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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청록 Apr 12. 2016

#01. 유재하 - 그대 내품에

하나하나 손질한 단어들로 빚어낸 낭만

가사를 읽다 #1. 유재하 - 그대 내품에


1987년, 데뷔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남겨 한국대중음악사를 뒤흔들고는 홀연히 사라진

유.재.하.

이 작은 앨범 속 그가 남긴 유작들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발라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새길 만큼 작곡의 면에서도 획기적인 작품들이었지만, 가사적인 면에서도 하나같이 감상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노랫말을 담고 있다.

기계음 사이에서 반복되는 무의미한 가사들이 현란하게 배열된 요즘의 가사와는 다른, 정갈하고 섬세한 노랫말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노랫말을 가진 <그대 내품에>의 가사를 차분히 읽어보고자 한다.


우선 음악을 들으며 전문을 읽어보자


YOUTUBE 링크 : https://youtu.be/ttZ1Z2F9do4


별 헤는 밤이면 들려오는 그대의 음성
하얗게 부서지는 꽃가루 되어 그대 꽃위에 앉고 싶어라
밤하늘 보면서 느껴보는 그대의 숨결
두둥실 떠가는 쪽배를 타고 그대 호수에 머물고 싶어라

만일 그대 내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사랑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술잔에 비치는 어여쁜 그대의 미소
사르르 달콤한 와인이 되어 그대 입술에 닿고 싶어라
 취한 두눈엔 너무 많은 그대의 모습
살며시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그대 곁에서 맴돌고 싶어라

만일 그대 내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사랑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어둠이 찾아들어 마음 가득 기댈 곳이 필요할 때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전주)

= 스트링 연주 사이로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흘러나온다. 높은 음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패턴은 마디가 지날 때마다 첫음이 한계단씩 내려간다. 마치 밤하늘에서 하얀 별빛들이 뿌려지는 것처럼.  


[별헤는 밤이면 들려오는 그대의 음성]

= 여느 때와 같은 시커먼 밤이 아닌, 별을 셀 수 있을 정도로 별들이 반짝이는 아늑한 밤. 그 황홀한 순간 내 귓가에 속삭이는 연인의 음성.... 때때로 우리가 평소에 자주 쓰는 우리말 표현 대신 다소 어색한 한자표현을 쓰면 그 낯섦이 더욱 애틋하고 깊이있는 느낌을 주곤 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음성'의 자리에 '목소리'가 들어가는 것이 더 익숙하고 일상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연인이 말하고 있다는 정도의 느낌만 주는 '목소리' 대신 '음성'은 더 귓가에 속삭이는 느낌, 더 애틋한 느낌, 더 섹시한 느낌을 준다.


[하얗게 부서지는 꽃가루 되어 그대 꽃위에 앉고 싶어라]

= 얼핏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 중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라는 구절의 정서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먼지가 되어>에서는 "작은 가슴 모두 모두어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이라는 앞구절에서 나는 당신에 비해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먼지가 되어서라도 당신에게 닿고 싶다는 정서가 뚜렷히 드러나는 반면에 <그대 내 품에>에서는 그 정도로 사랑하는 대상을 신격화하고 자신을 많이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한다고 볼 여지는 없다.

그저 너무 소중해서, 너무 사랑해서 어디라도 날아가 닿을 수 있는 꽃가루가 되어서라도 그대의 곁에서 함께하고 싶다는 낭만적인 구절로 보인다.

= 그런데 이 대목을 두고 유재하가요제 출신 싱어송라이터 박원은 "가사가 참 야하다"라고 한 적이 있다. "하얗게", "꽃가루"라는 것이 남성의 정액을, "그대 꽃"이 여성의 성기를, "앉고 싶다"가 성행위를 묘사한다고 본 것일 테다. 박원이 그런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딱히 그런 생각까지는 못해봤지만 여러 단어들이 모여서 만드는 상징과 앞선 '음성'이라는 섹시한 표현에서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여지는 있어 보인다.

한국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이라 해서 섹스를 다룬 곡을 절대 쓰지 않는 성인군자라고 재단해선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연인이 나눌 수 있는 가장 강한 애정표현을 이토록 은유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더 대단한 면모이지 않을까.


[밤하늘 보면서 느껴보는 그대의 숨결

두둥실 떠가는 쪽배를 타고 그대 호수에 머물고 싶어라]

= 이제 이 대목도 왠지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밤하늘을 보면서 그대의 숨결을 느낀다... 가까이 누워있는 것으로 연상될 때 그녀의 숨결은 그의 목덜미를 타고 쇄골에 머무르지 않을까 싶다. 이어서 나오는 '쪽배를 타고 그대의 호수에 머물고 싶어라'라는 구절도 성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일 법 하다. 만약 유재하가 정말 이런 의미를 의도하고 작사한 것이라면 표현 자체로 아름다우면서도 얼핏 비유도 담아낸 그 고도의 은유법에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전지적 음란마귀의 시점을 걷어내고 다시 한번 바라보자. 주인공은 연인과 교외로 나와 돗자리를 펴두고 함께 누워 있는 듯하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면서 그들은 함께 별을 헤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주 누은 그녀의 음성을 가까이서 듣고, 또 가까이서 그녀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그 행복감과 황홀감 속에서 꽃가루가 되어서라도, 쪽배를 타고서라도 그대 꽃위에, 그대 호수에서 함께하길 바라고 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은 행복한 순간, 꿈처럼 아름다운 표현으로 마주 누워있는 연인에게 영원히 그대 곁에 머물고 싶다고 속삭이는 낭만적인 풍경이다.


