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소일기>
고등학교 2학년 때, 저는 매일 체크리스트를 적던 학생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계획적인 아이였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하루 계획을 전부 달성할 때까지 자신을 몰아세우는 아이였죠.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교무실로 부르셨습니다. 체크리스트를 적는 바로 그 노트를 가져오라고 하시면서요.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셨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하니? 이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터졌고, 교무실에서 한참을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의 아주 작은 관심, 그게 강박에 사로잡힌 열여덟 저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겁니다.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은 관심을 베푸시던 그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이 영화도 같은 맥락에서 그때 그 선생님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연약한 새싹을 건강한 나무로 키우는 세상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작품, <연소일기>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연소일기>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연소일기>는 2024년 11월 13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연소일기
Time Still Turns the Pages
한 고등학교 교실의 쓰레기통에서 주인 모를 유서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다. 대입 시험을 앞두고 교감은 이 일을 묻으려고 하고, 정 선생은 우선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부터 찾아보자고 한다. 편지와 학생들의 글씨 모양을 비교하던 정 선생은 편지 속 한 문장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든다. 정 선생은 일기를 읽으며 묻어뒀던 아픈 과거와 감정들을 마주하고, 학생들을 위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데… (출처: 씨네21)
감독: 탁역겸
출연: 노진업, 황재락, 하백염
<연소일기>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롯 구성의 영화입니다. 영화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과거는 초등학생 '요우제'와 '요우쥔' 형제의 이야기를 다루는데요. 쓸모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는 아버지와 폭력적인 남편에게 복종하는 어머니는 '요우제'와 '요우쥔'을 철저하게 차별합니다. 동생 '요우쥔'은 우수한 성적과 뛰어난 재능으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지만, 형 '요우제'는 비교, 무시, 폭력, 무관심 속에 내버려지죠. '요우제'는 일기를 쓰면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그 안에는 아무도 몰랐던 '요우제'의 진심이 담깁니다.
<연소일기(年少日記)>, 직역하면 '어린아이(年少)의 일기'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쩐지 '연소'라는 단어가 빛과 열을 내며 타는 연소(燃燒)로도, 불길이 인근에 옮겨붙는 연소(延燒)로도 읽힙니다. 병들어버린 능력주의 사회를 내면화한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타들어 간 아이(형 '요우제')와 가정폭력을 목격하며 치유할 수 없는 그늘과 상처를 갖게 된 아이(동생 '요우쥔'). 가족의 비뚤어진 울타리가 어떻게 연소(年少)의 연소(燃燒)와 연소(延燒)를 만들어내는지 영화는 천천히 설명합니다.
현재의 이야기는 교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유서의 주인을 찾아다니는 '정 선생'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다른 선생들은 "요즘 애들이 문제"라는 말로 어물쩍 넘겨버리려 하지만, '정 선생'은 그때 그 일기장의 내용과 유사한 유서를 무시하지 못하죠. 학생들을 수소문하며 유서를 쓴 사람을 찾기 위해 무던한 애를 씁니다.
영화를 감상하다가 문득 그의 행동이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고작 쪽지 한 장일 뿐인데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지나치게 혼란케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금세 부끄러워졌습니다. 수험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이런 일은 쉬쉬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은 능력주의에 빠진 '요우제' 가족들의 가치관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수면 위로 꺼내야 할 것을 쉬쉬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우울로 내모는 사회를 만들고 있을 텐데 말이죠.
현재 플롯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출은 유서를 작성한 아이를 찾으려는 '정 선생'의 시점에서 죽음에 관해 서로 다른 고민을 하는 반 아이들의 내면이 보이스오버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이는 '정 선생'의 상상에 불과한 장면이었으나, 오늘날 불안 세대의 단면을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하는 연출이기도 했지요. 이제껏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타들어 간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눈길 한 번을 준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정 선생'처럼, 그리고 저의 담임 선생님처럼,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어른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고통을 호소하는 아이는 안아주어야 하고, 고통을 호소하지조차 못하는 아이는 찾아내야 합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우울증 진료를 받은 아동·청소년은 5만 명이 넘습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동·청소년도 200명이 넘지요. 이 수치는 매년 역대 최고 수치를 갱신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세상, 그 사실을 절대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One-Liner
감정 과잉은 최소화하고, '연소'의 고통은 최대한으로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