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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영화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 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나는>

by 방자까

1) 일본 영화

2) 로맨스 영화

3) 제목이 긴 영화


저는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영화에 편견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대충 이런 내용이겠거니 하고 짐작해 버리지요. 편견이 있다고 해서 이런 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꺼이 챙겨보는 애착 어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아는 맛'에 더 끌리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제목이 무진장 긴 일본 로맨스 영화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 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나는>을 챙겨 보았고, 앞으로는 그런 편견을 갖지 말아야 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는 맛을 기대하며 시켰는데 더 맛있는 메뉴가 나와버렸거든요. 예상치 못하게 새로운 메뉴를 발견한 그 기쁨을 지금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 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나는>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 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나는>은 2025년 11월 26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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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무미건조한 일상을 반복하는 ‘토오루’. 그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하나뿐인 친구 ‘야마네’와 아르바이트 동료 ‘삿짱’뿐이다. 어느 날, ‘토오루’는 캠퍼스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쿠라다’와 마주치고 사소한 우연이 이어지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회색빛 같던 그들의 하늘이 색을 입기 시작하던 그때, 예기치 못한 사건이 그들의 진심을 흔들기 시작하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오오쿠 아키코
출연: 카와이 유미, 하기와라 리쿠, 이토 아오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구나."


주인공 '토오루'는 비가 오지 않아도 양산을 푹 눌러쓰고 다니는 무기력한 대학생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눈에 더 띄겠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이 만든 공간 안에 머무릅니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 식당에서 나 홀로 꿋꿋하게 국수를 먹고, 수업 중에 출석표를 내고 쿨하게 나가버리는 당고 머리의 학생 '사쿠라다'를 보게 되죠. '토오루'는 출석표를 대신 내달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존재를 슬쩍 알려보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 이용하는 줄 알았던 건물 뒤쪽 샛길에서 우연히 '사쿠라다'를 마주칩니다.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싶었던 두 사람은 우연의 만남 끝에 빠르게 가까워지죠.


영화는 다양한 장면을 통해 어쩔 수 없이 티 나고 마는 심애(深愛)의 마음을 그려냅니다. '토오루'는 '사쿠라다'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거지를 통해 우리는 그가 '사쿠라다'에 푹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소리를 최대한 크게 키워보았냐는 말에 집에 돌아가 곧바로 리모컨을 붙잡고, 좋아하는 경구가 나오는 책을 추천받자 도서관에서 바로 읽어보는 모습들이 그러하죠.


그런데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도 쉽게 티가 납니다. 이는 '토오루'가 온천 청소 아르바이트 동료 '삿짱'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음악 동아리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삿짱'은 '토오루'에게 '첫사랑 크레이지'라는 노래를 몇 번이나 들어보라고 권하지만, 그를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토오루'는 노래를 들어볼 생각조차 없죠. 아르바이트를 도와준 대가로 '토오루'와 식사 약속을 잡게 되자 신나서 펄쩍펄쩍 뛰던 '삿짱'의 티 나는 모습과는 대비됩니다.




청춘의 고백이 장황할 수밖에 없는 이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토오루'의 마음을 눈치챈 '삿짱'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는 어둑한 밤길에서 그를 향한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을 건네는데요. 영화가 뚜렷하게 묘사하는 '토오루'의 두 가지 마음(좋아하는 마음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은 '삿짱'의 고백을 더 아프게 만듭니다.


'삿짱'의 고백은 장황합니다. 너를 좋아한다고,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전에 내 마음을 고백했으면 더 좋았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했더라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 걸 안다고, 그래도 정말 좋아했다고. 말하면 말할수록 비참해지고 서러워지는데도 계속 이야기합니다. 슬픔이 잔뜩 묻은 목소리, 눈물을 한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말하죠. 여기서 말을 멈추면 앞으로 다시는 이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까, 그를 향한 마음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으니까. '삿짱'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합니다.


가로등 저편에 있는 '토오루'는 반응 하나 없이 가만히 듣고 있는 가운데, '삿짱'의 고백은 그렇게 5~10분가량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이 꼭 어린 날에 겪는 얄궂은 사랑의 바로 그것이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이렇게 길 수밖에 없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장황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란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매일의 하늘이 '세렌디피티'로 느껴지는 때


"오늘의 하늘이 가장 좋아"라는 말은 '사쿠라다'와 '토오루'가 각각 돌아가신 아빠와 할머니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오늘은 매일 갱신되고, 매일의 하늘이 언제나 맑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극 중에는 '토오루'와 '사쿠라다', 그리고 '삿짱'의 흐린 날이 모두 등장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지요. 맑은 날만을 기다리게 되지만, 흐린 날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은 당연하게도 때로 맑기도 흐리기도 한데, 맑은 날만큼 흐린 날을 즐기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쩐지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오래 남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 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나는>은 흐린 날 속에서 맑은 날을 기다리던 청춘들이 이윽고 흐린 날을 겪어내는 법을 배우는 영화입니다. 흐린 하늘을 보고도 "오늘 하늘도 좋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요.


매일의 하늘을 '세렌디피티(우연한 행복)'로 받아들이는 인물도 영화에 나옵니다. '토오루'와 '사쿠라다'가 찾는 카페 레스토랑의 주인장인데요. 이 가게는 핫케이크의 메뉴 이름을 '프리스비 구이(원반 구이)'라고 부르는 괴이한 작명법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 메뉴 중에서 유독 오므라이스만큼은 정직하고 평범하게 '오므라이스'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사장님은 아무도 오므라이스를 주문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특이한 이름의 메뉴들을 점점 더 많이 내걸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죠. 과거에 오므라이스를 더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은 영원히 그렇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누군가를 분명하게 상실했음흐린 날의 기억을 일상 곁에 두고 있음을 모두 느낄 수 있습니다. 주인공 인물들 곁에 이 인물을 배치한 이유, 이것이야말로 매일의 하늘을 세렌디피티로 여기는 자세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청춘'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신기합니다. 첫 느낌은 달콤하지만, 지나간 경험을 돌이켜보면 쓰기도 한 단어들이지요. 단순한 로맨스 영화에 그치지 않는 지점들을 갖춘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청춘'과 '사랑'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리뷰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작은 반전도 있으니, 두 단어의 양면처럼 풍부하고 짙은 감각으로 가득한 영화를 직접 확인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처럼 제목이 무진장 긴 일본 로맨스 영화에 편견을 갖고 있으셨던 분들에게 특히 더 추천합니다. 편견을 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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