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만나는 중입니다.
추억의 콘텐츠 리뷰 No 3.
(이미지 출처)
https://www.themoviedb.org/tv/2173/images/posters?image_language=ko&language=ko-KR
이혼 남녀의 재결합 이야기를 다룬 연애시대와 파파는 지금으로부터 각각 약 20,30년 전의 드라마라서 제목에 스포일러 표시를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여졌다. 결론은 귀찮아서 표시하지 않기로 했다. 음, 영화 올드보이의 반전 정도라면 모를까. 굳이 헤어진 남녀의 재결합 이야기에 스포일러 표시를 해야 할까 싶기 때문이다. 지금 이글의 초반에 이미 드라마의 결말까지 쓰기도 했고.
드라마 파파를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난 장면이 있었는데, 여주인공인 세영이 ‘헤어질 결심’이라고 말하는 부분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단어가 흔하게 쓰였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문어체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라마 연애 시대를 보면서 변한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K문고의 잠실점 오픈 준비였다. 그러니까 연애 시대가 방영된 당시에는 교보문고 잠실점이 아직 오픈하지 않았던 때였다. 드라마 속에서는 K문고라고 하는데 누가 봐도 교보문고이다. 교보문고에서 제작 협찬을 한 듯하다.
동진이 일하는 K문고 지점은 외관을 보니 강남점 같다. 연애시대는 이혼한 두 남녀가 결혼기념일에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여주인공인 은호와 동진에게는 아이가 있었는데, 은호가 그만 사산을 하고 말았다. 은호는 이 일에 굉장히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엄마를 어릴 적 교통사고로 잃었던 은호는 아이를 사산하면서, 자신은 엄마라는 단어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다.
파파의 여주인공인 세영은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다. 연애시대의 은호의 나이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스물여덟인가 그런 것 같다. 동진은 은호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은 것 같다. 어쨌든 두 드라마의 여주인공들 모두 20대에 결혼을 하고 이혼을 했다.
20,30년 전의 서른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다. 서른을 앞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어른’처럼 보인다. 아마 지금의 서른은 모르긴 몰라도 인생의 관록을 지닌 나이로 보이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초년생으로 보이지, 삶의 풍파를 한 차례 겪은 어른처럼 보이지도 않을 것 같고.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은호는 스포츠센터의 강사이자 팀장이고, 동진은 K문고 북 마스터다. 세영은 영화사 기획실장이고, 현준은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동진과 세영은 K문고와 영화사에서 각각 주임과 실장으로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고 있다. 팀장으로 있는 은호도 마찬가지다. 현준은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라디오를 진행하며 집필한 소설이 모두 영화화 되었다.
이렇게 두 작품 속에서 서른을 목전에 두었거나 갓 지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상태다. 이미 회사에서 자리를 잡은 상태인데도, 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세영은 영화 연출에도 관심이 많아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다. 하지만 일에 대한 세영의 욕심은 종종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서운하게 만든다. 워킹맘인 세영은 늘 일로 바빠서 이로 인해 유치원에 다니는 딸과 갈등을 빚는 에피소드도 있다. 미국 출장을 다녀오느라 딸의 유치원 학예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속 깊은 딸은 결국 엄마를 이해해준다.
회사 일로 늘 바쁜 세영 대신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현준이 당분간 아이를 돌보겠다고 말하자 세영은 그럴 수 없다고 맞서지만 새별이는 엄마는 바쁘니까, 당분간 아빠 집에서 지내겠다고 말한다. 결국 세영도 회사 일에 바쁜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새별이를 현준에게 보내준다. 세영과 현준의 딸인 새별이는 늘 회사 일에 치이는 세영의 흉내를 내는데 그 모습이 참 귀엽다.
‘새별아, 엄마, 파김치야. 건들지 마.”
그런데 세영이 이렇게 자기 커리어를 쌓기까지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을 파파는 보여준다.
