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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Jan 14. 2020

노래도 못하고 그림도 못그리지만 04_(2)

너무너무 힘든 하루인데 잘 털어내고 내일을 다시 맞이하는 이야기요!


(앞에 이어서) 

여자는 아스팔트 위에 늘어져있던 침덩어리의 형태를 잊으려 노력했다. 돌솥에서 밥알이 파삭구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숟가락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꾹꾹 숟가락을 눌러 밥알과 낙지들을 섞었다. 드디어 오늘의 첫 곡기였다. 낙지가 담긴 돌솥비빔밥보다, 함께 나온 콩나물국의 따뜻한 기운이 여자의 속을 더 다스려주었다. 밑반찬인 마늘쫑의 상큼한 맛도 말라가던 식욕을 돋우어 주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식당의 주인은 부산스럽게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자는 주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있는 듯 없는 듯 밥을 먹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허기를 채우고 나니 조금은 기운이 나는 듯 했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자궁의 고통은 계속 찾아왔다. 여자는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편하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운동화를 신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의 자취방 침대 위 전기장판의 힘은 강력했다. 이불 속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직 팩스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나온다면 기존 여권을 갖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하면 여권신청까지 할 수 있잖아? 여자는 망설였다. 오늘 일을 다 처리하지 못하면 또 며칠이 걸릴 것이다. 여자는 불안했다.      



또다. 또 예상보다 일들이 미뤄지고 있다. 왜 이럴까. 아침부터 서둘렀는데도 왜 계획한 일을 다 처리하지 못하는 걸까. 젖은 채로 굳어버린 스타킹이 돌처럼 딱딱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천천히 엄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접었다 폈다. 그냥 이대로 조금만 더 고생해볼까. 여권발급신청은 다른날 하더라도 팩스는 맡기고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여자는 핸드폰 홈버튼을 한번 눌렀다. 아직 저녁 과외수업 전까지 아직 세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집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편하게 두시간 정도밖에 못 쉴 것 같았다. 집을 나설 때의 여자의 계획은 사진을 찍고, 팩스를 부친 후, 친구가 추천해준 카페에 가 글을 쓰고, 과외를 갈 생각이었다. 그 중 한 일은 사진을 찍은 것 뿐이었다. 여자는 다시 홈버튼을 두 번 눌러 폰 액정에 검색창을 띄웠다. 주변의 팩스를 부칠 수 있는 곳을 검색했다. 구청에 가면 무료로 해준다던 얘기를 들어본 것도 같았지만, 민원으로 바쁜 곳에 굳이 팩스전송의 수고로움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는 다시 차가운 공무원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이 번거로웠다. 오른 의료보험료는 사실 이 모든 번거로움에 대한 대가가 아닐까. 여자의 이성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여자는 다 젖은 구두 안으로 역시 물기에 젖은 언 발을 우겨넣고 일어섰다. 밥값을 계산한 뒤 식당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는 약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랫배의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누가 자궁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었다. 아차.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사는 일이 더 시급했다. 지금 먹어두지 않으면 고통 때문에 과외할 때 학생을 제대로 지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열 번 넘게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쓰게 될 것이고, 학생에게 오답을 말한 자신 때문에 선생님이 화가 났다고 오해를 사게 될 것이다. 이쯤되자 여자는 자신의 예민함은 왜 사전에는 발휘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어째서 꼭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예민해지는 것인가. 여자는 두리번거리며 약국을 찾았다.     



생리통 약 좀 주세요.      



밥과 국으로 기세를 꺾었다고 생각했는데, 겨울비의 냉기는 대단했다. 약국 문을 들어서며 여자는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더군다나 허겁지겁 먹은 끼니가 여자의 몸에 원피스를 끼게 만들었다. 한층 더한 불편함이었다.      



 앗!     



