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두 남매의 Bali 이야기, Green School 이야기 ①
가까운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그린스쿨을 소개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이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얘기했다. 어떤 학교인지 소개를 하다 보니 어느새 연설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 학교를 알기 전부터 늘 하던 얘기를 다시 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유년기가 중요하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가장 행복하다. 미래의 지도자에게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식이 요구된다. 자급과 공유의 라이프 스타일이 필요하다.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그린스쿨을 소개하면서 그동안 일상의 경험을 통해, 책과 강의를 통해 쌓아 두었던 생각의 단편들이 통합되고 있음을 느꼈다. 친구들의 첫 번째 반응은 그 학교가 우리 가족과 참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우리를 잘 아는 가까운 친구들일수록 그랬다. 아이들에게 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잘 어울린다는 얘기도 반가웠다. 아직 입학허가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 학교를 알게 된 것이 행운이라 생각했고, 아이들을 보내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에는 기대감이 더 커졌다.
학교에 관한 정보를 얻어 보고자 검색을 많이 했다. 자료는 적지 않았다. 그린스쿨은 홍보 활동을 잘 하는 것 같았다. 홈페이지는 물론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활용도 탁월했다. 사진과 영상은 전문가의 작품 같다. 그리고 외국 미디어들에 의해 보도된 자료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부모로서 또는 학생으로서 그린스쿨을 직접 경험한 얘기들을 듣고 싶었다. 한국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얘기들이 블로그나 카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블로그와 카페에 올라온 글들의 대부분은 2012년에 우리나라 다큐 프로그램에 소개된 그린스쿨을 보고 적은 것들이었다. 발리 여행 중 그린스쿨 투어에 참여하거나 며칠간의 그린캠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블로그에 올린 글들도 많았으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학교에 대해 감탄했고, 아이를 보내고 싶다는 글도 많았다. 그린스쿨에 다녔던 한 학생이 일기 형태로 학교생활을 적은 블로그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정말 궁금한 것은 학교에 물어보기로 하고 학교에 관한 정보 수집을 멈췄다. 지금까지 본 것으로 충분했다.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유년기가 중요하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가장 행복하다.
미래의 지도자에게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식이 요구된다.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
서울 시내에서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첫째 아이에게는 발리 오기 전에 다니던 학교가 세 번째였다. 처음 학교가 가장 좋았었다고 한다. 지금이 가장 싫단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아이와 맞지 않았던 것이 큰 이유였다. 학습 의욕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숙제를 두고 엄마와의 갈등이 늘었다. 아이 탓만 할 수는 없었다. 학교가 교육의 전부는 아니라는 부모의 마인드가 은연중에 아이에게 학교를 불신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수학이 재미없다는 아이의 푸념은 사실 부모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다. 이런 고민은 자연스럽게 아이의 중학교 진학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우학교라든가 소명학교를 생각하기도 했고, 나의 고향인 충북 보은의 혁신형 중학교를 고려하기도 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도 있건만, 아이를 장래를 위해 무슨 시도인들 못하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더 많은 공부가 아니라 어떤 공백이었다. 아이들이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대치동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른 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돈이 많이 드는, 입시를 위한 일종의 엔지니어링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채용 업무에 전념한 적이 있었다. 국내의 상위권 대학을 돌며 채용설명회를 개최했고 학생들과 수없이 상담했다. 스탠퍼드나 MIT 출신의 연구원들을 채용하기도 했다. 그 친구들 중에는 중학교를 대치동에서 다니고,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도 있었다. 착하고 굉장히 똑똑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에게 맞는 옷은 아니었다. 경쟁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꿈을 스스로 발견하고 추구할 힘을 길러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한 유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피노키오가 추구하던 그런 방종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행복한 자아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If I take one more step, it'll be the farthest away off home I've ever been."
톨킨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반지의 제왕> 3부작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허수아비가 서 있던 황금빛 밀밭을 배경으로, 주인공 프로도 배긴스의 정원사 샘와이즈 갬지가 가던 걸음을 멈추며 내뱉은 대사이다. 운명 같은 퀘스트의 첫발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것이었다.
