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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신과 사후세계와 헤드기어

0과 1의 애프터라이프

by 구의동 에밀리

시작 마을의 분수대를 뒤로 하고, 나는 연금술 공방으로 돌아갔다. 공방도 이전 모습과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아무리 기다려도 줄리엣은 공방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하긴 내가 줄리엣을 죽였다는 혐의 때문에 전기의자형에 처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나 이 게임은 지나치게 디테일에 집착하니까, 사건의 피해자가 NPC라는 이유로 다시 살아 돌아오게 할 리도 없고.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은 처음부터 깡그리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내가 지금껏 일궈온 게 얼마인데, 그걸 다시 다 하라고 하면 막막한 나머지 게임을 그대로 접을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아까의 감각이 너무도 생생해서 놀라웠다. 현실 세계에서 죽는 것도 아니었는데, 죽음을 앞둔 시간이란 너무도 생경했다. 게임에서도 이러한데, 진짜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사후세계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다면 그대로 내 모든 기억은 사라지고, 내 인생도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는 걸까?


이래서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걸까? 사후세계에 대해 준비된 스크립트를, 죽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챙기려는 목적으로?


그러고보면 나는 무교인 주제에 사후세계에 대해서 따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왔으니까. 혹은, 어차피 죽게 된다면 그 때 쯤에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나도 좀 종교를 가져봐야 하나? 절이나 성당에 가 볼까? 그런데 그러려면 현생을 살면서 주말마다 시간을 내야 할 텐데, 그건 좀 부담스럽다. 그럼 그냥 게임하면서 여기 캐릭터들처럼 나도 여신님을 믿으며 신전에 한 번씩 가 볼까? 그런다고 게임 속 여신님이 진짜 믿어질리야 없겠지만, 어차피 예전부터 여신 관련된 스토리가 궁금하긴 했으니까. 겸사겸사 알아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지도…….


한편, 줄리엣은 머리에서 헤드 기어를 벗고 있었다.


"와, 이거 대박인데?"


줄리엣은 헤드기어를 옆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던 사람이 줄리엣이 앉아있던 자리에 다가와 앉았다. 그가 머리에 헤드 기어를 쓰는 사이, 지나가던 한 사람이 키오스크에 자기 전화번호를 입력하고는 '대기번호 08번'이라는 글자를 확인하고 갔다.


"이제 그만 하려고?"


나는 줄리엣에게 물었다.


"그게, 더 하려고 했는데, 죽어버렸어."

"엥? 이거 죽을 수도 있는 게임이야?"

"원래는 안 죽는데, 내가 설정에서 죽으면 그냥 처음으로 리셋되게 바꿔놨어."

"아니, 그런 짓을 왜 해?"

"그래야 실감나니까?"


어이가 없었다. 줄리엣과 함께 체험관을 빠져나왔다. 작은 동네에 걸맞는 작은 체험관이었다. 흡사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같은 규모였다. 그래도 게임 홍보관이 있는 것을 보니, 이런 무명의 바닷가 마을이라 할지라도 관광객이 꽤 오가는 모양이었다.


"너도 해보면 재밌었을 텐데! 아쉽다~"

"나는 게임보다 그냥 현실에서 악기 연주하고 그런 게 더 좋아. 그래도 다행이다, 재밌었나 보네."

"응! 약초도 캐고, 연금술도 배우고, 캐서린이라는 NPC랑도 친해지구~"

"그새 친구까지 만들었어? 너도 참 대단하다."

"보니까 그냥 NPC가 아니더라구. AI로 움직이는 거래! 그래서 그런지 얘도 나를 되게 친하게 대해줘서, 줄리엣 줄리엣 하면서 연금술 재료 캘 때 같이 데려가주기도 하고 그랬어. 그러다 죽었지만."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어느 지점이 걸렸다.


"줄리엣? 너 게임 아이디를 실명으로 지었어?"

"작명 귀찮아……."


줄리엣은 게임에서 있었던 일들을 줄줄 읊어주었다.


"……그러다가 엄청 큰 괴물이 나온 거야!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말이고, 손에 든 창도 무시무시하고~"

"그래? 어떻게 해치웠어?"

"난 아무 마법도 못 배웠으니까 그냥 구경만 했지!"

"당당하잖아?"

"근데 캐서린이 헬파이어를 팡~하고 날려서 한방에 물리치더라구. 진짜 쎈 NPC였나봐! 근데 나한테 왜 안 무서워하고 있었냐고 물어봐서, 죽어도 별일 없다고 얘기해줬어."

"뭐? NPC한테 이거 다 게임 속 세상이라고 얘기해버린 거야?"

"아니, 그러는 건 안된다고 아까 직원분이 알려주셔서~ 당연히 적당히 돌려서 말했지."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어냈구나."


게임 체험관 바깥은 푹푹 찌는 날씨였다. 햇볕은 따가웠고, 바람결에 바다 특유의 미끈하고 짭짤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 냄새는 마치……


"……성게알 미역국."

"응?"

"배고프다구. 너 게임 하는 거 기다리느라 점심 시간도 지났어."

"버섯 전골 먹으러 가자. 나 거기서 버섯 엄청 캐고 있었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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