드라마에서 혼전 임신이라는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새별이라는 딸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일찍 결혼했다는 대사가 있는 걸로 봐서 캠퍼스 동갑내기 커플인 세영과 현준은 혼전 임신으로 인해 대학교 졸업 전후로 빨리 결혼한 것 같다. 현준은 새별이가 생겨 어쩔 수 없이 일찍 결혼했을 때도 너는 네 감정대로만 행동해왔다며 다시 재결합을 바라는 듯한 세영에게 나랑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한 것은 바로 너였다며 본인은 과거의 일을 빨리 잊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세영은 새별이가 생겨 어쩔 수 없이 결혼 한 것은 아니라고 현준에게 말하지만 친구인 양궁에게는 자신이 곧 서른이라며 너무 일찍 결혼을 한 것 같다는 말을 한다. 현준 역시 세영과 너무 일찍 결혼을 해서 그녀를 생활에 빨리 얽매이게 한 것을 후회한다고 양궁에게 말한다.
이른 결혼으로 인해 세영은 점점 불안하고 예민해진다. 결혼 후 현준은 대학원에 진학하지만 세영은 딸 새별이를 돌보는데 온 시간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본인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했던 세영은 결국 대학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자기 커리어에 욕심이 많던 세영이 이른 결혼으로 인해 집에서 딸을 돌보는데 온 힘을 쏟을 때 세영의 가장 친한 여자 후배가 전공을 바꿔 현준이 있는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이로 인해 세영은 현준과 후배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비교문학을 전공하는 후배는 현준의 소설에 비판적이기만 세영과 달리 현준의 소설을 인정하고 칭찬해준다. 가장 가까이서 자신의 소설을 비판해주고 또 칭찬해주고 격려해준 것은 너였다며, 현준은 후배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소설의 자료조사까지 도와주면서 늘 현준의 가까이에 있는 후배를 세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급기야 두 사람이 정신적으로 통하는 사이면 자기는 대체 뭐냐고, 나는 밥이나 해주고 시중이 드는 여자냐면서 현준에게 따진다. 현준에 대한 후배 혜민의 마음은 외국으로 유학을 가 있는 동안 그의 소설을 전부 영어로 번역해 학교 친구들과 스터디를 할 정도다. 현준이 이혼했다는 것을 알자 자신에게도 이제 자신에게도 자격이 있는 거 아니냐며 계속 그의 곁을 맴돈다. 차기작으로 신세대 소설을 쓰겠다는 현준에게 신촌, 압구정 등을 돌며 X세대의 사고방식에 대해 여론조사까지 해준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처음 만날 날, 당장이라도 성관계가 가능하다는 응답이 65%나 있다는 사실에 현준은 놀란다. 현준은 결혼은 한번 한다기보다는 한 사람하고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만나고 너무 쉽게 헤어진다며 자신은 이혼 후에도 여전히 세영을 사랑하고 있음을 혜민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혜민과는 처음부터 단지 친한 선후배 사이였을뿐이라는 현준의 말을 과거의 세영은 전혀 믿지 않고 제발 자신과 헤어져달라고 말한다.
여자 입장에서 오해할 만한 행동은 잔뜩 해놓고 단지 선후배 사이라고 주장하는 현준의 태도를 보면 세영에게 이혼 당해도 싸다, 는 생각이 드는데 동진과 은호가 이혼한 이유는 드라마 초반에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은호 말대로 여자문제도 아니고, 도박 문제도 아니고, 폭력 문제도 아니다.
은호와 동진의 티키타카를 보면서 (연애시대에서 가장 웃겼던 장면은 “바지에 똥 쌌어?”)
저렇게 죽이 잘 맞는 부부가 왜 이혼을 했을까 궁금했는데 두 사람이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아이의 사산 때문이었다. 은호는 아이를 잃던 날 밤, 동진이 자기 곁을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밤 동진은 아이를 잘 보내주기 위해 아이 곁에 있었던 것이다. 세영과 현준이 이혼한 데는 여자 후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전에도 두 사람 사이에 문제는 있었다.