학습의 목적은 몰랐던 세상의 발견이 아닐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이 신세계를 추구하는 열망을 갖고 있다. 어른들이 강요하는 어떤 학습 클리닉이 없어도, 아이들은 가장 강력한 학습 동기를 이미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는 이걸 무력화시키는데 최적화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공교육 자원은 어마어마하다. 예산의 규모도 그렇지만 교사의 역량, 학사 지원 시스템, 그리고 교육과 관련한 거버넌스도 무척 체계적이다. 그런데 중,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교실 수업의 몰입도와 자발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현상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도시와 비교했을 때 그린스쿨의 환경은 조금 열악하다. 정글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학교는 가끔 수도와 전기가 끊긴다. 사방에 모기 천지다. 교실 밖에서는 닭이 울고, 교정에는 도마뱀과 개구리가 돌아다닌다. 그린스쿨 부모들은 야외 수업 중에 아이들이 뱀에 물리거나, 풍토병에 걸려도 학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상당히 길고 복잡한 면책 조항에 서명해야 한다. 교문 밖을 나서면 집이 드문드문 있을 뿐 말 그대로 정글이다. 물론 학교는 각종 보안 체계와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 그리고 응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절차를 운영하고 있지만, 도심의 일반적인 학교에 비하면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학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외부에서 학교 탐방을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아이들의 표정에 행복이 가득하고 두려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두 아이는 학교를 즐거워했다. 학교라는 대상 자체보다는 매 시간의 수업과 활동과 틈틈이 아이들과 공을 차고 노는 순간 자체를 즐겼다. 학교는 권위와 구속의 상징이 아니라 자유로운 환경 그 자체였다. 자기가 주인공이고, 친구가 주인공이었다. 선생님들 마저도 뭔가를 주도하고 이끌고 가는 입장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필요한 부분을 돕는 분들로 생각했다. 특히 저학년은 열다섯 명 정도의 학급에 담당 교사가 한 명, 수업 지원 교사가 두 명이 배정되어 있다. 학습장애나 여타의 문제를 겪는 아이들은 별도의 도움을 받는다.
정글 속의 학교와 도심의 학교 중 어떤 학교가 더 위험한가. 학교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우리나라 학교는 사실상 벼랑 끝에 서 있다. 미국과 유럽의 고등학교에서 자퇴생이 늘어나는 현상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다뤄지고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일부러 위험을 선택할 필요는 없지만, 때때로 부모는 담대한 결정의 순간에 직면한다.
우리 사회는 위험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다. 안전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놀이터는 자체의 순기능마저 제한당한다. 부모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아이가 스스로 위험을 다룰 줄 아는 기회를 박탈한다. 독일의 놀이터에서 잠간의 시간이 보낸 적이 있다. 동물원에 딸린 작은 놀이터를 둘째 아이는 구석구석 정말로 알뜰하게 즐겼다. 귀국해서 놀이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독일의 놀이터와 놀이터 디자이너, 시공 회사들을 다양하게 소개하면서 그들과의 인터뷰를 들려주었다. "놀이터는 아이들에게 위험을 주기 위함이다. 위험을 제공함으로써 아이들이 위험에 대처할 기회를 마련해 주고, 아이들의 발달을 돕는다." EU의 놀이터 안전기준 서문에 언급된 내용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도전을 즐기며 스스로를 성장시킬 기회를 너무 차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놀이터가 시끄러워야 세상이 평화롭다고 했다. 우리 놀이터가 정치적 사심과 학원에 지친 아이들의 한숨과 공허함으로 가득하다면 우리에게 평화는 요원한 일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추구하던 안전은 통제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녀에 대한 교육관을 오염시켰다.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미덕이지만, 그것이 부모가 원하는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모는 그렇게 사는 걸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진학, 취업,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안전을 강요한다. 똑같은 일이 학교에서도 벌어진다. 부모는 안전한 학교를 원한다. 사고가 없는 의미의 안전한 학교를 의미할 뿐 아니라, 부모의 관점에서 건전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그러나 사실은 대단히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삶을 요구받는, 그런 안전한 학교를 원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그린스쿨에 다니면서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학교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우선적으로 학교는 즐거운 곳이고, 아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두 아이들은 집에 와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 놓는다. 이런저런 질문도 많다. 반가운 변화였다. 동시에 나 자신이 안전한 학교를 강요하는 한 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한국은 교육 선진국이다. 국가적으로 투자도 많고 교사의 역량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안전한 삶을 강요하기로 한 사회적 합의가 문제다. 그래서 때로는 학교를 뛰어넘어야 한다. 사교육 얘기가 아니다. 지식보다 삶을 가르치는 더 큰 학교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그린스쿨에 갈 계획을 얘기했을 때 첫째 아이는 환호했고, 둘째 아이는 조금 떨떠름해했다. 첫째 아이의 환호는 두 해 전에 발리를 여행했을 때의 기억 때문이다. 매일 수영하고, 망고스틴을 실컷 먹을 수 있겠다는 거다. 둘째 아이는 지금의 생활을 즐겼다. 학교에서 축구하고, 집에 돌아오면 도복 챙겨 입고 태권도장으로 쏜살같이 내빼는 자신의 일과를 정말 사랑했다. 왜 그린스쿨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생활해 나갈 계획인지 차근차근 얘기하면서 우리만의 '더 큰 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린스쿨의 설립 이념은 우리 부부가 때로는 새벽까지 대화하고 공감하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발리행은 새로운 변화의 의미도 있지만, 부모의 교육관의 연장 또는 확장의 의미가 컸다.
