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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헤어디자이너

미용실 집 딸로 불린 서른일곱 살의 일기

by 진심어린 로레인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본다. 우리 집이 어떤 가게를 연다면? 그 가게가 어떠냐에 따라 만족감은 천차만별이겠지. 만약 치킨집이라면, 1일 1 치킨을 할 수 있다는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슈퍼마켓이라면 다양한 과자를 맛볼 수 있겠다는 달콤한 상상을 할 것이다. 내 기준에서 가장 부러운 친구는 문구점을 하는 친구였다. 갖고 싶은 다이어리와 형형색색의 볼펜들을 하나씩 책가방과 필통에 넣어 다닌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을 것만 같았다.


우리 집은 미용실을 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니까 어언 23년이 되었다. 엄마는 결혼 전, 지역 중심가에서 인기 있는 미용실 헤어디자이너였다고 한다. 스무 살 중반 한창 일을 배우던 시기에 결혼을 하면서 재능을 내려놓았다. 시간이 흐르고, 삼 남매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던 시기, 다시 말하면, 학령기의 자녀들을 한창 뒷바라지하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던 시기에 엄마는 다시 미용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때 엄마 나이가 40대 중반이었을 텐데, 20년 가까이 멈췄던 가위질을 어떻게 다시 할 용기가 생겼을까?


지금 생각하면 엄마도 언젠가는 다시 미용사로서 일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잠재되어 있던 일에 대한 동기가 적절한 타이밍을 만나 분출한 것이다. 경력보유여성을 위한 재취업 지원 프로그램이 잘 되어있는 지금에 비해 그 당시에 엄마가 다시 일하기 위해서는 집 근처 미용실 문을 일일이 두드려야 했다. 낮은 처우에도 일을 배우기 위해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그 미용실은 엄마보다 한참이나 어린 부부 미용사가 원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랜 갭 이어를 거친 엄마가 그분들의 기준에 맞춰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엄마는 매일 일을 나갔다.


다시 감각을 키우기 위해, 엄마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헤어커팅을 잘하려면 다양한 실습 경험이 필요한데, 엄마는 종종 딸들에게 머리 자르고 싶냐고 물었다. 설득에 넘어간 나는, 휴무일에 맞춰 주일 한적한 오후, 엄마 손에 이끌려 처음 그 미용실을 방문했다. 그 당시 내 눈에는 꽤 모던한 인테리어에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미용실처럼 보였고, 나는 한쪽 자리에 앉아 처음 보는 미용사로서의 엄마를 마주했다. 한창 머리를 자를 준비를 하는데, 마침 원장 부부가 잠깐 미용실에 들러 인사를 나누었다. 그 순간, 만약 엄마가 계속 미용사로 일을 이어갔다면 이런 샵 하나쯤 가지고 있었을 텐데... 생각을 해봤다.


엄마는 꽤 민첩하게 손을 움직였다. 나는 어색함 속에서 엄마의 집중된 눈과 손을 관찰했다. 엄마의 과감한 가위질에 내 긴 생머리는 차근차근 잘려나갔고 어느새 찰랑 거리는 단발머리가 되었다. 기억 속에서 엄마가 내 머리를 해준 첫 헤어컷이었다. 어떻게 보면 약간 비대칭적인 머리기도 했다. 엄마의 첫 작품에 뭐라고 토 달기 싫어서 말하려다 말았지만. 그렇게 엄마는 새로운 커리어로 첫 발을 내디뎠다.


그 뒤 엄마는 빠르게 기술을 익혀서 1년 만에 본인의 샵을 차렸다. 여유가 없었던 터라, 다른 지역에서 미용실을 정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구와 기기를 합리적으로 인수했고 마침내 집 근처에 미용실을 오픈했다. 미용실 이름을 정할 때, 엄마는 꽤 신중하게 고민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끌리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기억 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본인이 원하는 대로 “00 헤어라인”이라고 이름 지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간판을 달고 처음 오픈한 날, 아빠는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엄마가 좋아서 일을 벌여가고 있지만, 매일매일 고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날부터 아빠는 엄마가 벌어온 돈은 쓰지 않고 온전히 엄마 이름으로 저축했고, 그렇게 10년을 벌어서 엄마 이름으로 된 집을 구입해 주었다.


