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씨티 사진에 보이는 덩어리가 암이 재발한 걸 수도 혹은 단순한 축농증일 수도 있다고 했다.(썩어버린 내 얼굴을 보더니 황급히 축농증 딱지일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하다고도 말했다) 일단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고서 벤치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재발한 걸 수도.."라는 말을 들은 찰나의 순간 느낀 안도감에 의아해하면서.
예전부터 암이 재발한다면 치료를 받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냥 죽어야지 라고. 나는 정말로 마음속 깊은 곳에선 살고 싶지 않았던 걸까. 명분이 있는 죽음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나는 그 안도감에 충격을 받은 걸까? 잘 모르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약을 받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약봉지가 두툼하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햇살과 풍경들은 아름다웠다. 20대 초반에 죽을 수도 있었을 목숨, 공짜로 9년 정도 더 살다가 가니까 어떤 결과가 나오던 욕심부리며 괴로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오늘따라 바깥 풍경이 유난히 아름답다. 그저 약간의 가능성일 뿐인데.. 감수성에 물이 올랐나.. 눈물마저 핑 돌았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하루하루가 악몽 같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지나간 추억들은 그럭저럭 행복한 기억뿐이다. 힘들었던 일은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 완치 후 엄마와 처음으로 맥주를 마신 일. 동생과 베트남을 놀러 가서 즐거웠던 일들, 책을 만들고 좋은 사람들을 잔뜩 만난 일. 괴로워하지 않기로 방금 전에 다짐했는데 그새 마음이 심란해진다. 마음을 다잡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버스 앞자리에는 어린 커플이 앉아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애교를 부린다.
"이이잉~ 하지 마~ 오빠 진짜 시펑 시펑 죽고시펑?"
아아... 남자는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리고 나는 공공장소에서 '펑펑'거릴 만큼 정열적인 사랑을 해보았던가... 기억이 없다. 저런 애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좀 슬프다. 아직은 좀 더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경험해 보고 싶은 일들이 한가득이다. 앞자리 여자아이의 애교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고마워요.
'이이잉~ 나는 아직 살고 시펑~ 시펑 시펑 살고시펑~' 당황하며 침묵을 지키는 남자 대신 속으로 대답하고서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정말 유난히 햇살이 참 이쁘다. 오늘은 저 찬란한 햇살을 닮은 황금빛의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