학교는 예상보다 좋았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이해, 지속 가능한 삶의 실제들, 커뮤니티, 그리고 글로벌 시민 정신.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가치들이 이 학교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교육 과정에 녹아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처음 이 학교를 알게 되고 입학 준비를 하면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소개를 했었다. 아, 생태학교구나. 대부분의 반응은 그랬다. 정의도 불분명한 생태학교가 하나의 유행어처럼 퍼진 이유를 모르겠다. 그린스쿨은 생태 자체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교실을 포함한 학교의 환경과 커리큘럼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린스쿨은 일반적인 과목에 충실하다. 문학(literature), 수학(math), 과학(science), 사회과학(social studies), 예술(arts), 체육(physical excercise)이 커리큘럼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고, 그린스터디Green Study와 선택형 특별 활동에 해당하는 잘란잘란 일렉티브Janan Janan Elective, 그리고 다양한 방과 후 활동(after-school activity)가 그린스쿨에서 특징적으로 운영하는 활동들이다.
그러나 학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적인 내용보다, 동적인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교라는 우산 아래는 5일 정도의 캠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그린캠프Green Camp, 학교 농장인 쿨쿨팜Kul Kul Farm, 재활용센터에 해당하는 켐발리Kembali 등의 부설 기관이 있고, 이러한 기관들은 학생은 물론 학부모와 지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각 기관의 기능들은 수업과 연관되어 있고, 외부에 강의와 워크숍 프로그램을 제공할 뿐 아니라, 지역 공헌 활동을 수행한다. 그리고 학교가 추구하는 환경적인 지속가능성을 향해 학생, 학부모, 지역 주민의 의식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돕고 있다. 학교는 고유의, 타협할 수 없는 설립 이념과 비전을 추구하고 있지만, 학교의 운영과 진보를 위해서 학생, 학부모, 지역의 참여와 소통에 의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린스쿨은 어떤 학교다라고 정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린스쿨에 스스로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 그리고 나의 참여와 기여로 학교를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린스쿨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정리한 대답은 이렇다. 의식과 라이프스타일. 환경에 대한 인식과 철학은 글로벌 시민 의식의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그 신념을 구체적인 생활양식으로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아이들은 그린스쿨에서 이 의식과 라이프스타일을 배운다. 그것이 공부라는 의식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다. 켐발리에서 종이 상자를 가져다가 여러 가지 도형을 만들고, 학교 곳곳의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지역 커뮤니티와 환경에 대해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해 가고 있다. 아이들은 놀이가 공부이고, 삶이다. 원래부터 놀이와 공부는 통합되어 있었다. 유년기의 이러한 추억과 경험을 토대로 고학년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발견하는 성찰의 힘과, 자신의 꿈을 위해 열정과 인내를 동원할 자양분이 되는 건 자명한 일이다.
"아이들이 너무 놀기만 하는 건 아닌가요." 실제로 학부모들 사이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질문이다. 프라이머리 스쿨(Primary School,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이런 걱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유년기의 아이들이 너무 노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공부에 지쳐 동기와 목적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린스쿨의 고등학생들은 많은 과제에 시달린다. 책을 읽어가지 않으면 수업 참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강의를 받아 적기 바쁘고,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교실과는 다르다. 전교생이 모이는 금요일 어셈블리를 통해 각 학년마다 학습한 내용을 공유한다. 그때 고등학생들의 활동과 발표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Bye Bye Plasic Bag 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의 연설과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에 참석하기 위해 지지를 호소하는 학생들의 연설에 크게 감동했다.
아이들이 죽은 지식 속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자신들의 입장이 분명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부모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들의 지성과 감성과 신체가 갖고 있는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더 큰 학교가 필요하다. 그린스쿨은 그 학교의 일부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보낸 시간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평범한 학교에서 공부하더라도, 그들의 의식과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줄 하나의 씨앗이 심겨진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변화를 이루어 낼 것이라 믿는다.