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말레 Sep 22. 2019

큰 이모와 아저씨

우리 큰 이모는 엄청나게 말랐다. 40킬로 정도?

우리 집안사람이 다 마른 건 아니지만 나도 그런 큰 이모를 닮아 그런지 마른 편이다.


큰 이모와는 일 년 정도 아주 잠깐 같이 살았다.

약 20년 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크게 망하면서 갈 곳이 없어져서 엄마와 나, 그리고 여동생이 외할머니댁(큰 이모와 할머니가 같이 살았다)에 얹혀살게 됐을 때.


외할머니 방 벽 한쪽에는 액자가 항상 걸려있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사진도 아니고, 네 남매 중 유일한 아들인 외삼촌의 사진도 아닌,

바로 큰 이모의 사진이었다.

큰 이모 이십 대 제일 이쁠 나이에 한복 곱게 입고 찍은 사진 한 장.


어렸던 난, "이모는 왜 할머니랑 같이 살고 있냐.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 매번 눈치 없이 물어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모는 "난 할머니랑 결혼했는데?"라며 웃어넘겼다.

그리고 몇 년 후가 지나 내가 나이를 조금 더 먹게 되고 난 뒤. 큰 이모가 사실은 과거에 결혼을 했었고, 불임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이혼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때 할머니 방에 유일하게 걸려있던 큰 이모의 사진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을까.

이후 난 큰 이모가 이모들 중 가장 좋고, 이쁘고, 요리도 잘한다며 아주 얄팍하디 얄팍한 동정심으로 큰 이모를 대했던 것 같다.


말레이시아로 유학을 가있던 중, 엄마를 통해 큰 이모가 다시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나이 오십이 다 되었을 쯤이었다.

멀찍이 다른 나라에서 살다 보니 친척들하고는 명절에나 아주 짧게 통화하고 형식적인 안부를 묻는 게 다라서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큰 이모의 소식은 궁금했다.

결혼을 하게 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생겼을지.  


그 시절 큰 이모는 경기도와 서울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은 백반집을 하셨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한적한 동네 외곽에 너무 흔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평범한 간판 디자인과 이름을 가진 ‘부영식당'(왜 부영이냐고 물었을 때 큰 이모는 그냥 이름이 이뻐서라고 했다).

손님의 대부분은 주변 공장 인부들이었고, 큰 이모의 남편이 된 그 아저씨는 이모의 식당에서 배달일을 하던 분이라고 했다.


두 분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난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 놀러 나왔을 때. 나는 공항에서 날 마중 나온 그 아저씨를 처음 만났다.

나로선 얼굴도 본 적이 없고, 통화 한번 한 적이 없었기에 이 사람이 왜 나를 마중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처음 만난 아저씨의 첫인상은 정말이지 무뚝뚝했다.

누가 때려도 코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거 같이 단단하게 생겼달까? 무섭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크고 까만 얼굴에 평생을 노동자로서 살아오셔서 그런지 덩치도 크셨다.

난 처음 만난 그 '큰 이모부'가 낯설었고, 어린 마음에 섣불리 이모부라고 부르기가 어려워서 철없게도 난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웃긴 건 그 이후에도 내가 한국에 나갈 때마다 그 아저씨는 매번 무뚝뚝한 표정으로 공항까지 날 데리러 오셨다.


아주 나중에 여쭤봤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혼자 뻘쭘하게 마중 나오셨냐고, 처음 보는 사이라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었을 텐데 대체 왜 그러셨냐 물으니.

조카가 생긴 게 신기하고 좋았다며 새빨게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쯤부터 난 자연스레 그를 이모부라고 불렀던 것 같다.


이모부가 할머니에게 "따님과 결혼하게 허락해주십시오"라는 말을 하던 날.

할머니는 이모부에 얼굴에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얼마나 아끼는 딸이었을까. 할머니는 적어도 가족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길 바랬다고 했다.

이모부는 <그것이 알고 싶다>같은 프로그램에서나 다루는 '형제 보육원' 출신이었다.

