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여구 대신, 진심을 눌러담다
가사를 읽다 #02. 김건모 - 미안해요
90년대 초반 한국에 레게 열풍을 이끌고 3집 <잘못된 만남>으로 역대급 앨범판매량을 기록했던 김건모.
하지만 그의 쇳소리섞인 까랑까랑한 목소리는 레게나 댄스음악에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미안해요>를 통해 그는 진심을 꾹꾹 눌러담아 노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연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수사여구 없는 노랫말에 담아내었던 <미안해요>
아직 사랑에 서툰 1-20대에게는 훅 와닿지 않는 노랫말일지 모르지만
사랑과 이별을 겪으며 연인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남았던 중년들에게는 심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던,
그 노래, <미안해요>
뮤직비디오에서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아름다웠던 배우 장진영 씨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유투브 링크 : https://youtu.be/5YJrB5GWYyU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보고 또 보고 싶은 나만의 사랑
그대는 나만의 등불이여.어둡고 험한 세상 밝게 비춰 주네요
그대여 지금껏 그 흔한 옷 한 벌 못해 주고
어느새 거칠은 손 한 번 잡아 주지 못했던
무심한 나를 용서할 수 있나요 미안해요
이 못난 날 만나 얼마나 맘 고생 많았는지
그 고왔던 얼굴이 많이도 변했어요. 내 맘이 아파요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 아직도 못 다한 말 그댈 사랑해요.
그대의 생일날 따뜻한 밥 한 번 못 사주고
그대가 좋아한 장미꽃 한 송이조차 건네지 못했던
나를 용서할 수 있나요. 미안해요
사는 게 힘들어 모든 걸 버리고 싶었지만
그대의 뜨거운 눈물이 맘에 걸려 지금껏 살아요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아직도 못 다한 말 그댈 사랑해요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
보고 또 보고 싶은 나만의 사랑
그대는 나만의 등불이여
어둡고 험한 세상 밝게 비춰 주네요]
= 화자와 '그대'는 오랫동안 만나온 사이로 보인다. '여인', '등불'이라는 표현에서 화자의 나이도 중년이상은 되어보인다. 지금 이 가사는 '사랑'이라는 고전적 테마를 노래하고 있지만 혼자 숨죽여온 짝사랑,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 헤어진 후의 상실감 등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주며 힘든 삶 속에서 등불이 되어 준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다.
[그대여 지금껏 그 흔한 옷 한 벌 못해 주고
어느새 거칠은 손 한 번 잡아 주지 못했던
무심한 나를 용서할 수 있나요 미안해요]
= 보통의 가사들은 1/2절에 일상적 소재와 표현을 활용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린 후에 후렴에서 "사랑한다", "보고싶다", "네가 밉다" 와 같은 추상적인 감정적 표현을 한다. 그 노래를 듣고 있을 누군가와의 추억을 떠올리다가 후렴구에서 감정이 고조되며 그 감정을 토로하는 수순인 것이다.
그러나 <미안해요>는 반대의 구조를 취한다. 1절에서 '나만의 여인', '보고 또 보고 싶은', '나만의 등불' 과 같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그대를 향한 사랑, 고마움, 애틋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후렴에서는 구체적인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대에게 가지는 '미안함'을 고백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내게 어둡고 험한 세상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과 같은 사람이었는데, 나는 당신에게 흔한 옷 한 벌도 못해줄 만큼 여유럽지 못하고, 거칠은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던 무심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해준 것에 비해 조그만 것조차 해주지 못한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냐면서 그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말한다.
