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e note #1
2008년 프로방스 아비뇽에서 아직 미성년자였던 내가 음료수인 줄 알고 와인을 마셨던 게 처음이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던 날, 너무 목말랐기에 얼음 버킷에 담겨있던 와인은 당연히 맛있는 음료로 오해할만했다.
그러고 5년이 지난 2013년 성인이 되어 다시 찾은 아비뇽에서 마신 와인은 그 처음의 기억을 잊게 끔 만들었다. 다시 마셔본 와인은 맛있었고, 괜히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기억하고 싶어서 혼자 라벨을 읽어 내려갔다. Côtes du Rhône 2011, Réserve.
프랑스를 떠나는 날, 와인을 사서 가고 싶어 면세점에서 잘하지도 못하는 불어로 '나 프로방스 와인을 찾고 있어. 론 지역 와인이고, 2011년 생산이야.'라고 점원에게 물었다. 당연히 점원은 '더 정보가 필요해. 차라리 나에게 라벨을 보여줄래?' 라며 더 많은 정보를 요구했다. 바보같이 나는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고, 전혀 다른 라벨이 붙여진 2011년 산 론 지역 와인을 구매하여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물론 그 와인도 너무 맛있었다.
'와인'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프랑스를 떠오르는 이유는 가장 유명한 생산지이라서기도 하지만,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먼저 품질관리체계를 잘 갖췄기 때문이다. 흔히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면 음식과 술에 대한 단어를 꼭 익혀둬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AOC다.
AOC, 직역한다면 '통제된 원산지 명칭'. 1935년 프랑스 정부가 가짜 와인이 판치는 세상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를 말한다.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넘어온 와인을 라벨만 갈아 끼워 프랑스 고급 와인으로 사기를 친다든지, 질이 떨어진 포도의 시큼함을 숨기기 위해 설탕으로 맛을 속여 판매한다든지. 이렇듯 와인 사기의 피해가 커지자 정부가 먼저 나서서 와인의 품종 관리를 시작한 것이다.
Terroir, 땅에서 나오는 재배환경을 뜻하는 말로 땅을 의미하는 Terre에서 기인했다. 포도의 재배환경에 따라 와인의 맛이 달라진다는 철학이 담겨있는 이 말처럼, 프랑스 정부는 일정 관리체계 내에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생산해야만 AOC 등급을 부여했다. 물론 벗어나면 AOC 자격을 박탈시키고는 했다.
이후 유럽이 EU로 통합되면서 원산지 Origine을 '제한한다'는 말을 '보호한다'라고 변경하고자 했다. 2016년 모든 유럽연합 가입국은 이 제도를 지키게 되었고, AOC에서 AOP (Appellation d'origine Protégée)등급이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AOC를 쓰고 있긴 하다.
와인 라벨은 보통 구대륙 와인들로 읽는 법을 연습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구대륙 와인들이 정보가 충분히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구대륙 와인을 읽기 위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와인 등급이기 때문에, 앞서 AOC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프랑스에서는 AOC/AOP 등급이 있으면 어느 정도 보장된 재배환경을 거친 와인으로 볼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DOC (Demo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와 DOCG (Demo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e Garantita) 등급을 붙이곤 한다. DOC를 5년간 거친 와이너리가 받는 등급이 DOCG이므로, DOCG 등급을 받은 와인이면 큰 무리 없이 잘 만들어진 와인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독일, 스페인 등 모든 유럽연합의 국가들은 이러한 와인 등급을 저마다 들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원산지 Origine 안에서 포도를 재배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다른 지역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사례가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같은 지역에서 재배된 포도더라도 최종 생산된 와인의 맛에는 차이가 생길 수 있기에, 포도 재배의 지리적인 표시로 와인의 등급을 보호받을 수 있게끔 체계가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원산지 명칭으로 보호받는 PDO (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PGI (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 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등급이 없는 와인도 많다. 그럼 별로인 건가?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내추럴 와인들은 독특한 재배환경의 포도를 사용하기도 하고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AOP/DOP와 같은 등급을 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건 아니니, 와인 등급을 보고 맛을 보기도 전에 확신하지 말자.
와인 라벨을 보면 가장 크게 보이는 텍스트가 있다. 보통 와인 라벨의 가장 큰 텍스트가 그 와인을 지칭하는 이름이 된다. 그 텍스트는 생산자의 이름일 수도 있고, 와이너리의 이름일 수도 있다. 또 브랜드 명이나 지어진 이름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호주산 와인인 '옐로 테일'은 브랜드 명이고, 가장 유명한 샴페인인 중 하나인 '돔 페리뇽'은 그 자체로 이름이 지어진 경우다. 포르투 와인 '그라함스'는 와이너리 이름을 따왔고, 리슬링으로 유명한 '닥터 루젠'은 생산자 에른스트 루젠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두 번째로 눈이 갈 수밖에 없는 텍스트는 바로 품종과 빈티지다. 와인의 품종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떤 향과 맛을 가지고 있을지 예상이 가기 때문에, 와인의 이름 다음으로 품종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신기하게도 옛 프랑스 와인은 품종을 써두지 않았다. 생산자나 와이너리의 이름만 봐도 예상가는 향과 맛이 있어 굳이 품종으로 가두려 하지 않았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믿거나 말거나다. 어쨌든 요즘의 신대륙 와인은 모두 품종을 써두니, 특정 품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체크해보자.
빈티지는 해당 와인을 만들기 위해 재배된 포도를 수확한 년도를 뜻한다. 어떤 해에는 포도 재배가 엉망인 때도 있고, 또 반대로 포도가 잘 영글었을 때도 있다. 그렇다 보니 좋은 포도가 수확된 년도를 좋은 빈티지라고 한다. 매년 나오는 빈티지 차트를 체크하면 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즐기는 와인이라면 필요 없다. 정말 고가의 와인에나 빈티지 차트가 필요하다.
스파클링 와인은 그 당도에 따라서 스타일을 보여주는 이름이 있다. 가장 드라이한 스파클링을 Brut라고 부르고, 반대로 가장 스위트한 것을 Doux라고 부른다. 물론 이는 프랑스어 기준이다. 다른 국가의 스파클링을 마시게 될 때에는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본인에게 맞는 스타일을 고르는 것을 추천한다.
스페인 레드 와인을 구매하려고 둘러보다 보면 'Reserva' 라는 표시가 보인다. 이는 와인을 오크통에 보통의 기간보다 오랫동안 숙성시켰을 경우 표기하는 말이다. 스페인의 기준에 따르면 Grand Reserva는 최소 5년을, Reserva는 최소 3년을 숙성시켰을 때 표기한다. 물론 이 표기 또한 국가마다 표식이 다르고, 그 표기 기준도 다르다.
포트 와인은 어린 와인을 양조한 후 스테인레이스 스틸 숙성을 통해 만들어낸 루비 스타일, 오크통 숙성을 통해 만들어낸 타우니 스타일 등을 써두기도 한다. 특정 연도의 포도로만 사용하여 양조했다면 '빈티지 포트 Vintage Port'라 부르고, 오크통에서 4~6년간 숙성한 후 병입 하는 단일 빈티지를 LBV (Lated Bottled Vintage)라고 부른다. 헷갈릴 수도 있는데 LBV는 일반 빈티지 포트와 달리 좋은 빈티지의 포도로 양조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서 가격이 오히려 저렴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