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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희 Mar 11. 2017

유기농 채소가 쿨쿨, Kul Kul Farm

아빠와 두 남매의 Bali 이야기, Green School 이야기 ⑨

파파야 심던 날

쿨쿨팜Kul Kul Farm은 그린스쿨의 협력 농장이다. 그린스쿨 설립자의 아들 오렌 하디Oren Hardy가 맡고 있다. 이 농장은 학교에 유기농 채소를 공급하고, 아이들의 수업과 실습 현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외부인을 대상으로 퍼머컬쳐permaculture나 유기 농법에 관한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큰 틀에서 그린스쿨이 지향하는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관과 비전을 공유하는 곳이다. 


이 농장은 발리에 오기 전부터 나의 흥미를 끌었던 곳 중 하나다. 농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살면서 여러 해 동안 주말 농장을 가꾸며, 한 해도 손에 흙을 묻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채소를 가꾸는 재미 자체도 클 뿐 아니라, 최소한의 먹거리를 자급한다는 보람도 컸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문화로 자리 잡은 도시농업이라는 라이프 스타일이 주는 의미를 굉장히 크게 평가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학교에 적응하면 나도 학교를 중심으로 자원봉사 활동에 많이 참여하리라 생각했는데, 이곳 쿨쿨팜이 일순위였다. 하지만 인숙 누님의 물귀신 작전으로 말려든 시방 하우스 프로젝트에 몰입하다 보니 선뜻 또 다른 활동을 시작하기 어려웠다. 집을 고치는, 조금은 고된 노동력이 요구되는 봉사가 수요일에 있었고, 쿨쿨팜 자원봉사는 매주 목요일에 진행된다. 이틀 연속은 아무래도 무리다. 몸을 좀 풀 시간이 필요했다. 더욱이 이곳은 적도 바로 아래가 아닌가. 


쿨쿨팜 창고에 농기구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 ©이성희


그러다가 자재 문제로 집수리 작업이 주춤한 틈을 타서 쿨쿨팜을 찾았다. 아홉 시에 시작해서 점심 식사를 하고 마치는 일정이다. 농장에 가 보니 그린스쿨 학부모는 없고 젊은 청년들 서너 명이 모였다. 일을 시작한 이후로 서너 명이 더 왔다. 대화를 나눠보니 실제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거나 직업적으로 농업을 생각하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고랑마다 건초를 두텁게 깔아 주었다. ©이성희


첫 작업으로 건초로 덮인 고랑에 파파야 묘목을 심었다. 발리에서 흔하고 흔한 것 중 하나가 파파야 나무다. 농장에서 잘 가꿔진 것들도 있지만 길 옆 빈 터에 제멋대로 자란 것들도 많다. 아무 데나 아무거나 심으면 잘 자랄 것 같지만, 건기(乾期) 끝자락의 발리 기후는 농부에게 굉장히 가혹할 정도다. 파파야 묘목 심을 구멍을 파는데 땅이 메마르고 딱딱해서 연장이 들어가지 않는다. 


구멍마다 호스를 대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계속 물을 들이붓는다. 모종을 심은 후에는 바나나 나무줄기를 벗겨 만든 삿갓을 씌워준다. 그리고 수분 보존을 위해 이랑마다 두텁게 건초를 깔아 준다. 농사는 전쟁이고 농부는 투사가 되어야 한다. 가혹한 기후를 견디는 투사가 되어야 하는데, 농민을 자꾸만 광화문 앞의 투사로 세우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린 파파야 묘목이 말라 죽지 않도록 바나나 줄기를 벗겨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이성희


파파야 묘목을 다 심고 나서 밭 주변으로 배수로를 정비했다. 흙은 거름기가 많아 보였지만 오래 비를 맞지 않은 탓에 잘 파이지 않았다. 힘든 작업이지만, 우기에 접어들면 폭우가 쏟아질 텐데 지금 준비해 놓지 않으면 밭은 또 엉망이 될 것이다.


마지막 작업으로 육묘장을 정돈했다. 검은색 차양으로 지붕을 덮은 육묘장 안에는 온갖 화초와 채소들의 모종들이 자라고 있었다. 습지에서 자라는 듯한 긴 덩굴 식물을 잘라 모판에 꽂았다. 빈 화분을 치우고, 식물들을 종류별로 다시 배치했다. 새 모종을 심을 포트에 흙을 담았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싱싱한 유기농 채소를 재료로 준비한 식사를 함께 나눴다. 


육묘장에서는 허브 식물의 꺽꽂이 작업을 했다. ©이성희 


농사 수업, 인생 수업

아이들 수업 시간표에는 그린스터디Green Study라는 과목이 있다.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 옮기자면 환경 교육 내지는 생태 교육에 해당되지만 아이들이 배우는 내용은 그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퍼머컬처의 개념에 가깝다. 무엇을 만들어 쓰는 일, 그리고 생활을 영위해 가는 일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디자인한다는 의미이다. 


아이들은 그린스터디 시간을 통해 프로젝트 하나를 정해 6주간 진행한다. 조그만 텃밭을 꾸미거나, 테마 정원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자연 재료로 악기나 도구를 만들기도 하고,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활용한 요리를 배우기도 한다. 그린스터디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수준에 맞게 잘 구성되어 아이들의 교과 과정에 녹아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지식보다 지혜를 배운다. 그린스터디 과정은 쿨쿨팜을 비롯해 학교 교정 곳곳에서, 그리고 외부 기관과 연계해서 진행된다.


학교 곳곳에 텃밭이 조성되어 있고, 아이들은 여기서 수업과 봉사 활동을 한다. ©Nigel Dickinson


아이들이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도 텃밭이 있었다. 둘째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의 옥상에는 무려 논이 조성되어 있었다. 텃밭의 교육적 가치에 관한 담론이 넘쳐날 뿐 아니라, 시설도 프로그램도 날로 발전하고 있다. 참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런 프로그램들이 간접적이고 일시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아이들의 의식과 라이프 스타일에까지 영향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발리를 경험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내 관심사는 자연(nature), 농업(agricultre), 건축(architecture)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 세 영역의 접점에서 나는 나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교육'의 내용을 찾는다. 오늘 나는 발리의 메마른 흙과 악수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흙을 좋아하는 파란 눈의 청년들과 악수한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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