[만일 그대 내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내 사랑]

= 브릿지 부분에서는 앞서 연인과 꿈만 같은 찬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1절과 달리 마이너 코드로 진행되면서 다소 음울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는 잠시 그녀가 자신을 떠났을 때를 가정해 보았다.

그 만약의 순간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멜로디처럼 침울해지고 만다. 그러나 그는, 그대가 떠나면 슬플 것이다, 그리워할 것이다 라고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대신 끝까지 당신을 따르겠노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곳이 어디라 하더라도, '저 끝까지' 따르겠노라고 한번 더 강조해 말한다.

꽃가루가 되어, 쪽배가 되어서도 함께 하고 싶은 '내 사랑' 그대이기 때문에.


[그대 내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 주인공은 '내 사랑' 그대를 꼭 끌어안는다. 그녀를 품 속에 안고서 눈을 감으라 한다. 그리고 함께 사랑의 꿈을 나누자 한다. 꽃가루가 되어 그대 꽃위에 앉는, 쪽배가 되어 그대 호수위에 앉는, 찬란한 사랑의 꿈.

눈을 감고 서로를 안은 채 꿈꾸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꿈.


[술잔에 비치는 어여쁜 그대의 미소

사르르 달콤한 와인이 되어 그대 입술에 닿고 싶어라]

= 이제 그는 그녀와 함께 술을 한잔 마시고 있다. 예쁜 그녀의 웃음은 투명한 술잔에까지 영롱히 비친다. 그는 그런 그녀의 미소에, 그녀의 미소에 닿고 싶다. 사르르 달콤한 와인이 되어, 와인이 그녀의 입술을 적시듯 그녀의 입술에 닿아 촉촉히 적시고 싶다.


[내 취한 두눈엔 너무 많은 그대의 모습

살며시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그대 곁에서 맴돌고 싶어라]

= 그녀의 입술에 갈증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어느덧 취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앞에 앉은 연인의 모습이 두세개 겹쳐서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 옆에 머물고 싶다는 1절의 바람을 잊지 않는다. 술에 취해 헤롱헤롱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되어서라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곁에 맴돌고 싶다 고백한다.


*후렴 반복

= 유재하는 '그대내품에' 부분을 부를 때 '그대내'까지를 같은 박자로 불렀다. 여러 보컬리스트들은 '그대내품에'를 각색해 부를때 이 부분의 박자를 살짝 당기거나 밀어서 세련된 느낌으로 부르곤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재하가 한박자 한박자 꾹꾹 눌러불렀던 것이 더욱 마음에 든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아무런 기교없이 정직하게 표현하는 느낌이 그의 진정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어둠이 찾아들어 마음가득 기댈곳이 필요할때]

= 앞선 브릿지 부분들이 그녀가 자신을 떠날 것을 염려하여 분위기가 어두워졌다면 마지막 브릿지는 그녀가 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을 생각하며 그의 감정은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그럴 때는 자신의 품에 안기라고 다시 이야기한다. 마음이 지쳐 기대어 쉬고 싶을 때엔 자신의 품에 안겨 눈을 감으라 한다. 힘든 일 대신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랑의 꿈을 나누자고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앞선 후렴 부분이 1,2절의 낭만적 분위기를 이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마지막 후렴은 어둠이 찾아들어 힘들어하는 연인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있다. 브릿지 가사의 상황을 변화시켜 같은 문장의 후렴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했다.




유재하는 오케스트라를 활용한 클래식적 발라드를 처음 선보이며 한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이문세(+이영훈), 신승훈을 비롯한 국내 발라드 계보의 원류에는 그가 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작곡뿐 아니라 작사에서도 빛이 난다. 노랫말이 가볍지 않도록 단어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선정하고 그것들을 대중과 공감할 사연 속에 정연하게 배열했다.

일상적인 표현이나 상황을 더욱 특별하게 표현하기도 하고(그대의 음성, 끝까지 따르리, 내 취한 두눈엔 너무 많은 그대의 모습), 꿈에서 볼 듯한 장면을 아름답게 그려내기도 한다(꽃가루 되어 그대 꽃위에 앉고 싶어라, 쪽배를 타고 그대 호수에 머물고 싶어라).

음악을 만들고 그 위에 얹을 가사까지도 아름답게 만들어냈던 유재하는 아마 언제까지나 수많은 국내 싱어송라이터들의 동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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