가족 없이 고아로 자란 사정이 딱하다는 걸 할머니도 알고는 계셨지만, 당신의 큰딸과의 결혼에 대해서는 크게 반대하셨단다. 하지만 이모부는 포기하지 않고 장장 이틀을 넘게 할머니 집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할머니의 허락을 기다렸다고 한다. 마치 은행나무침대의 황장군처럼.

마음이 약하신 우리 할머니는 결국 큰 이모부의 진심 어린 마음에 못 이기셔 결혼을 허락하셨다.


다행히도 결혼 이후 큰 이모부는 할머니 댁에 엄청난 힘이 되었다.

여자 둘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척척 해결해주셨고, 배달이면 배달, 무거운 짐들을 번쩍번쩍.

할머니의 심부름부터, 비닐하우스 만드는 일, 텃밭 가꾸는 일, 고장 난 기계 고치는 일, 운전 등등.


결정적으로 동네 이웃 모두의 마음까지 사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한 번은 할머니가 심장약을 잘못 드시고 쓰러지신걸 제일 먼저 발견하고 병원까지 업고 달려 할머니를 살려낸 일이었다. 의사는 이모부 덕에 금방 응급실로 와서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가족들이 "앰뷸런스를 부르지 왜 힘들게 뛰어갔냐" 묻자,

그러면 늦을 거 같았다고 기다릴 새가 없었다고 했다.

정말 너무 고맙다는 가족들의 인사에 큰 이모부는 손사래를 치시며 붉어진 얼굴로 웃기만 하셨다.

할머니를 누구보다 진정 엄마처럼 대하는 순박하디 순박한 이런 사람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한국 갈 때마다 마중 나와 없는 돈에 맛있는 거 사주시려던 큰 이모부.

조카에게 용돈 한번 줘보고 싶었다며 내 손에 꼬깃한 지폐를 꼭 쥐어주시던 큰 이모부.

몇 년도 안돼서 너무나 빨리 정이 들어버린 큰 이모부.

내가 큰 이모부라고 부를 때마다 부끄럽다고 그리고 또 이모부라고 불러줘서 고맙다며 귀가 벌겋게 달아오르시던 큰 이모부는, 이모와 결혼한 지 채 5년이 안돼서 배달 중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셨다.


“할머니가 나이가 있으시니까 말씀드리지 말자.”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가 충격을 받으시고 쓰러지실 수도 있다는 가족들의 회의 결과로.

할머니 모르시게 장례를 치르고, 가까운 납골당에 안치시켜드렸다.


일주일이 넘게 큰 이모부가 보이지 않자. 할머니는 왜 김서방이 안 보이냐며 여쭤보셨고 그때마다 이모들은 김서방 급하게 돈 벌러 지방에 갔다고 몇 달이나 지나야 올 거 같다고 둘러댔다.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아침. 할머니가 일어나시자마자 큰 이모를 붙잡고 물으셨다.

"김서방이 죽은 거구나. 지난밤 꿈에 나와서는 나에게 큰절하고 어머니 건강하시라고, 죄송하다고 하고 가더라."

큰 이모부가 그렇게 갑작스레 떠나시고 난 후부터 큰 이모는 술에 의존하며 예전보다 더 많이 야위여 갔다.


얼마 전 카페에서 큰 이모와 굉장히 닮은 여성을 봤다.

하지만 그분은 고급스러운 옷에, 값 비싸 보이는 가방을 메고, 자신의 손주로 보이는 아기들에게 케이크를 떠먹여 주고 있었다.

큰 이모와 신기할 만큼 닮은 그분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한 죄책감이 들어 카페를 나왔다.


한 달 전 큰 이모를 만났을 때. 난 큰 이모에게 술 담배 끊고 밥 좀 많이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큰 이모는 자신이 38킬로가 되었다고, 그마저도 살이 좀 찐 거라며 허허 웃었다. 그리곤 오히려 나에게 너야말로 왜 이렇게 말랐냐며 날 준다고 미리 재어두었던 간장게장 한통을 기어코 차에 실어주었다.

할머니가 만일 떠나시게 되어 큰 이모 혼자 살게 되어도 더 이상은 살이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