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cret Y Dec 15. 2023

서른에 만난 남자들 - 1월

Chapter 1. 이별

내 서른의 시작은 이별이었다.

갑작스럽다 생각했지만 어쩌면 예견되어 있던 이별이었던 것 같다. 여자 나이 서른에 그것도 1월부터 대차게 이별을 맞이하게 되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첫 직장에서 만나 3년을 연애했고, 식성부터 잠자리까지 잘 맞는 편이었다. 크고 작은 다툼도 있었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려 하며 나름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우리였다. 그럼에도 헤어지게 된 건 다름 아닌 결혼 문제였다. 내 나이 20대 후반, 주위에서 하나 둘 결혼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먼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제일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당시 남자친구의 친구들도 하나 둘 결혼하게 되어 종종 결혼식에도 함께 참석했었다. 그런데 그게 발단이었을까. 그동안 우리 대화에 없었던 '결혼'이라는 주제가 어느새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나도 결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으며 남자친구와의 결혼생활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은근슬쩍 회피하던 그 시그널을 처음부터 알아차렸다면 얼마 남지 않았던 20대의 마지막을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보냈을 텐데. 아무래도 난 듣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기대가 현실에서 실망으로 다가오자 나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결혼 문제로 헤어지게 되었다고 앞서 말했지만, 사실 결혼하자는 얘기를 구체적으로 꺼낸 것도 아니었다. 모든 연인이라면 거쳐간다는 '만약 ~라면 어떨 거 같아?'의 지옥으로 끌고 갔다는 표현이 맞을까. 그때의 난 브라이덜 샤워를 하고 오던, 결혼식을 다녀오던, 신혼 집들이를 다녀오던, 그 끝에는 항상 남자친구에게 가 물었다. 우리 둘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온갖 가정을 갖다 붙이며 괴롭혔던 것 같다. 그때는 왜 그렇게 의미 없는 질문과 답에 집착했던 걸까. 늘 속 시원하지 않은 대답에 서운해했고, 회피하려는 모습에 섭섭해했다.


그래도 난 이 사람을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결혼 생각이 없다는 그 말에 나도 당장 생각이 있는 건 아니라며 애써 덤덤한 척했고, 동조하는 척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사귄 연인, 아니 이미 결혼을 한 부부라도 대화가 부족하면 결국은 불행해지는 것 같다. 결혼에 대한 얘기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그 얘기를 꺼내기가 꺼려졌고, 부정적인 생각은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좋은가', '왜 좋은가', '이 사람과 만난 3년은 뭐였을까', '이 사람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걸까', '나는 지금 이 사람과 만나는 게 행복한가', '만약 앞으로 이 사람의 미래에 내가 없다면 더 이상 만남을 지속하는 건 의미가 없지 않을까' 등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 뿐이었으니 그 결론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혼자만의 생각은 이렇게 파국을 몰고 온다. 내 머릿속 모든 질문에 대답은 명확하지 않았고 물어볼 용기도, 대답을 들을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면 '헤어져야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헤어지자는 말에 그도 함께 눈물을 흘렸지만 불안한 내 마음을 다잡아주었다던가 붙잡았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이제야 깨닫게 된 거지만 아마 그 사람도 나도 서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결혼할 사람이 아니었던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고 참 많이도 울었다. 3년이란 시간이 무색하게 그 끝은 생각보다 짧았다. 참 불행하게도 내 생일을 일주일 가량 앞둔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마침 이직도 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이별 따위 금방 극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이 싫어져서 헤어진 게 아니라 당장 닥친 일도 아닌 문제 때문에 쉽게 인연을 끊어버린 것 같다는 후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차단했던 번호를 풀고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놓고 뻔뻔하게도 연락했다. 비 오는 어느 날 밤늦게 야근을 하고 잡히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충동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 받을 것만 같았던 긴 통화 연결음 끝에 술에 취한 목소리로 "응"이라고 하는 순간 안도와 그리움의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그렇게 나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잡았고 이번에 만나면 제대로 솔직하게 얘기해보고 싶었다. 술의 힘을 빌려 참 솔직하게도 말했던 것 같다. 이대로 놓치고 싶진 않다고, 한번 깨진 만남이 처음과 같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가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라면, 나와 생각이 같다면 다시 한번 만나보자고, 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마음이 남은 것 같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사람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같이 술을 마시면 늘 막차가 끊길 때까지 아쉬워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우리였다. 굳이 막차 시간에 맞춰 지하철역에 데려다준다며 그만 일어나자, 했고 나는 지하철역까지 가는 그 길이 너무 짧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헤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역에 도착했고 몇 대의 열차를 보내고서도 내가 가지 않으려 하자, 그는 이제 그만 가라며 차갑게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꾸역꾸역 눈물을 참았다.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빈자리가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문 앞에 서서 까맣게 지나가는 터널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울었다. 이렇게 우리, 이제 진짜 끝이구나.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우연히 친구가 불러낸 술자리에서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 (덕분에 새로운 인연이 어찌어찌 이어지긴 했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로 다뤄보려 한다.) 다음 날 정신 차리고 카톡을 보니 집에 잘 들어갔냐는 카톡이 와있었다. 그때 나는 그 연락이 반갑거나 기쁘다기보다 '뭔데 내 걱정을 하지, 집에 가든 말든 뭔 상관이지'라는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대꾸도 하기 싫어서 내리 잠만 자다 이미 어두워진 저녁이 되어서야 힘겹게 몸을 가누면서 일어났다. 바람이나 쐴 겸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온 순간 전화가 '전 남자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래도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졌다. 잘 들어갔는지 묻는 싱거운 그의 말에 나는 무슨 상관이냐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조금은 다정한 말투로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었다고 말했다.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나를 걱정했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살짝은 누그러진 마음으로 무슨 일로 전화했냐 물었더니 뜬금없이 어제 내가 했던 말들이 진심이냐고 되물었다. 기억을 더듬어 내가 무슨 말을 했었나 생각하는 와중에 그가 말했다. 앞으로의 일은 당장 생각하지 말고 지금 좋은 감정으로 만나자는 나의 고백에 용기 내 전화했다고. 네 말대로 다시 만나보자고. 여하튼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고, 나름 드라마틱한 재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회라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Lesson 1. 사랑은, 아니 인생은 가끔 예상치 못해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그토록 원할 땐 잡히지 않다가 포기하려고 놓아버리면 달라붙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