직검사를 받은 이후 나쁜 결과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 단어는 정말 나에게 지긋지긋한 트라우마 그 자체이다.
그런데 나 또한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 문득 ‘사는 게 재미없어요.’라고 말했던 어느 드라마 속 대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역설적이게도 그 드라마 속 대사 때문에 나는 지금 추억 여행을 하고 있다.
사는 게 재미없는데,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유물 콘텐츠들은 왜 불현듯 수없이 떠오르는 것인지.
검진을 받을 때 혹여나 오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김 같은 것은 먹지 말라는 주변의 말도 무시하고, 심지어 전날 술도 잔뜩 먹고 호기롭게 검진대에 오른 주제에 막상 기본 검진 후 추가적으로 조직검사를 했다고 하니까 아, 그래도 역시 김 같은 건 먹지 말걸. 이라는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우스워서 한참을 혼자 웃었다.
친구들이 ‘당신 부셔버릴 거야’ 라는 드라마 대사를 따라 하고, 그 후속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했던 헤어밴드를 사는 동안 나는 노을 지는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는 게 재미없다고 했던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곱씹었다. 결국 사는 게 재미없다는 그 남자는 뇌종양에 걸려 마지막회에는 사랑하는 아내의 품에서 죽었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지금에 비해 훨씬 어린 나이였는데, 아직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지 못한 나이였는데 이상하게 공감이 되었다. 사춘기여서 그랬던 것일까.
아침 열시가 넘었지만 나는 그를 깨우지 않겠다, 라는 여주인공의 나레이션으로 막을 내리는 그 드라마의 마지막회를 비디오로 녹화해놓고 울면서 계속 돌려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녹화분이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영상 위에 덧입혀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어머니의 황당무계한 표정이란. 어차피 그 테이프 자주 보지도 않잖아요, 라고 항변해봤자 그날따라 추억의 비디오를 재생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속상함은 그 무엇으로도 내가 위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너는 비디오테이프 제목도 안 보고 녹화하냐,는 어머니의 지청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중에는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앉아 그 녹화분을 보며 펑펑 우는 것으로 훈훈하게 그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어머니께 죄송하다. 비디오를 사주신 아버지께도 물론 죄송한 건 마찬가지다. 그러라고 사주신 비디오는 아닐 텐데.
친구네 집에서 친구가 녹화한 만화 비디오를 보다가 자기 말 안 들으면 다시는 안 보여준다는 친구의 말에 화가 나서 그날 밤 당장 비디오를 사달라고 아버지께 떼를 썼더니 다음 날 당장 사주셨다. 부모님은 이렇게 날 생각해주시는데 나는 어머니,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위에 제목 확인도 안 하고 드라마나 녹화하고. 그래서 지금도 그 드라마의 마지막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내가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슬램덩크 같은 TV 만화 말고 드라마를 녹화한 것은 아마 그 드라마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마 방영 시간 이외에는 그 드라마를 다시 보기 힘들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에는 만화를 녹화한 테이프 말고 그 테이프 밖에 남아 있지를 않았는데 어쩐지 그 드라마의 마지막회는 녹화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사고를 쳤다.
남자 주인공이 속물적인 모습으로 드라마 초반 파란색 바탕에 하얀 줄무늬 스포츠카를 타고 다닐 때만 해도 같은 반에 그 드라마를 보던 친구들이 꽤 있었다. 나중에 그런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고 싶다고 말하던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당신 부셔버릴 거야’의 열풍이 휩쓸고 난 이후에는 적어도 내 주변에는 그 드라마를 보는 친구들이 아무도 없었다.
하긴, 사는 게 재미없다는 대사를 이해하기에는 그때의 우리들이 너무 어렸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드라마 속 대사를 당시 제대로 이해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 남주가 세상을 떠났던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지금조차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의 무게를 정확히는 잘 모르겠으니까.
아무튼 갈수록 시청률이 낮아졌기 때문에 아마 그 드라마는 예정된 방영 회차를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종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44부작이라는 긴 호흡을 매번 따라가며 그 드라마를 집에서 홀로 보았고 그 때문에 동생과 꽤 싸웠다.
당시 동생이 보고 싶어 했던 트렌디 드라마는 시청률이 매우 높아서 재방을 자주 해줬지만 내가 보던 드라마는 그렇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인터넷 다시보기 서비스는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왜 그렇게 본방을 봐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일까.
하긴 그 시절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선생님이 인터넷 검색을 하라고 숙제를 내주면 PC방에 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아예 그 사라져버린 프리챌, 라이코스, 엠파스, 네띠앙 이런 커뮤니티나 검색엔진으로 숙제를 했다. 내가 개인 컴퓨터를 갖게 된 것은 밀레니엄 시대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였다. 이 드라마는 세기말에 방영되었다.
