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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 Jul 11. 2023

할머니 보내드리는 길 2. 긴급 돌봄은 없다.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하기) 동생과 함께하는 할머니의 장례.


(1에 이어서.)

<최대한 감정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하며 발생된, 현실적인 문제들을 쓰려고 한다.>


할머니는 병원에 가신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다 연락을 받은 금요일 새벽.

이르면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모두 병원으로 뛰어갈 수는 없었다.

동생이 있었으니까.

병원에 가도 뭔지 모르고 이것저것 만지다 사고 칠 동생이.


다행히 오늘은 복지관에 가는 날이라

어머니 아버지는 병원으로 뛰어가시고,

나는 동생 복지관 보낼 준비를 했다.


씻는 것, 먹는 것 챙겨서 동생 복지관 보내고.

나는 발달장애인지원센터에 전화했다.

"긴급 돌봄"을 신청하기 위해.


이미 언론에서는 4월 1일부터 발달장애인들의 긴급 돌봄이 가능하다고 홍보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313139800530?input=1195m

그런데, 전화는 절망적이었다.

"아직 기관이 선정되지 않았다."

"지금은 신청이 불가하다."

"시행하고 있는 곳은 전국 단 한 군데도 없을 것."

이라는 답변을 얻었다.


언제 시행될지 모르겠다는 답과 함께.


시행할 준비조차 되지 않고서는, 언론에는 4월부터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었다.


급하게,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동생 다니는 복지관,

아는 분을 통해 협회등.


그런데 아직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니 상담받기 어려웠다.

언제 돌아가실지는 솔직히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미리 예약할 수도 없고, 주말에 당장 데리고 있어 달라 할 수도 없었다. 고비를 넘기고 다음 주, 또 그다음 주가 된다면 다시 부탁드릴 수도 없으니.

참 난감했다.


할머니가 위독하셔도, 동생을 맡아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사실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동생을 맡아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데,

난 정신없이 전화기만 붙잡고,

오후에 복지관에서 돌아올 동생을 돌보아줄 곳을 찾으려 전화만 한 시간 넘게 하고 있었다.

아는 분을 통해 여기저기 전화한 끝에 어렵사리 사설시설이나, 단기시설등을 안내받았지만 아직 여러 통화를 해야 했고, 복잡했다.


부모님은

일단 얼른 병원으로 오라 하셨다.


모든 것을 멈춘 채 병원으로 내달렸다.

더 이상 전화하고 알아보느라 지체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의식이 없이 힘겹게 숨 쉬고 계셨다.

나는 그렇게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가시는 길.

할머니가 다행히 시간을 조금 주셔서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실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의 끝을 뵙지 못하고

복지관에 돌아올 동생을 돌보러 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그날,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셨다.


동생은 할머니 임종을 당연히 보지 못한다.

병원의 장비를 만질 수도 있고,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기 때문.


동생이 복지관에서 돌아오고,

난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부모님은 장례식장 설명과 계약.

난 할머니 모실 곳에 필요한 서류들을 떼느라 바빴다.


다행히 동생은 활동지원사선생님이 잠시 봐주실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머피의 법칙. 항상 일은 겹쳐온다고...

활동지원사님이 동생 맡으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여행을  가신다고 월요일 휴가를 내신 상황이었다.

동생일을 해주셔야 해서

금요일에 출발하시는 상황이라 활동지원사님도 오래 동생을 돌봐주시긴 힘들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시간이 끝나고,


장례식장의 배려로 임관하시기 직전

조용한 곳에서 동생은 할머니를 뵐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동생은 집으로 돌아갔다.

동생은 장례식장에 있기는 힘들었다.

호기심이 넘쳤고,

상차림음식에 손댈 수도 있고,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정신없는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동생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혹시 낯선 곳에서 잠깐만 놓친다면, 동생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첫날 나와 동생은 집에 있었다.


다음날 새벽.

여전히 긴급 돌봄은 사용할 수 없고

멀리 사는 이모와 이모부가 정말 감사하게도 와주셨다.

몇 시간을 차로 달려.

동생을 돌보아주시기 위해.

아침 일찍.

이모와 이모부가 안 계셨다면.

평일이라 돌보아주기 힘드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의 배려 덕분에

할머니를 잘 보내 드릴 수 있었다.


거기에 정부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긴급 돌봄?

진짜 긴급하게 필요할 때 돌봄이 가능한가?

아직. 정비 중이고 방안을 마련 중이라면

왜 언론과 홍보 속에는 다 된 것처럼 발표되는가?


할머니 보내드린 길을 자세히 서술한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장애인 가족들이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

 이것 한 가지이다



누군가

장애 가족이

수술을 앞두고,

임종을 앞두고,

각종 경조사를 앞두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친인척, 주변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아파서도

돌아가셔서도 안된다.


혼자 둘 수는 없으니.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이제는,

긴급 돌봄.

어렵고 복잡한 절차 없이.

 오늘 당장이라도 가능한가?


지금 당장 내가 쓰러져 긴급수술한다 해도

동생걱정 없이...

가능할까?


아직 불가능하다면

아직 시행 전단계라면

아직 시범단계라면.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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