엄마의 아지트이자, 일터인 미용실은 꽤 따뜻함이 감도는 곳이었다. 미용실 안 한편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이따금씩 자는 낮잠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주 6일 9시부터 7시까지 성실하게 가게 문을 열었다. 아무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던 시기가 꽤 오래 이어졌지만, 무언의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엄마는 그렇게 미용실의 사인볼을 켰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을 두었다면, 기념일이나 휴일마다 가게 문을 닫고 여행을 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걸 공감할 것이다. 나의 성장기를 보더라도 중고등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엄마는 없었다. 대신 학교에서 행사를 마치고 나면, 상장과 꽃다발을 들고 엄마 미용실에 가서 가족사진을 남겼다. 엄마는 엄마대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컸겠지만, 나는 나대로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한테 서운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그곳에서 다양한 세상을 만났다. 내가 걸어서 누비는 세상만큼 말이다. 매일 틀어진 뉴스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온 손님들 덕분에 엄마의 세상은 나날이 넓어지고 있었다. 건강 상식이나, 지역 행사 소식, 누구누구의 가정사까지… 머리를 하는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대화들이 오갔다. 그 안에서 엄마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넉넉해진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종종 진상 손님도 있다. 나름 지역에서 이미용 정찰제를 규칙으로 하고 있었지만, 엄마의 성격을 만만하게 보고 가격을 함부로 깎거나 불만을 쏟아내는 손님도 있었다. 내가 본 손님 중에 만족스럽게 머리를 하시고는 갑자기 돈을 이것 이상 줄 수 없다며 본인 마음대로 계산해 버리고 떠난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마다 미용실을 찾아오는 그분을 엄마는 내쫓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오지 않는) 그런 비인격적인 분을 보고 있으면 엄마가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사장인 엄마가 말하지 않아서 그의 딸인 나도 아무 말하지 못하고 그 장면을 목격만 했던 게 지금도 내내 억울하다.


그런 과정에도 엄마의 미용실은 나날이 번창했다. 가게를 넓혀 이전했다가, 상가를 구매해 더 넓은 미용실을 오픈했다. 엄마가 원하는 쾌적한 공간에, 원하는 인테리어로 모든 것을 갖추고 나니, 비로소 엄마가 나름의 원하는 꿈에 다다랐다는 사실이 멋져 보였다.


지금은 내가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1년에 고작 서너 번 엄마 미용실을 방문한다. 갈 때마다 아이들 머리도 자르고 나도 헤어스타일 변신을 한다. 특별히 원하는 스타일이 없을 때면 엄마한테 맡기는 편이다. 몇 마디 툭툭 나누면서 각을 재고 나면 바로 머리를 다듬기 시작한다. 가끔씩은 인스타그램에서 멋져 보이는 스타일을 엄마한테 보여주면서 요청할 때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 드라이로 만들어진 모습이라 펌을 하고 평소에 내가 드라이를 잘해줘야 한다는 당부를 한다. 허나, 나는 헤어 메이크업은 세상 귀찮은 워킹맘이라 그런 시간을 쓸 여유가 없어서 내추럴한 스타일을 선호한다.


이번에도 긴 명절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엄마의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아이들은 스포츠컷으로 시원하게 다듬고 나는 두피에 착 붙는 머리가 싫어서 뿌리를 살린 히피펌을 했다. 굵은 모에 펌이 잘 먹지 않은 내 머리 특징을 잘 아는 엄마는 평소 하던 것보다 더 시간을 써서 머리를 해줬다. 꽤 오래 직모 스타일을 유지하다 세상 꼬불거리는 펌으로 변신하자 적응이 안 돼서 깜짝 놀랐다. "나 회사 어떻게 다녀..." 당황한 나에게 남편은 "귀여운데~~"라고 했지만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T에 가까운 첫째는 괜찮다면 다시 게임에 집중했고, F에 가까운 둘째는 "엄마 다시 머리 돌려놔야 해"라며 나처럼 적응이 안 되는지 울상을 지었다. 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는 게 재밌으면서도 불쑥불쑥 거울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그래도 한번 펌을 하면 거의 1년은 유지되는 터라, 이 머리에 잘 적응해 봐야지 다짐해 본다.


어느덧 내 나이가 서른일곱, 엄마를 미용사로서 지켜봐 온 시간이 강산이 두 번 이상 바뀔 만큼 흘렀다. 엄마가 언제까지 미용실을 할 수 있을까? 싶으니, 지금 이 머리도 소중해졌다. 지금껏 내 머리를 다른 미용사에게 맡긴 적이 거의 없다. 결혼할 때를 비롯해 손에 꼽을 정도이니... 그녀는 내 인생 최고의 헤어 디자이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 건강히 오래도록 함께 해요 -

사랑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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