수많은 OTT 플랫폼 또는 VOD 서비스가 있어 언제든 다시 보기가 가능한 지금과 그때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내가 리뷰하고 싶은 드라마는 이 드라마는 아니다. 이 드라마는 제대로 다시 보기가 너무 힘들 것 같다.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지 못했던 그때의 나는 그저 사는 게 재미없다는 드라마 속 대사를 그저 남녀주인공처럼 머그잔을 들고 속으로 따라 했을 뿐이지만, 지금의 나는 그 대사를 보면 걷잡을 수 없이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터져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드라마 대신 내가 즐겨보았던 혐관에 놓인 캐릭터들이 나온 콘텐츠를 보기 시작했다. 서로 사랑하던 그들이 왜 그렇게 갈라서야만 했는지, 그리고 멀고 먼 길을 돌아 끝내 어떻게 다시 화해하게 되었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보고 싶었다.
일단 쿠팡플레이에서 애니메이션 이누야샤를 보고 있다. 그런데 이누야샤와 금강의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리뷰를 하기가 좀 귀찮다. 게다가 아직 정주행을 끝마치지도 못했기 때문에 패스.
그 다음으로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이혼했다가 재결합 부부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두 편을 다시 보았다. 모두 내가 첫눈에 반했던 여배우들이 나온 드라마다.
‘맛있는 청혼’ 이전에 나는 어떤 여배우의 모습에 한눈에 꽂혔는데 그건 바로 ‘서궁’이라는 사극의 여주인공이었다. 상궁인데 왕의 총애를 믿고 색깔 있는 당의를 입고 나타나 궁을 발칵 뒤집어놓은 그 모습에 꽂혀버렸다. 원래 상궁은 색깔이나 무늬가 있는 당의 대신 녹색 민무늬 당의만 입어야 하는데 김개시는 그런 거 다 무시하고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었다. 그렇게 우기는 모습이 멋있게만 보였다.
그 후 서궁이 종영하고 드라마의 주연이었던 김개시와 광해군이 함께 나온 미니시리즈가 있다. 드라마 파파. 이 작품에는 김개시가 죽이려고 했던 어린 영창대군도 함께 나오는데, 서궁에서처럼 혐관은 아니다.
드라마 서궁은 한날 한시에 태어난 김개시와 인목대비의 질긴 악연을 그리고 있는 드라마다. 드라마 삼국기, 한명회, 장녹수에 이어 이 드라마 역시 나 홀로 본방을 사수하면서 본 작품이다. 엄마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주신 과거로 타임슬립하는 미리내 로봇 나오는 역사 만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닳고 닳도록 읽었는데 그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나오는 KBS 사극들이 있어서 그 사극들이 하는 시간이면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삼국기에 나오는 서인석 배우가 맡은 김유신 장군이 멋있어서 그 장군이 하는 대사를 공책에 옮겨 적은 적도 있다. 김유신 장군과 혐관에 놓인 캐릭터는 누구라고 해야할까. 결사대를 이끌고 항전한 적장이었으니 유동근 배우가 맡은 계백이라고 해야할까.
김개시와 광해군이 환생해서 나온 드라마 역시 손예진, 감우성 주연의 ‘연애시대’처럼 이혼했다가 재결합 부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연애시대가 나오기 딱 10년 전 작품이다. 연애시대는 두 남녀가 혐관이라기보다는 이혼한 후에도 친구처럼 지내는 부부가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상처를 속 깊이 들여다보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어쨌든 극중 대사처럼 한번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일에 대해 남자 쪽이 여자에 비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이건 두 작품 모두 마찬가지다. 파파 역시 여주에 비해 남주가 재결합에 대해 회의적이면서도 이혼한 상처가 꽤 깊은 모양인지 거의 매회 술을 마신다. 그래서 나는 남주가 알코올 중독자인 줄 알았다. 남주가 자주 하는 대사도 술 한잔 하겠어?
내 기억 속에서 이 드라마는 밝고 경쾌한 시트콤 분위기였는데 다시 보니 꽤 어둡고 우울한 드라마였다. 물론 조연 캐릭터들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가벼운 터치가 있긴 하지만 메인 스토리인 이혼 남녀 이야기는 꽤 어둡고 우울하다. 그래도 결국 연애시대처럼 재결합에 성공한다.
그리고 다시 보면서 느낀 점은 이 드라마에서 싱글 남녀에 대해 나름대로 꽤 진지한 고찰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이 드라마를 보던 나이에 그런 게 느껴질 턱이 있나. 이 드라마 방영 당시 그때의 나는 드라마 속 아역들과 거의 비슷한 나이였다.
남주의 처남이 썸녀에게 사과 던져주면서 이거 하려고요. 했던 그 장면이 너무 쿨하게 보여서 친구랑 싸우고 화해한답시고 그거 따라 한 기억만 있다. 그랬더니 친구가 왜 드라마 따라하냐고 따라쟁이, 라고 해서 또 대판 싸우고.
원래 이 글에서 위 작품들에 대한 리뷰를 끝마치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또 길어지고, 갑자기 또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예고편처럼 되어버렸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때는 이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