세영은 현준이 집에서 소설만 쓰는 것을 못마땅해 했고, 현준은 그런 세영을 위해 시간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 현준의 소설이 팔리지 않자 세영은 취직을 하면서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 일자리를 구한 세영과 현준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아 마음을 상하게 한다.
목소리가 너무 감미롭지 않냐며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 테이프를 사온 현준에게 세영은 작가가 너무 수준이 낮은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가요를 들으면 수준이 낮은 거냐고 되묻는 현준에게 세영은 모차르트나 쇼팽이나 틀어달라고 말한다.
세영은 다른 사람들에게 현준의 소설이 너무 작위적이라고 말하고 여자 후배는 선배님의 소설이 최고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별 거 아닌 걸로 고집을 부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던 두 사람이 이혼 후에는 조금씩 변한 보습을 보여준다.
이혼 후에는 세영이 가요인 이소라의 ‘난 행복해’를 듣고, 현준은 반대로 모차르트나 쇼팽을 찾는다. 현준의 세 번째 소설을 세영이 다니는 영화사에서 극화하면서 두 사람은 일적으로도 엮이게 된다. 현준이 다른 영화사를 택할 듯하다가 세영이 영화 쪽에서는 최고라며 그녀의 영화사와 계약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영은 현준과의 재결합을 기대해보지만 현준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냐며 그냥 계속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말한다. 세영은 그렇다면 자신의 생활에 끼어들거나 궁금해 하지 말라고 대꾸한다.
은호 역시 다시 재결합을 하자고 동진에게 말하려고 하던 찰나 일이 꼬여 동진에게 새 여자를 소개시켜주는 꼴이 되어버린다. 은호는 자신에게 베푸는 동진의 친절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주변에서는 세영과 현준, 은호와 동진에게 다시 합치려면 제대로 합치거나 아니면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하라고 말한다.
동진에게 관심을 보이는 은호의 친구 미연은 은호와 동진에게 서로의 바닥까지 보지 않아서 두 사람이 계속 만날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세영의 동생이자 현준의 처남인 인표는 이미 이혼한 사이면서도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것처럼 구는 두 사람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은호가 동진의 진실을 알게 된 후 동진의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며 자기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장면은 정말 명장면이다. 연애시대에서 은호가 동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감정씬인 노래방 장면은 거의 극 후반부에 나오는데 세영이 현준에 대한 자기 마음을 자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감정씬 장면은 극 초반부에 있다.
세영은 소꿉친구인 양궁과 함께 뤼미에르 극장에 가서 ‘동사서독’이라는 영화를 본다. 화면 속에 장국영과 임청하가 보여서 처음에는 ‘동방불패’ 영화인 줄 알았는데 ‘동사서독’이었다. 지금이야 멀티플렉스가 일반화 되었지만 파파 당영 당시만 해도 거의 단관 개봉이던 시절이었다. 극중 대사를 보면 영화사 사장이 천석짜리 극장을 잡았다는 대사가 있다.
파파에 나오는 뤼미에르 극장을 보니 십년 후 연애시대 방영 당시만 해도, 그곳이 굳건하게 그 자리와 이름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극장에서 장국영을 좋아하던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비록 뤼미에르 극장은 연애시대 종영 몇년 후 폐관되었지만.
동사서독의 임청하는 사랑의 상처 때문에 자아분열을 겪는 인물인데 드라마 속에서 세영이 보는 스크린을 보여준 것은 일견 드라마의 내용과 큰 관계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는 임청하의 대사를 화면으로 보여준 것을 보면 이제 정말 현준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정말 떠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슬퍼하는 세영의 심리를 나름대로 묘사한 것 같다.
