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 디자이너와 타입 엔지니어, 그리고 그들처럼 사는 모두에 대하여
이 글은 현재 제가 쓰고 있는 새 책(2025년 하반기 출간 예정)에 수록될 산문 중 한 편입니다. 초고 집필을 완료하는 대로 신간과 관련한 내용을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시할 계획입니다. 기대 바랍니다. :-)
“우리는 기업인이 된 듯 밋밋하고 쓸모에만 기댄 고상한 취향과 시각으로 산업화의 영광과 대량 생산의 힘을 즐거워한다. 하지만 산업 사회 밖 사람들, 즉 의사나 변호사, 성직자, 시인 등이 모두 꼭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책임감 있게 한 번에 한 가지 물건만 만들 수 있는 사람들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에릭 길 지음, 송성재 옮김,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 안그라픽스, 2015)
서체 디자이너는 서체를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현업 종사자들은 왕왕 ‘글자를 짓고 그리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서체는 영어로 ‘타입페이스(typeface)’인데 활자(type)의 얼굴(face)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또 ‘글자에 표정을 부여하다’라고 글자 짓기-그리기를 설명하고는 한다. 서체 디자이너는 활자 디자이너, 타입 디자이너, 글꼴 디자이너, 글자체 디자이너로도 불린다. 그들이 제작한 서체 파일을 컴퓨터, 웹, 모바일 등 각각의 사용 환경에 맞게 구조화하여 폰트(font) 파일로 만들고 다양한 시스템에 적용하는 기술진의 총칭을 타입 엔지니어라 한다. 요컨대 폰트는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이 합쳐져야만 성립되는 결과물이다. 엄밀히 따지면 현재 시중에서 서체 디자인과 서체 디자이너를 가리킬 때 흔이 쓰는 ‘폰트 디자인’ 및 ‘폰트 디자이너’, ‘폰트 제작자’, ‘폰트 크리에이터’란 용어는 썩 적확하다 보기 어렵다. 서체는 디자인보호법, 폰트는 컴퓨터 프로그램 저작물로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다. 서체 디자이너에게 글꼴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폰트 설치 오류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타입 엔지니어에게 폰트 클라우드 시스템의 불편 사항 건의는 가능하나, 미음과 비읍의 미흡한 변별성을 토로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시각 디자인 전문 매체의 에디터로서 적잖은 서체 디자이너와 타입 엔지니어의 이야기를 기사화하다 보니 ‘폰트 시장’은 내게도 익숙한 세계가 되었다. 그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서체 디자인, 타입 엔지니어링, 그리고 폰트에 대한 일반 상식을 전파하고 있다. 디자이너도 엔지니어도 아닌 내가 그들의 세계에 정당한 일원으로 편입되기는 어렵겠으나, 그럼에도 그들을 나의 ‘친구’로서 널리 알리고 싶다. 그들이야말로 “책임감 있게 한 번에 한 가지 물건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서체 디자이너가 ‘새로운 글자를 짓고 그린다’ 함은 완성형 한글 11,172자(한글 자모음으로 조합 가능한 모든 글자) 또는 상용 한글 2,350자(문서 작성, 메시지 전송 등 일상적인 문자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정도의 ‘자모음 조합 경우의 수’라 이해하면 적절할 것이다. 완성형에 포함되는 꿻, 롻, 붽 같은 비일상적 글자는 지원하지 않는다.), 영문(라틴 알파벳) 94자, 특수 문자 986자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의미다. 서체는 크게 제목용과 본문용으로 나뉘는데, 명칭 그대로의 용도로 쓰인다. 매장 간판, 광고 카피, 영화 포스터, 책 표지 등에는 제목체가, 개인과 기업의 각종 인쇄물 본문처럼 줄글이 주를 이루는 환경에서는 본문체가 알맞다. 서체 디자이너는 이러한 사용성을 고려해 한 자 한 자를 설계한다. 제목체라면 크게 확대해도 획이 깨지지 않도록 가다듬고, 본문체는 10포인트 이하로 크기를 줄여도 가독성이 유지되게끔 매만진다. 이 밖에도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따지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라고 서체 디자이너들은 이야기한다.) 굵기 체계도 관건이다. 평이하게 라이트·미듐·볼드로 갈 것이냐, 아니면 울트라라이트·씬(thin)·미듐·볼드·엑스트라볼드·블랙 식으로 세분화할 것이냐. 서체 디자인 공정이 기본 한 달에서 최장 수 년이 걸리는 배경이다. 엔지니어링 쪽도 지난하기는 매한가지다. 사용 환경별 서체의 깨짐 현상, 기기 운영 체제와의 충돌 유무, 향후 배포될 신규 안드로이드/iOS와 윈도/맥OS 버전과의 호환성 검토 등 갖가지 점검을 반복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폰트 상품’이 출시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객들의 만만불측한 사용성 평가를 일일이 헤아려, 디자이너는 수정 작업을 하고 엔지니어는 그 수정안을 바탕으로 또 테스트를 한다.
이런 업무 특성상 서체 디자이너와 타입 엔지니어는 과거의 작업을 오랜 기간 현재 진행형으로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A고딕’ 팀이 폰트 출시 후 ‘B명조’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로도 여전히 ‘A고딕’을 손보는 현장을 나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런 노고를 어루만질 적당한 언어가 디자이너도 엔지니어도 아닌 내게는 부재한다. 유명 서체 ‘길 산스(Gill Sans)’의 디자이너 에릭 길의 문장을 빌려 온 이유다. 비단 폰트 시장뿐 아니라, 대량 생산 시대에도 “한 번에 한 가지 물건만” 만드는 “꼭 필요한 존재”들의 일터가 오래도록 안전하기를 염원할 따름이다.
글 임재훈(작가, 디자인 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