고마운 그대의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던 무심한 남자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묵혀왔다 얘기하는 말,
'미안해요'
[이 못난 날 만나 얼마나 맘 고생 많았는지
그 고왔던 얼굴이 많이도 변했어요
내 맘이 아파요]
=같은 멜로디로 한번 더 반복되는 뒷부분에서는 다시금 추상적/감정적인 고백으로 돌아간다. [1절-후렴1-후렴2]가 [감정-상황-감정]의 구조로 이루어져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후렴1과 후렴2는 분명 같은 멜로디임에도 불구하고 후렴2에서 좀더 직접적인 감정을 노래하고 있어 더욱 격정적인 느낌을 준다. 물론 이는 보컬이 노래를 부르는 데에 반영되었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연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화자의 곁을 계속 지켜준 여인은 그 궂은 시간을 버티는 동안 예전의 고운 얼굴을 잃어갔다. 화자는 그 고왔던 얼굴을 변하게 한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서,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해준 게 없는 못난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
아직도 못 다한 말 그댈 사랑해요]
=오랫동안 자신의 옆에 있어준 사람에게 마음고생만 시키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자기자신에 대한 자책과 연인에 대한 미안함. 그 감정들을 후렴부분에서 토해낸 후 멜로디는 다시 1절로 돌아온다. 연인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이야기했던 1절의 멜로디로.
그는 노래를 시작하면서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라고.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이상으로 그대에게 꼭 했어야 하는 말이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낸다.
'그대를 사랑해요'
[그대의 생일날 따뜻한 밥 한 번 못 사주고
그대가 좋아한 장미꽃 한 송이조차 건네지 못했던
나를 용서할 수 있나요. 미안해요]
=스트링이 메인이 되어 진행된 간주는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말미에 드럼이 화려하게 필인(fill-in)을 넣으면서 최고조에 이른다.
화자는 그녀의 생일에 따뜻한 밥도 사주지 못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꽃 한 송이조차도 주지 못했다. 그가 아쉬워하는 것은 그녀에게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하거나, 명품백이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해주지 못한 것이 아니다. 남들은 다 해줄 법한 따뜻한 밥 한번, 소박한 장미꽃 한송이조차도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미안한 것이다. 평범한 것도 해 줄 수 없었던 자신의 못남을 자책하면서 그는 또다시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다.
[사는 게 힘들어 모든 걸 버리고 싶었지만
그대의 뜨거운 눈물이 맘에 걸려 지금껏 살아요]
= 연인과 함께 한 그 오랜 시간동안 따뜻한 옷 한벌도, 따뜻한 밥 한번도 사주지 못했던 그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그정도의 선물도 하지 못했던 그의 삶은 또 얼마나 팍팍했을까. 그 힘든 삶을 버티기가 힘들어 그는 한 때 모든 걸 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행과 자괴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그녀가 있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그의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말리는 그녀.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도 내 옆을 떠나지 않으면서 나를 끝까지 붙잡았던 그녀. 그런 그녀를 두고 그는 차마 세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물이 팍팍한 삶 속에서도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인 것이다.
[그대는 나만의 여인이여. 아직도 못 다한 말 그댈 사랑해요]
= 1절에서 그러했듯이 후렴 뒤에는 다시 곡 도입부의 차분한 멜로디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삶의 등불이 되어준 나만의 연인에 대한 고마움. 그럼에도 함께하는 동안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미안함. 그 마음들은 결국 한 마디 말 속에 녹아든다. 무심한 그가 그동안 충분히 말하지 못했던 그 말.
'사랑해요'
'사랑'은 누구나 갖는 보편적 정서인 만큼 창작의 소재로서도 참 흔한 소재다. 특히나 사랑노래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대중음악 안에서는 뻔하디 뻔한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 레드오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같은 사랑이야기여도 1. 사랑을 다른 것에 비유하거나 새로운 관점에서 표현하거나 2. 수사적 표현이 아름답고 참신하거나 3. 상황 설정이 흔하지 않으면서 피부에 와닿아야 한다.
김건모의 <미안해요>는 3의 예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주된 상황이 되는 수많은 곡들 대신, <미안해요>는 오랫동안 함께 해온 연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낸다. 마음가득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만큼의 표현이나 선물을 하지 못했던 비참한 경험들을 '옷한벌', '밥한번', '장미꽃 한송이'와 같은 일상적 상황들 속에 녹여냈다. 그것이 음악을 듣는 사람과 상황적 공감, 감정적 공감을 이끌어 내었을 것이다.
사랑, 연인이라는 흔한 소재 속에서도 오래된 연인에게 평범한 것도 해주지 초라한 주인공이라는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일상적인 언어로 담담하게 풀어낸 것이 <미안해요>의 가사가 다른 흔한 사랑노래들 사이에서 특별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