정수기로 물을 뜨던 여자가 간이 종이컵을 놓쳤다. 따뜻한 물을 먹고 싶었던 여자가, 뜨거운 물을 담다가 손을 데인 것이다. 잠시 눈을 뗀채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물이 담기면서 우묵해진 모양 위로 뜨거운 물이 넘쳐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컵은 다시 평면으로 납작해져 있었다. 물이 사방에 튀었다. 얼얼해진 손을 감싸쥐고 여자는 연신 ‘죄송합니다‘ 인사를 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 여자에게 약사는 진통제를 결제한 카드와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은 버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여자는 순순히 약사가 내민 영수증까지 카드와 함께 받아들었다. 심하게 데이진 않았지만, 우산을 받치고 가는 여자의 손이 벌갰다. 약사는 내가 찬물을 받다가 컵을 놓친 줄 알겠지. 설마 뜨거운 물이란 걸 알았으면, 이렇게 나를 그냥 보내지는 않았겠지. 여자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서운함을 증폭시켰다. 다시 팩스를 부치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구두도, 스타킹도, 꽉 끼던 원피스도. 생리대를 들고 화장실로 뛰쳐 들어가 새 생리대로 갈았다. 혹시나 생리혈이 샐까봐 두 겹으로 붙였다. 여자는 얼른, 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빨아놓았던 수면잠옷을 입고 드디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한 몸 누일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자는, 속이 상했다. 결국 팩스는 못 부쳤다는 생각에. 오늘치 글은 쓰지 못했다는 생각에. 뒤척이다 쓸린 손이 따끔했지만 여자는 모른 척 잠이 들었다.           




“선생님, 오늘 과외 일곱시 아니에요?”          



학생의 카톡을 시작으로 학생의 어머니의 문자, 학생의 어머니의 전화 몇 통이 와 있었다. 여자가 잠을 깼을 때에는 이미 저녁 여덟시가 넘어 있었다. 알람을 맞춰놓지 않은 채, 전기담요를 켜놓고 잔 것이 실수였다. 타닥 타닥. 후두두두둑. 어두워진 창문 밖으로 빗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차라리 아침이면 좋았을텐데. 여자는 오늘 밤을 어떻게 맨 정신으로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불을 들쳐보니 다행히 피가 새지는 않았다. 어쩐지 계속 신경쓰여 중간부터 엎드려 자서였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그 순간에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자신 때문에 실소가 나왔다.           



한번의 헛웃음 뒤 여자는 이십여 분을 울었다. 처음엔 한방울 눈물이 흘렀는데, 그 이후로 멈춰지지가 않았다.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매일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저녁 6시까지 일을 하는지, 자신은 고작 여권을 재발급 받고, 팩스를 보내는 일도 이렇게 힘에 부치는데. 도무지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여자는 꺽꺽 거리며 울었다.



울다가 지친 여자는 일어나 앉아 방안을 둘러보다 더 크게 울었다. 혼자니까 더욱 마음을 놓고 운 것인지, 혼자라서 더욱 외로워져 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자신에게 분명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고작 이런 일로 이렇게 길게 울 수는 없는 것이다.      



울음이 멎자, 여자는 과외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날짜를 착각했노라고, 다른 수업이 있었는데 조정하지 못했다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학생과는 카톡으로 다시 수업날짜를 잡았다. 공단에 팩스를 보내기 위해 출력했던 서류들이 비에 맞아 울퉁불퉁해 진 채로 가방 안에 수그리고 있었다.           




여자는 난방의 온도를 높였다. 여자가 올 겨울 난방의 온도를 올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따뜻해진 겨울 날씨에 전기담요와 수면잠옷, 털 슬리퍼 만으로도 충분히 겨울밤을 날 수 있었다. 싱크대 옆 삼각형 모양의 다용도실에서 우우우웅 보일러의 작동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동 중을 알리는 노란 불빛이 방 안 보일러 작동기에 들어왔다. 맨발로 장판 위를 밟았다. 아직 차가웠지만, 여자는 털 슬리퍼를 다시 신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장판 위에 펄쳐놓기 시작했다. 수입이 많지 않아, 몇 장 펼치지도 않았는데 종이는 동이 났다. 여자가  해온 일들. 여자가 작년 한 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번 금액들이 종이마다 명시되어 있었다. 액수는 하찮았지만, 그 면적은 좁은 자취방의 반을 덮고 있었다. 서류가 더 많았다면 방을 채우고도 다 못 펼쳐서 또 불편했겠지. 여자는 부은 눈을 비빈 후 장판 위로 손바닥을 갖다 대 보았다. 온기가 돌고 있었다. 손끝으로 따스함을 느끼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받아야 할 해촉증명서가 더 많았다면 이런 쪽방에서 살고 있지도 않겠지. 그런 날이 온다면 팩스부터 렌트할거야. 여자는 또 웃음이 나왔다. 구매는 아니고 렌트라니. 상상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따뜻해진 방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물끄러미 해촉증명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권재발급도, 팩스전송도 어려운 여자가 그래도 해온 일들이 있었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자신을 이제 그만 몰아세우고 싶었다.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음주가 되면 다 끝날 일들이다. 생리도, 내리는 비도, 팩스 전송도, 여권발급도. 방바닥에서 구겨진 종이들이 제모습을 찾아갈 동안, 여자는 핸드폰으로 내일의 날씨예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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