세영은 자신이 이혼하자고 하면 현준이 자신을 끝끝내 붙잡을 줄 알았는데 한번 마음이 돌아서니 냉정하게 돌아섰다며 그 사람 무서운 데가 있다고, 양궁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혜민도 선배님은 평소에는 따뜻한 사람 같지만 어쩔 때는 굉장히 차갑고 냉정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세영은 자기 자존심 때문에라도 현준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사람이 아니라며 자신의 지난 선택을 후회한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한편, 현준은 비록 이혼 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고 두 사람의 연애상담소 역할을 하는 양궁에게 말한다. 자신과 있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면 차라리 헤어져서 사는 게 그녀를 편하게 해주고, 그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러나 이혼 후에도 여전히 행복하지 못한 세영을 보며 현준도 갈등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뤼미에르 극장 근처에는 TGI 프라이데이가 있었는데 파파에도 가끔 TGI 프라이데이의 매장이 나온다. (뤼미에르 근처라면 TGI가 아니라 아웃백인 것 같기도 하고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쨌든 수능을 치고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곳을 처음 가봤는데 그곳이 바로 TGI프라이데이였다. 처음 알바한 돈으로 동생에게 저녁을 사주고 뿌듯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TGI를 비롯해 그렇게 많던 패밀리 레스토랑 브랜드도 이제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 역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파파에 TGI가 있다면 연애시대에는 던킨 도너츠가 있다. 던킨 도너츠는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처음 취직을 했을 때까지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던킨 도너츠 매장마저 쉽게 찾기 힘들다. 단지 내가 못 찾는 걸까?
세영은 자신에게 청혼을 하는 영화사 사장의 프로포즈를 거절하는데 그 이유는 ‘누굴 의지하기 위해 결혼하기는 싫다’는 것이다. 세영은 극 초반에는 자신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소꿉 친구를 두고 여자 혼자 살아서 불쌍하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지고, 드라마 결말부에 이르면 망가진 스탠드도 척척 고친다.
연애시대에서는 초반에 이혼 기념일은 어때, 라는 대사가 있는 걸로 봐서 헤어진 지 최소 일년은 넘은 것 같은데 파파는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기억에 없었다. 그런데 정확하진 않지만 딸과 육 개월 동안 같이 살았고 일이 바빠서 아빠한테 자주 데려다 주지 못했다는 대사가 있는 걸로 미뤄볼 때 최소 6개월 전에 헤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세영과 현준을 갈라놓았던 여자 후배는 1년 반만에 석사를 마치고 유학에서 돌아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이혼 시점은 육개월보다 훨씬 전인지 헷갈렸다. 두 사람이 헤어진 시점이 궁금했던 이유는 재결합의 유효시점 때문이다.
드라마 <질투>를 보면 여주인공인 하경의 엄마인 소설가와 신문사 기자인 아빠가 이혼 후 10년 만에 재결합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하경의 아빠는 극중 대사로만 등장하지만.
어쨌든 파파에서 재결합을 하는 시점을 이혼 후 영화사 일을 하면서 자주 마주치는 그 시점이 아니라 미국 유학 전에 자신을 붙잡아달라고 간절하게 말하는 세영을 현준이 매몰차게 거절한 후 1년 뒤이다. 현준은 또 다시 자기 때문에 세영이 좋은 기회를 놓치게 하기 싫다고 말한다.
그동안 세영과 현준은 혼자 있는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졌고, 혼자서도 뭐든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기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도 뭐든 잘 할 수 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파파에 새별이가 있다면 연애시대에는 은솔이 있다. 은솔이 동진과 실전화로 이야기하는 모습은 여전히 몽글몽글하다. 은솔이가 동진에게 아저씨, 제 아빠가 되어주시면 안 돼요? 라고 말하는 장면은 가슴이 아리다. 하지만 동진은 은솔의 아빠가 되어줄 수는 없었다. 동진과 미연의 에피소드가 마무리 되고 나면, 동진의 첫사랑인 유경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진과 유경은 선상에서 결혼식까지 올리게 된다.
