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푸드가 있으신가요
끓이던 라면물을 껐다. 분명 며칠 전에 사둔 것 같은데, 청양고추가 벌써 떨어졌다니, 라면을 끓여 먹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늘 저녁을 거르고 느지막하게 야식을 즐긴 뒤 다음 날 일어났을 때의 그 패배감과 우울함은 말로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쉽기는 했으나, 나의 건강을 위해서 잘된 일이라고 나를 다독였다.
언젠가부터 삼 시 세끼를 챙겨 먹는 것이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되었다. 이전엔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아들 둘을 키우면서부터는 저녁밥을 곧잘 거르게 되었다.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는 음식 하느라 지저분해진 그릇들과 설거지통을 치우면 시간이 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밥 먹이고 목욕시키고 그림책을 몇 권 읽어주고 사랑의 말들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과의 하루가 끝난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왜 오던 잠도 달아나고 없던 식욕도 다시 생기는 건지 참 의아하지만, 어쨌든 그 밤만 되면 하루를 보상받고 싶어서인지 매운 음식이 그렇게 당긴다. 그러기를 몇 년째.
나는 결혼 전에는 체중을 관리하는 편이었다. 유별나게는 아니고, 인스턴트 음식을 피하고 밤에는 되도록 야식을 먹지 않는 것. 그 대신 바나나나 몸에 좋고 포만감이 있는 음식을 먹는 정도였다. 야식은 정말 웬만해서는 먹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가끔은 노선을 이탈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매운 라면에 청양고추를 한 서너 개 총총 썰어 넣고, 순두부와 계란 등을 넣어 내게 위로의 선물을 주었던 것이다. 친정엄만 내가 라면봉지와 청양고추를 냉장고에서 꺼내든 날은 내게 잘해주셨다. 딸이 무언가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나 보다 알아차리시고는 그래도 몸에 좋은 것도 함께 넣어 먹으라며 어묵이고, 두부고 조용히 식탁 위에 꺼내 두시곤 했다. 그런 라면을 내게 선사한 건 한 달에 많아 봤자 두세 번이었다.
그런 내가 육아를 시작하고부터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라면을 먹는다. 생각해 보면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날 특별히 두 아이 중 누군가가 유독 힘들게 했다던가 하는 것도 없다. 그냥 나 중심이었던 삶이 가족 중심으로 바뀐 것이 여전히 어색한 일이고 힘에 부치는 일인지 라면을 꺼내는 날이면 뭔가 머쓱해진다. 이제는 좀 더 건강한 음식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내 평생의 소울푸드. 이제 나의 건강과 우리 가족의 건강을 위해 떠나보내야 한다니.
어렸을 적 엄마가 내게 끓여주었던 라면은 여전히 내게 따뜻하다. 라면을 먹고 싶다던 내게, 건강에 좋지도 않은 걸 왜 먹느냐고 핀잔을 주셨다. 그러면서도 냉장고에서 두부, 계란, 팽이버섯, 어묵 등등 영양을 보충할만한 것들을 잔뜩 꺼내 함께 끓여주셨다. 그게 내 소울푸드가 된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내가 해주는 음식들 중에 평생의 소울푸드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고민이 된다. 어떤 음식을 해줄까. 어떤 음식이 우리 아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