동진을 정말 사랑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결혼한 여자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접으려는 은호를 위해 그녀의 여동생인 지호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거짓말을 하고 만다. 지호는 자신이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언니를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지호의 거짓말로 동진과 은호는 기차에서 재회하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유경은 바빠서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지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며, 동진의 곁을 떠난다. 나는 동진의 선택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시청자인 입장에서 드라마를 보면서 은호의 심정을 쭉 따라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진이 유경에게 한 행동은 여자 후배에게 여지를 잔뜩 주고 친한 선후배 사이라고 우기는 현준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현준은 혜민과는 단지 친한 선후배 사이인데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세영을 이해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때는 네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다며 세영에게 사과한다. 그런데 현준은 어쨌든 그 후배와 결혼을 한 것은 아닌데 동진은 심지어 유경과 다른 사람 다 불러다놓고 결혼식까지 하지 않았는가.
유경이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은 작가가 동진에게 주는 면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드라마 속 세영의 친구인 양궁의 말처럼 세상에는 원칙보다 감정이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것이 심지어 현실이 아닌 드라마에서라면 현실 세계의 원칙을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까지 일일이 강요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진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감정대로 솔직히 행동했다. 드라마를 처음 볼 당시에는 그런 동진의 선택을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파파는 OST가 나름 유명한 드라마인데 나는 그 노래보다 서브 커플인 인표와 희수의 러브 스토리에 주로 흘러나오는 그 곡이 더 좋았다. 메인 남녀 스토리에서는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목격하고 각자 내면의 질투심이 고조될 때 흘러나온다. 기억 속에서는 불어로 된 노래인 줄 알았는데, 다시 들어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연애시대 역시 유명한 ost곡이 있는데 나는 노영심의 피아노 곡이 더 좋다.
내 기억 속에서 파파가 밝고 경쾌했다고 생각했던 건 세 남자와 아이들이 한 집에 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빨리 어른이 되어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키장이나 스케이트장, 다트 장면, 당구 장면, 농구 장면 등 한 집에 살던 세 남자가 틈나면 즐기던 여가 활동도 해보고 싶었고 집에서 요리하는 장면이나 집 한켠에 마련되어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는 Bar 등을 보며 막연히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렇게 친구들이랑 한집에 살면서 요리도 하고 저녁이면 놀러 다니고 집에서는 예쁜 bar에서 음료도 마셔야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 음료가 얼음이 필요한 독주인 줄 전혀 몰랐지만. 파파에서 시작된 그런 로망은 미드 시트콤 <프렌즈>를 보면서 더욱 극대화 되었다.
연애시대를 볼 때는 은호와 동진이 친구들이랑 술집에 자주 모이는 게 부러웠다. 이혼을 하고도 한집에 살 수 있는 처남과 매부 사이, 그리고 이혼을 하고도 여전히 무리지어 술을 마실 수 있는 서로의 친구들. 파파와 연애시대의 인물들은 솔직히 너무 쿨해도 쿨하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현실에 전혀 없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런 관계를 보면서 저게 말이 돼? 무슨 드라마 찍어? 라고 생각하다가, 기억의 저편에 묻어둔 이 드라마들이 문득 생각났다.
드라마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라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가 말한 대사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드라마 속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처음 드라마를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 감정들이 보인다. 그만큼 내가 나이 들었다는 뜻일까.
요즘은 새로운 콘텐츠를 접하는 것이 예전보다 힘들다. 새로운 인물들과 친해질 시간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그만큼 감정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데 그게 좀 버겁다. 대신 이제는 미련 없이 헤어졌다고 생각한 과거의 인물들을 다시 살펴보는 일이 즐겁다.
예전에는 굳이 그런 일들이 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즐겁고, 또 그때 내가 왜 그들을 좋아했는지, 다시 그 감정을 회고하는 것이 즐겁다. 아마 헤어졌다가 재결합 한 사람들도 이러한 이유로 다시 만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